〈 58화 〉 사랑고백
* * *
아일린에게 꼴사납게 제압당한 그날 저녁, 나는 아일린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
인적 드문 숲속의 조용한 수도원.
어디 숲인지, 어느 동네인지,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처음 들어올 때 흘긋 눈에 들어온 낡아빠진 명판에 따르면, 수도원의 이름은 ‘성 알타마디아 성직수도회’라는 것 같았지만.
전혀 모른다. 사실, 내가 알 것 같은 이름이라면 이런 꼴로 영락하진 않았겠지.
“하나아, 두을, 세엣, 네엣, 다서어어여섯일곱여덟아홉, 열! 다 셌어! 찾으러 간다!”
“밀렌! 그거 반칙이야!”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야, 갈레트! 어서 도망쳐!”
“이야아아아아!”
오래 버려져 있었는지 겉보기엔 거의 폐건물들이다만, 의외로 꽤나 떠들썩했다.
방에 연금되어 창문 바깥을 바라만 볼 수 있는 내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생기가 넘친다.
아일린이 구해낸 아이들과 이번에 내가 뜻하지 않게 구한 아이들. 모두 더해 20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지금 이 작은 수도원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숫자가 많으니 아무리 아이들뿐이라도 무척 복작복작하다. 떠들썩하지 않고서야 이상하겠지.
“어때?”
창문 바깥을 보고 있었더니, 내 시선을 눈치 채었는지 아일린이 그런 말을 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손만 놀리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은 아무래도 조금 이질감이 드네.
“뭐가 어때?”
“아이들이 웃는 소리. 괜찮지 않아?”
“......목소리 음색이 너무 높아서 머리 울려.”
“어머나.”
아일린은 자기가 저 아이들의 어머니라도 된다는 양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라고 그렇게 아이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짜증이 치민다는 식으로 말할 정도는 아니다.
그냥 어린애처럼 이런 깜찍한 짓거리를 벌인 아일린에게 반발심리가 생긴 것뿐이다.
지금, 나의 왼쪽 손목에는 새파란 금속실이 묶여 있었다.
파란 금속실은 길게 주욱 늘어져서, 반대편 끝은 아일린의 왼쪽 손목에 묶여 있었다.
길이는 20m 정도. 낭만적이라고 해야할까?
퍽이나.
“나는 아이들이 좋아.”
“아, 그래.”
“만약 내가 결혼해 아이를 낳게 된다면 여섯 명 정도. 으음. 남자아이 셋, 여자아이 다섯 정도 많이많이 낳아서, 아무도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어.”
“셋과 다섯을 더하면 여덟이야.”
“......아이를 낳는다면 네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윽.”
아무래도 그건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냐.
그런 청초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그렇게 내뱉으면 반응하기 힘들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멋지게 자라난 그의 품속에 뛰어들어서 곤란한 표정을 짓도록 만들어주자고, 그렇게 결심했었는데.”
당연히 나도 아일린처럼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라면 물론 환영한다.
그런데 내 품에 안겨들기는커녕 알아보지 못하고 다짜고짜 베었잖아.
“이름을 잊고, 고향을 잊고, 모든 것을 잊고, 잃고, 또 빼앗겨버려서 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두 불쌍한 아이가 언젠가 또다시 만나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가장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그 끝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한 쌍이 되길 바랐어. 비록 세상과 운명이라는 녀석이 우리의 삶을 죄다 망쳐놓았지만, 단 한 번도 굴한 적 없다는 걸. 보람차게 살았다는 걸,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어.”
“아일린.......”
“너와 함께.”
“......미안하게 되었네. 이런 꼴이라서.”
“치. 흥이다.”
아일린이 볼을 부풀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귀엽긴 더럽게 귀엽다. 정말로 눈에 뭐라도 씐 것 같다.
생각해보면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는 굴레를 내게 씌웠던 테레제에게도 마치 반해버린 것처럼 맹목적으로 행동하고 있었지.
갑자기 든 생각인데, 나 엄청 쉽지 않아?
그야말로 쉬운 옂
뭐, 뭐래.
자. 찬찬히 따져보자. 아일린이나 테레제나, 내가 보기엔 모두 굉장히 좋은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아리땁기까지 하니, 남자라면 반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나는 정상이다. Q.E.D. 증명 완료.
여자가 되었더니 쉬운 여자라니 최악이야, 따위의 헛생각을 하려 했다니 한심하구나.
“그래서, 나를 언제까지 가둬놓을 생각이야?”
“조금 참아.”
“말해줘. 나는 어디 가둬져 있는 게 싫어. 물론 너도 잘 알겠지만.”
“......심문관 펠릭스가 제출한 서류가 중간에 반려되지 않고 아리티아 추기경에게까지 무사히 올라가게 된다면 풀어줄 수 있을 거야.”
“내 상황에 대해 테레제는 알고 있어?”
“잠깐, 코넬리아.”
아일린이 볼멘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더니, 잘 뜨고 있던 뜨개질 작품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전히 삐진 표정으로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뭘?”
“아무래도 코넬리아는 나랑 있기 싫은 것처럼 보여.”
보지 못하잖아.
라고 말했다간, 농담이고 자시고 싸다귀를 맞는다 한들 할 말 없겠지.
“설마. 싫진 않아.”
“그럼 나랑 있고 싶어?”
“가능하다면 같이 있고 싶어.”
“가능하다면?”
아일린이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상 감고 있던 텅 빈 눈동자를 뜨고서, 허공을 보며 목소리를 흘렸다.
“일단 유르덴의 테레제가 없어지면, 가능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옆모습만 보였지만, 솔직히 무서웠다.
시각을 잃은 탓이겠지만, 초점을 잃고 크고 동그랗게 뜨인 동공이 무척이나 신경쓰였다.
무엇보다도 아일린이라면 진심으로 내뱉은 말대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문제다.
“그만둬. 나도 죽으니까.”
“응? 왜?”
“목줄이 걸려있거든. 아가씨가 죽으면 나도 죽게 된다는 목줄을.”
“진심이야?”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또 뭐가 있는데.”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지.”
제발 그러지 마라.
나는 처음으로 테레제의 세 계약이 테레제 자신보다도 나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가씨가 상처를 입으면 나도 같은 상처를 입어.”
“그게 뭐야. 네가 무슨 그 여자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거야?”
“아가씨를 아프게 할 셈이라면, 설령 너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그만둬.”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상, 하잖아.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아일린이 소리쳤다.
이상하다고 말하니, 뭐. 솔직히 말하면 신체포기각서를 쓰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남이 보기엔 이상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만.
“왜, 그랬던 거야.”
“왜 그랬느냐니? 그냥 아가씨를 섬기는 편이 살기 편하겠다 싶었을 뿐이야. 무일푼에, 집도 당장 먹을 것도 없었어. 개인적으로 아가씨의 인품에 반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나는 내가 당장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한 것뿐이라고.”
재미없고 꿈도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이 시대에 뜨거운 물을 잔뜩 쓰고, 맛난 음식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할 수 있는 건 솔직히 말해서 축복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시설에서 출하되기 직전에 약을 잔뜩 맞고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듀오토에게 무리하게 덤볐다가 완전 박살나고 붙잡혀서 도망칠 수도 없게 된 탓도 있고.
“예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냐.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노예처럼 살고, 여자까지 되었다고?”
“다시 남자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조건이었어.”
“되돌아갈 수, 있다고......?”
“아마도.”
글로리아가 돌아갈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했으니까.
“그딴 편리한 이야기가 어디 있어. 코넬리아는 속은 거야.”
“그럴 지도 모르지.”
“그리고 고작 편한 데서 살겠다고 그런 계약을.......”
“편하게 살고 싶은 게 뭐가 나빠. 적어도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전생과 현생을 포함해 단 한 번도 여자 쪽의 대시를 먼저 받아본 적이 없는 나라서 무척 슬픈 상황이긴 하지만.
정말로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 것 같긴 같지만.
아일린이 나의 현실적인 모습 탓에 나에 대한 정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차라리 테레제에게로 돌아가는 건 조금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던가.
......이거 완전 쓰레기잖아.
“나도 밥 해줄 수 있어.”
“뭐?”
눈을 다시 감은 아일린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마치 애원하는 듯한 말투였다.
“산나물이랑 물고기로 요리해서 맛있는 거 많이 먹여줄게! 화, 화려한 방은 무리라지만, 나름 안락한 방 정도는 마련해줄 수 있어. 내가 여기 아이들이랑 열심히 만들게! 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만들 수 있어. 아무래도 유르덴 공작가 정도로 호화롭긴 힘들겠지만.......”
“아, 아일린.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
“교회의 간섭이 싫으면, 도망가자. 아이들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서 몰래 살면 되는 거야. 세실리아도 유르덴 가문도 다 필요 없잖아.”
“잠깐만. 내 이야기도 들어줘, 아일린. 아일린?”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할게. 코넬리아는, 그래도 내 곁에 있긴 싫은 거야......?”
젠장.
“......내 말 좀 들어. 난 널 싫어하지 않아. 아니, 똑바로 말할게. 정말 좋아해.”
“뭐? 그럼.”
“하지만, 이거랑 그건 다른 이야기라고 봐. 그러니까, 조금만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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