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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57화 (57/100)

〈 57화 〉 신앙고백

* * *

정신을 차려보면 어딘가의 지하실이었다. 지하실의 의자 위.

굉장히 좋지 않은 배경이네.

아일린에게 손을 붙잡히고, 뒷목을 얻어맞았었지.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하다. 메이스 따위로 후려친 게 아닐까?

모르긴 몰라도, 나. 평범하게 주먹이나 몽둥이 같은 것으로 두들겨선 기절하지도 못할 거다.

“으윽.......”

팔다리가 실로 꽁꽁 묶여있는데, 아무래도 평범한 실이 아닌 모양인지 힘을 주어 끊으려 해도 도저히 끊어지거나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실이라던가 그런 걸지도 모른다.

마력이 실려있었더라면 진즉에 힘으로 끊어버렸을 테니, 아마 순수하게 단단한 실이겠지.

평범한 금속 같은 건 그냥 악력만으로 찢어버리는 내 무식한 힘을 아득하게 상회하는 강도의 금속실.

감촉이 차가운 걸 보면 금속은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실을 끊어보려 힘을 쓰고 있었더니, 덜컹, 하고 문이 열렸다.

“아직 자고 있나? 음?”

“씁.”

“음? 으음? 이봐이봐이봐! 괜히 힘 쓰지 마!”

새까만 수도복을 입은 아저씨가 날 보더니 놀란 눈으로 외쳤다.

머리카락 끝이 눈이라도 앉은 듯 희끗희끗한 게 보이는 외견보다 나이가 많거나 고생을 많이 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너 대체 누구야?”

“아가씨. 초면에 반말하면 인상이 좋지 않아요.”

“......너도 반말하고 있잖아.”

“아니, 아무리 봐도 아저씨가 아가씨보다는 연장자 아니니?”

너무나도 정론이라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생의 나이까지 끌어오고, 저 아저씨가 많이 노안이라는 가정을 하면 비벼볼 수도 있지 않을까나 싶었지만, 거기까지 해서 이기고 싶지도 않고 이겨 봐야 추할 뿐이다.

“그, 아가씨. 지금부터 그쪽으로 갈 건데, 더 힘쓰지 말고 그대로 있으렴.”

아저씨가 아직도 열린 문 바깥에서 선생님 같은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어딘가 금방이라도 탈출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 하는 맹수를 멀리서 보고 있는 듯 걱정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이러면 나 이거, 끊을 수도 있는 거 아냐?

“뭐야. 뭔데. 설명부터 해!”

“설명? 으음. 설명이라. 네 스스로 자신의 몸 상태부터 살짝 봐주었으면 하는데.”

“몸 상태......?”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는다만.

고개를 내려서 묶인 내 모습을 보았다.

두 팔은 뒤로 묶여있어서 볼 수 없었고, 다리는 의자에 앉혀진 데다가 수도복의 스커트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딜 보라는 거야.”

“의자 아래는 보일까 모르겠네. 한 번 봐봐.”

“의자 아래?”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의자 아래를 보았다.

붉은 피웅덩이.

내게서 흘러나온 건가?

한 번 알아채고 나니, 손가락이 끈적끈적하고 맨들맨들한 것으로 뒤덮여있다는 걸 깨달았다.

발목, 종아리, 허벅지. 팔목, 팔, 팔뚝.

묶인 자리자리에서 피가 새고 있다. 무리하게 힘을 준 탓에 금속실에 피부가 베인 것이겠지.

알아채고 나니, 뒤늦게 격통이 내달렸다, 참을 만 하지만, 모르고 있으니 아픈 줄도 몰랐다니 참으로 편리한 몸이다.

“윽.......”

“이거 참 곤란하네. 심문받기 전에 자살하는 사람은 몇몇 있었지만, 셀프 고문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아저씨도 이런 아이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혀.”

“......심문, 이라고.”

“그래그래. 아저씨는 배운 사람이라서 신앙과 교리에 바삭하거든. 잘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은 탓에 스스로 알지 못하게 저지르곤 하는 이단을 깨닫게 해주고, 그런 사람들의 교화, 교정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란다.”

“메흐레니아의 교리를 따르지 않으면 힘껏 고문하고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왜 그렇게 길게도 돌려 말하는 거야?”

“음? 아니야. 그건 편견이란다. 이단이 스스로 이단이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준다면 고문하지 않아. 물론 죽이지도 않아. 인간들은 모두 주님의 자식이잖니?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또 몰라, 인간은 아무리 우리 심문관들도 그렇게 쉽게 고문하고 죽일 순 없어.”

이단심문관 아저씨가 사근사근 그렇게 말한다.

편견이고 고정관념이라고 말해도 좋다. 나는 아무래도 이 사람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아일린은 어디 있어?”

“우선 내 이야기부터 듣지 않겠니? 아저씨는 아가씨가 찾는 아일린 아가씨의 부탁을 받아서 다른 심문관이 아가씨를 맡기 전에 먼저 자청해서 들어온 거니까.”

“아일린이?”

“그렇단다.”

“......들을게.”

아저씨가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한 번 뱉었다.

그리고 그쪽으로 가도 괜찮을까? 하고 물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나를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까 보여주었던 그 걱정스럽다는 눈은 아무래도 정말로 내 상처 탓에 지어 보인 눈인 모양이다.

이 실을 뜯어낼 수는 없다, 이거지.

“맘대로 해. 어차피 묶여있어서 물어뜯길 걱정도 없잖아?”

“여자애에게 물려본 적이 있니? 아저씨는 재작년에 아저씨 딸에게 물린 적이 있었단다. 물론 아가씨처럼 자랄 만큼 자란 숙녀가 아니라, 이제 겨우 10살을 넘겨준 꼬마 아가씨이긴 한데, 잘 자다가 뭔가 착각이라도 했는지 옆에 있던 아저씨의 팔뚝을 아주 힘껏 물어버린 거야.”

뭐.

그래서 어쩌라고.

“그런 아기에게 물렸는데도 엄청 아파. 그러니까 우리 숙녀 아가씨가 아저씨를 물었다간 정말 아플 거야.”

“아파? 죽일 생각으로 물어뜯을 거야.”

“남을 그렇게 쉽게 아프게 해선 안 된단다.”

“그쪽 친구들이 먼저 내 뒷목을 후려쳐서 기절시키고, 자는 동안 이 요상한 실로 묶어서 피가 줄줄 흐르게 했잖아. 그쪽이 먼저 나를 아프게 했어. 몰라?”

“뺨을 맞게 되면,”

“다른 쪽 뺨도 때리도록 내주라고? 세상이 그렇게 편하게만 흘러가진 않는다는 걸 아주 잘 아실 텐데요, 아저씨.”

아저씨가 하하, 하고 웃었다. 좋은 말이네,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서 내 앞에 앉았다.

“아가씨는 혹시 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

네?

“무슨 헛소린지......?”

“깊게 생각할 건 없어. 그냥 아저씨의 질문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말하면 된단다.”

아니, 뭐.

신이 되고 싶다는 상상이야 자주 해봤지.

전지전능 주식회사에서 모건 프리먼의 모습을 한 신의 권능을 빌리는 상상 같은 거.

상상?

뭐어. 공상이나 몽상이라 말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네.

“아니, 그러니까 말했잖아. 무슨 헛소리냐고.”

“그렇지? 헛소리같지? 맞아. 그 말이 맞아. 저 머나먼 천상의 궁전에 열셋 아르카디아 신이 거하시고, 지상에선 사람의 헛된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서 신으로써 만들어져 태어난 무수의 야생신들이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어. 어쨌거나 살아있는 사람이 한 번 죽어 사람의 몸을 버리지 않고서야 신이 될 순 없는 법이야.”

“장황하게 뭘 덧대지 말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해.”

“‘시설’의 연구원들은 아가씨와 아일린 아가씨, 그리고 다른 시설의 아이들까지, 여러분들을 모두 사용해서, 언젠가는 ‘만들어진 신’을 태어나게 할 생각이었어.”

......뭐?

지금 뭐라고? 만들어진 신?

“그게, ‘모든 마법을 깨트리는 칼날’과 무슨 관련이 있는데.”

“창세의 아르카디아 가운데에 해그 리튜아가 계시지. 여신께선 창세 이래 존재한 모든 마력과 구축된 마법의 의신화??化이자 이 세계 유르체피아의 질서를 떠받드시는 기둥이란다.”

“그 이름에 대해선 알아. 잠깐. 마법의 여신과, 모든 마법을 깨트리는 칼날......?”

“소상히 설명하면 말이 길어질 테니, 대충 그런 셈이란다.”

마법의 여신을 처치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새로운 신을 들여놓는 것이 목적인 모양이다.

모르긴 몰라도. 대충 그렇겠지.

“그래서 다시 묻겠는데. 신이 될 생각이 있니?”

“이거, 되고 싶다고 말하면 죽여버릴 생각이잖아.”

“우선은 가두어둘거야. 많이들 착각하는데, 나는 이단심문관이지 판관이 아니야. 너를 반드시 사형대로 보내야만 한다면, 그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정할 일이란다.”

“......사람은 고문받다 보면 죽을 수도 있어.”

“아저씨는 시말서 쓰기 싫어.”

나는 이 아저씨라는 사람을 노려보다가, 쓸데 없는 에너지소모는 그만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할게. 한 번 정도는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 하지만, 내가 신 같은 것이 되어 봐야 내 신도들만 괴로워질 테니까 안 할 거야.”

“인간의 한계성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어떤 변명보다도 안심이야.”

“그럼 풀어줄 거야?”

“그건 힘들겠네.”

“아니, 그럼 여태까지의 이야기는 도대체 왜 한 거야?! 날 그만 풀어줘!! 안심이라면서!!”

“아저씨가 안심해봐야 주교님과 대주교님과 추기경님과 교황님은 안심하지 않아. 모든 일은 절차에 따라서 행해져야 하지 않겠니?”

아저씨는 씩 웃더니, 자기가 끌고 왔던 의자를 다시 접어서 방구석에 세워두었다.

쓸데없이 행동이 예의바른 게 짜증났다.

그리고 다음에 또 보자­라며 말을 님기고는 방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 아저씨와 교대하듯이 아일린이 들어왔다.

“아일린.”

“펠릭스가 네게 험하게 하진 않았지? 피 냄새가 나는 거 같은데.”

“이거 당장 풀어.”

“조금만 기다려줘. 다 널 위한 거라구.”

“정말 날 위한다면 이거 풀어주는 게 좋을 걸.”

내가 생각해도 내 목소리가 굉장히 날이 서 있었지만, 아일린의 표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내 뒤로 돌아와, 지팡이를 양손으로 잡고 자기 가슴께까지 올려 발도 자세를 취했다.

순식간에 두 팔과 두 다리가 자유롭게 되었다.

나는 뛰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동시에 몸을 낮추어 숙이며, 의자 다리를 붙잡고서 마치 몽둥이처럼 아일린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의자는 아일린에게 닿기도 전에 마치 레고 조각처럼 흩날렸다.

조각 하나하나가 아일린에게 닿는 일도 없었다.

역시 무기 없이는 못 당하겠어.

“되새기는 색은 잿빛. 빨간 꽃. 흐드러지게 피어라.”

팔과 다리에서 흘러내린 피에 마력을 넣었다.

예전에도 아일린과 전투 중에 사용했었지.

내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피는 마법의 촉매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흘러내렸던 피가 붉음을 더하며, 불길과 함께 폭발한다.

“한 번 당한 수에 두 번 당하지는 않아.”

아일린이 칼을 뽑아들고, 발도자세로부터 칼집을 뒤로 휙 집어던졌다.

그리고 칼을 양손으로 붙잡고 중단자세를 취하더니, 재빠르게 한 번 나풀, 하고 검무를 췄다.

나의 피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검에 휘감긴다.

폭발도, 화염도, 모조리 아일린의 검에 빨려들어가듯 휘감긴다.

어차피 마법이 안 통하는 건 안다.

다만 폭발력으로 바닥이나 천장이나, 하다못해 벽이라도 부술 생각이었는데.

죄다 흘려졌다.

“사람, 맞아?”

“실례지만 아직 사람이야. 내가 보기엔 피가 폭발하는 너야말로 이상해.”

보진 못하지만.

아일린이 꾸욱 감은 눈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화기가 계속해서 점점 약해져가는 불길이 휘감긴 검을 자신의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서 한 번 스윽 훑어내렸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불길이 사라졌다.

“......더 놀거야?”

“윽!”

저런 거랑 싸워서 이길 생각은 안 든다만.

나는 주먹을 꾸욱 말아쥐고 아일린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적어도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아.

그럼 그 방심을 어떻게든 이용해서­.

“칼집, 버리지 말걸 그랬네. 괜히 화려하게 하려고 해선.”

말을 마친 아일린이 빙글, 하고 돌았다.

뭐야. 역시 무진장 빠르잖아. 하고 생각했을 무렵엔, 채찍처럼 휘둘러진 아일린의 발뒤꿈치가 이미 내 관자놀이를 깔끔하게 후벼파고 있었다.

정말로 후벼 파여진 건 아닐 테지만, 아프다. 아프다. 뼛속 너머 뇌수 안쪽까지 아프다.

뇌에는 통점이 없다고? 알 바야.

“으극!!”

“어머.”

하지만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아일린의 다리를 붙잡았다.

“꽤 힘이 좋네.”

“으, 으윽.”

“그래서?”

아일린이 발뒤꿈치에, 다리에 힘을 줬다.

내가 우위인 자세인데도, 그냥 힘으로 밀려서 그대로 땅에 머리부터 쳐박혔다.

머리가 짓밟힌 채로, 나는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강해진 거 아니냐, 너.”

“귀엽지?”

“뭐래.......”

아일린이 웃었다.

짜증나는데, 비겁하게도 귀엽긴 하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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