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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56화 (56/100)

〈 56화 〉 납치

* * *

노크소리.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연구소장 시콘느는 작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안경을 벗어 내리고 목을 가다듬어,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이 아직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우아함을 잊지 않은 목소리로 조용히 ‘들어오세요’라고 말하여 예의 바른 침입자에게 방문을 허가했다.

달칵. 조용히 문이 열렸다.

메흐레니아 교회의 수도복을 입은 소녀.

아직 목소리에 앳된 티가 남아있었던 바로 그 소녀였다.

“어서 오세요.”

시콘느가 조용히 인사했다.

하지만 소녀는 시콘느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

새까만 베일을 쓰고 있던 탓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신인가.

시콘느는 아무 말 없는 수도복 차림 소녀의 모습에 작게 전율하면서도 가슴 속의 깊은 의문을 해소해보려 입을 열었다.

그녀는 썩어도 연구자였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고통받는 것을 혐오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당장 피어오른 영문 모를 의문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욱 싫은 여자였다.

“그나저나 편지는 분명 윌리엄 왕자의 편지가 맞았었습니다만.”

“.......”

“당신은 누구죠?”

“.......”

“윌리엄 왕자님의 편지를 어디서 가로챈 건가요?”

소녀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얼굴을 가리던 베일을 걷어올려 얼굴을 보였다.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오밀조밀하며, 그러면서도 사람의 생기를 잃지 않은 얼굴.

또렷한 코. 뚜렷한 이목구비. 앵두처럼 붉은 입술과 옅지만 단정한 홍조가 떠오른 볼.

처마 위로 막 내려앉아 쌓인 눈처럼 그저 하얀, 짙고 아름다운 눈썹.

그리고, 색소를 잃고 피의 붉은 색을 그대로 투영해내는 투명한 눈동자.

비록 눈동자 속에 강인한 의지가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뜻 보아서는 방금 전까지 살육을 거듭하며 여기까지 내려온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어져, 소녀는 베일을 완전히 벗어 내린다.

검은 천 아래에 감추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한 번 망가져서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하얀 머리카락.

다만 한 번 망가진 이래 여태 여러모로 관리를 잘한 건지, 무척이나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지만.

눈동자도 머리카락도, 결과적으로는 모든 모습이 시콘느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망가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실패작......?”

시콘느가 중얼거린다.

윌리엄 왕자는 설령 실패작이라고 한들 꽤 쓸만하다 싶으면 제멋대로 성공작이라고 말하면서 데려가곤 했지만, 시콘느는 여태 성공작을 단 한 번밖에 만들어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만들어낸 성공작은, 잃어버린 성공작은, 결코 망가진 적이 없었다.

눈이 망가졌던 건 실험 탓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실패작이.

그 성공작의 흉내라도 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윌리엄의 편지와, 실패작.

“당신은 왜 도망가지 않았지?”

시콘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찌푸린다.

무슨 소리야. 도망칠 곳이 도대체 어디 있다고.

바깥에는 네가 부른 메흐레니아 교단의 병사들이 가득하잖아?

이미 탈출을 시도했던 연구원들은 모두 사로잡혔고.

설마, 연관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설마.

“그래, 하하. 아하하. 아하하하하! 이 시설의 연구소장으로 배치된 것부터가 윌리엄 그 자식이 나를 처분하려고 그랬던 것이었어!!”

“뭘 착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묻잖아. 대답이나 해.”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시콘느가 착란 비슷한 것을 일으켰다.

광소하면서 스스로의 운명을 불쌍히 여겼다.

“빌어먹을. 실컷 이용해먹고, 결국 이렇게 죽일 생각이었구나......!!”

“이봐.”

“하필이면 나는,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실패작의 손에 죽는구나!!”

소녀의 검이 매섭게 휘둘러진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시콘느는 자기 귀중한 머리통이 잘려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는가. 시시각각 희미해져가는 시야는 땅바닥에서 실패작 소녀의 매서운 눈을 올려다보았다.

귀여웠던 인상을 단번에 바꾸어버릴 정도로, 무척이나 화내고 있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화내는 건데.

이해할 수 없어.

/

“쯧.”

혀를 찼다.

이렇게 쉽게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도망가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를 물어본 것도, 어쩌면 뭔가 고해를 한다던가, 잘못을 빈다던가,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연구소장이 ‘혐오해 마지않는 실패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검을 휘두르고 말았다.

빌어먹을.

“남의 인생을 멋대로 바꿔놓은 건 너희들이잖아.......”

연구소장은 눈을 뜬 채 죽었다.

이 빌어먹을 년은 몸에서 떨어진 목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나를 실험체 보는 눈으로 보았다.

사람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복수는 복수일 텐데도, 전혀 개운하지가 않다.

그나저나 연구소장.

갑자기 광란하더니 ‘난 윌리엄에게 처분당했다’ 따위의 소리를 하던데.

물론 윌리엄이 정말로 내 손을 사용해서 연구소장을 처분하려 한 것 같진 않다.

그래도 내 손을 쓰려 한 것이 아닐 뿐이지 자칫 내가 아일린을 막는 걸 실패하면 아일린에게 이 연구소장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이 연구소의 정보를 풀었다는 걸 생각하면, 처분까진 아니라도 잃어도 아쉬울 것 없는 버림패 신세나 마찬가지였던 건 사실이지 않을까.

“모르겠네.”

그럼 왜 처분 같은 소리를 한거지.

대체 왜 도망치지 않고 소장실에 남아있던 거고.

분명 연구원들과 아이들이 사라진 걸 보면 지하 어디에서 차량이든 마법진이든 뭐든 이용해서 어디론가 도망친 것 같긴 한데.

일단 샅샅이 뒤져보기나 할까.

그럼­.

“성 드라페라스 형제 기사단이다! 문 열어!”

소장의 머리 없는 시체와 피투성이 테이블을 뒤로 하고 등을 돌린 순간, 문이 박살났다.

문 열어! 라고 말한 것 같은데, 누가 열어줄 시간도 없이 단 1초만에 문이 안쪽으로 박살나 쓰러졌다.

뭐하자는 거야.

베일 쓸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둘이 동시에 메이스를 들고 안쪽으로 뛰어들어왔다.

“시콘느 소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저항하지 않는다면 향후 심문 과정에서 참작이 있을­응?”

“으응?”

성기사 둘이 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와 연구소장­시콘느라는 이름인 모양이다­의 머리 없는 시체를 보며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내게 메이스의 끝을 겨누고서 외쳤다.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투항하면 살려는 주마!”

곤란하네. 기사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 어려운데.

다행히 평기사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 좁은 소장실에 평기사가 둘씩 투입되었다는 건 이 시설 전체에 메흐레니아 교단의 병사들이 싹 깔렸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설마 내가 지하로 내려온 그 사이에 아일린이 온 건가?

뭔가 누가 보면 짜고 치기라도 한 것처럼 찰떡같을 타이밍이네.

......설마 연구소장이 도망치지 못한 건 이 친구들이 포위해서 그런 건가?

“잠깐만. 수도복이잖아? 우리 교단 사람 아냐?”

“음? 그런가?”

“그 있잖아. 그림자 수녀회라고. 그쪽 소속 아냐?”

“듣고 보니까 시콘느 년을 담가버린 것도 수녀님인 것 같네.”

싸울까 싶어서 칼자루에 손을 올렸더니, 기사 둘이 마치 병사처럼 멍청하게 굴었다.

기사 정도면 상당히 배운 사람들일텐데. 그것도 그냥 기사도 아니고 성기사잖아.

경전을 외우느라 뇌의 용량이 부족해졌나?

그런 사람들이 보통 담근다는 말을 써도 좋은 걸까?

그래도 기회는 기회지.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얌전히 벗었던 베일을 다시 썼다.

그리고 그 성기사들에게 고개를 작게 한 번 숙이고, 당당하게 소장실 바깥으로 나왔다.

......살짝 긴장되어서,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안 쫓는다.

교단 너무 쉬운 거 아냐?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는 메흐레니아 교단의 병사들이 가득했다.

구출한 아이들을 인도하고 있다던가, 폭력내성이 적어 보이는 연구원들을 봉으로 두들겨 패서 한 자리에 얌전하게 모으고 있다던가.

여기저기 지나다니는 병사들이 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기도 했다.

결국 시설 건물 바깥까지 나올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

바깥에 남아있던 막 끌려온 아이들도 메흐레니아 교단의 인도 아래에 이송되고 있었다.

“......어쩌면 이거 전부 평범한 임무 실패로 치고 넘어갈 수 있는 거 아냐?”

물론 경비병들이 여기저기 전보를 때렸을 테니까 쉽게 되진 않을 것 같아도, 말이지.

이렇게 잘 풀리는 날은 뭔가 풀려도 다 잘 풀린단 말이야.

내가 너무 낙관적인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왜 그렇게 싱긋싱긋 웃고 있어?”

나는 베일을 쓰고 있다. 거기에 더해, 목소리가 들려온 것도 등 뒤였다.

적의 하나 없는 목소리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재빨리 환도를 뽑아내며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내 배를 향해 지팡이가 창처럼 내질러지고 있었다.

다행히 이미 검을 뽑아낸 뒤라서, 다행히 막긴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아일린이었다.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윽!?”

“어머. 이젠 반응이 조금 빨라졌는걸.”

눈을 감은 아일린이 생긋 미소지으며 지팡이에서 칼날을 뽑아내었다.

그냥 뽑아낸 게 아니다.

지팡이 끝은 아직 내질러진 채. 그러니까 내 환도에게 막혀서 아직 살짝 닿아있는 채다.

지팡이 끝이 아직 내 환도에 닿아있는 그 꼴에서, 그 말도 안 되는 찰나의 꼴에서, 재빠르게 검만 발도했다.

그리고 내가 아직 남겨진 칼집 지팡이를 쳐내지 못한 상황에서, 아일린의 일격이 다가온다.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움직이지 말란 말야......!!”

어렵사리 다가오는 일격을 튕겨내었다.

그리고 다음 일격을 방어하기 위해서 자세를 되돌렸지만, 다음 일격이 다가오진 않았다.

주변의 메흐레니아 병사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완전히 이목이 집중되었다.

“으음, 코넬리아. 잠시 나를 따라와야 할 것 같은데.”

“곤란해, 아일린.”

“아니면 힘으로 구속할 거야. 이 사람들 전부에 나까지 더하면 조금 힘들지 않겠어?”

“......으, 윽.”

아일린은 이미 상황이 다 끝났다는 듯 땅에 떨어진 칼집을 다시 주워 칼과 결합해 지팡이처럼 다시 짚었다.

나는 주변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한 번 뱉고, 역시 검을 칼집에 수납했다.

“알았어. 따라가 줄게.”

“응. 코넬리아.”

아일린이 다가와서 내 두 손을 붙잡아 자기 두 손 안에 그러모았다.

무척 기쁘다는 표정.

여자아이들이 뭘 부탁하기 전에 자주 이러긴 하더­

“그래도 항상 뒤는 조심하자?”

그런데, 내 뒤통수에서.

왜.

퍽, 하고. 둔탁한.

소리.

가.

나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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