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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55화 (55/100)

〈 55화 〉 칼부림

* * *

토마스의 목을 떨어트리고, 검을 휘둘러 찐득하게 묻어난 피를 털어내었다.

피를 머금어서 더욱 붉어진 유소??가 무겁게 흔들렸다.

분명 기분 나쁜 무게감인데,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저기에 놈이 있다!”

빠르네.

어느새 찾아온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다가가지 마! 화망을 형성하라!”

최후미에는 검은 갑옷의 경비병.

아니, 병사가 외쳤다.

병사들은 그의 외침을 듣더니, 팔에서 커다란 사각 방패를 떼어내 땅에 내려 찍더니, 그 위에 기관총을 거치해 신나게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도 이젠 옛날과는 다르다.

“되새기는 색은 잿빛. 앞선 발걸음을 잘라내리.”

내 몸을 가리는 잿빛의 마나 실드를 평소보다 더욱 두껍게 펼쳤다.

충격. 쏜살보다 더욱 빠르게 날아든 탄환들이 무자비하게 마나 실드를 두들긴다.

그래도 늦지 않았어.

마나 실드가 걸레짝이 되어가는 사이 화망 속을 향해 정면으로 내달렸다,

총구는 4개였지만 나를 붙잡겠다고 화망을 형성하느라 탄의 밀집도가 그렇게 두껍진 않았다.

그래도 머리를 내밀다니.

“흥, 그런 종잇장으로 뭘 막겠다는 거야. 전원 화력집중!”

“아, 안됩니다, 대장!”

“화력집중!!”

검은 병사가 화력집중을 명령하고 병사들이 복창하며 총구를 동시에 정면으로 달려오는 내게 모았다.

단 한 명, 얼굴에 흉터가 난 베레모의 병사만이 항명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다른 병사나 검은 병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저 녀석은 조금 베테랑인 모양이네.

나는 총구가 모아지자 마자 옆으로 대각을 그렸다.

나도 내 마나 실드가 종잇장인 거 잘 알아.

테레제나 세실리아면 모르겠지만, 나는 저 앞에서 단 1초도 버틸 수 없다.

그러니 왜 정면 승부를 하겠어?

“으윽!?”

총구들이 바보처럼 나의 꽁무니를 뒤쫓는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가동범위 끝. 방패에 걸 듯이 올린 기관총을 더는 옆으로 돌릴 수 없다.

기관총을 방패에서 떼어내고, 몸을 돌린다. 늦는다.

그렇게 병사들이 그렇게 얼빠져 있는 사이, 거리는 충분히 좁혀졌다.

처음 검은 병사에게 항명했던 병사만이 재빠르게 방패와 기관총에서 손을 떼어 자기 허리춤의 리볼버를 꺼내 내게 겨누었다.

“비켜, 잔챙이들.”

검을 크게 휘둘렀다.

방패째로 병사 둘의 허리를 반으로 갈랐다.

투명하고 특이한 재질이었던 만큼 방호력이 꽤 괜찮았던 건지, 둘밖에 베지 못했다.

픽, 하고 코앞에서 소음기를 지나쳐 빠져나온 리볼버 탄환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몸을 낮추며 빙글 돌렸다. 무희처럼.

탄환이 머리카락 몇 가닥을 찢고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다시 일격. 흉터가 아로새겨진 베테랑 병사의 머리가 분한 표정으로 하늘을 날았다.

나머지 하나도 동료 셋이 순식간에 썰려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냥 베어갈랐다.

“이, 녀석이!!”

검은 병사가 뒤로 크게 물러서며 산탄총을 꺼내들었다.

그래서 그가 뒤로 물러선 만큼 그냥 따라잡아서, 정수리에서 고간까지 일격에 갈랐다.

검은 병사의 좌우가 각각 무엇을 당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르륵 흘러내린다.

“설마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사람이 등에서 칼을 찌를 줄이야.”

겁에 질린 아이들. 식은땀을 흘리는 병사들.

그리고 그들 평범한 일반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공기를 풍기는 가벼운 옷차림의 청년이 시설 안쪽에서 걸어나왔다.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보이는 흑요석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의 표면 전체가 연마되지 않아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걸레짝이 되겠지.

“뱃속에서 이빨을 보이지 않은 이유가 뭐지?”

“알 바야?”

“물론 내가 알 바는 아니군.”

청년이 눈을 감으며 두 손으로 창을 쥐었다.

그리고 푸른빛 청량한 마력이 바람의 형태로서 그의 온몸에서 잔뜩 피어올랐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떴다.

휘몰아치던 마력이 창날의 끝에 작은 진공의 구멍이라도 생긴 듯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드릴처럼 매서운 소리를 내며 회전하는 새 창날이 위에 덧씌워진 셈이다.

전투 태세를 갖춘 청년이 날카로운 눈으로 내게 말한다.

“오케아노스 기사단 전직 배너렛 나이트, 야코부스 린덴, 그리고 흑창?? 리시디케.”

“기사.”

“그래. 네가 신나게 썰어죽인 잔챙이들과는 다를 거다.”

의외네. 나도 이름을 밝혀야 하는 걸까?

아쉽지만 내겐 당당히 밝힐 만한 이름이 없다.

허리춤의 단검에는 아레이유라는 예쁜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지금 저 리시디케라는 이름의 창과 맞대고 있는 건 아레이유가 아니라 이름 없는 환도니까.

하나 있긴 있네. 1725번. 이 몸에 남은 최초의 기억.

“네게 쏟아지는 색은 군청. 간다, 리시디케. 네 앞의 모든 것을 모조리 깔아뭉개라.”

“윽......?”

야코부스가 자신의 애창??에게 말하며, 창끝을 땅에 내질렀다.

그 순간, 창끝을 따라서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압이 떨어져내려, 대지를 거칠게 짓눌렀다.

솜털이 가득한 잎새를 들어 올리고 있던 이름 모를 잡초들이 모조리 땅에 쳐박혀 초록 냄새를 사방에 흩뿌리고, 베여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죽은 병사들의 신체가 험악한 소리를 내면서 짜부라졌다.

그리고 창을 살짝 들어 올려서 그 끝을 내 가슴팍에 겨눈 야코부스가 사지에 바람을 휘감고서 단 한 걸음 만에 내 앞에 도달해, 창을 길게 내질렀다.

“하아아아앗!!”

“미안하지만, 글로리아의 체벌 쪽이 더 무거웠어.”

“어엇, 움직, 인다고? 이 안에서, 멀쩡하게?!”

제자리에서 그대로 검을 휘둘러, 내질러지는 창을 튕겨내었다.

방어에 성공했다고 조급하게 공세로 이어가진 않는다. 썩어도 기사였었다고, 휘둘렀던 흑요석 창이 튕겨 나가자마자 야코부스는 창을 다시 자신의 간격 안쪽으로 되돌렸다.

창대에서 바람이 피어올랐던 것처럼도 보였다. 마치 제트 분사라도 된다는 듯이.

물론 창끝의 드릴 같던 바람 창날은 사라졌지만.

“무슨 짓을 한 거냐!”

반 보 짧게 물러나서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은 야코부스가 마치 기관총처럼 창을 내지르고, 회수하고, 다시 내질렀다.

조금씩 물러서며 쳐내고, 쳐내고, 다시 쳐내지만, 야코부스의 공격은 매서웠다.

공세로 전환할 각이 보이질 않네. 창대에 생기는 바람 탓에 야코부스가 창을 회수하는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다.

마력을 하나하나 제어하는 것도 실력은 실력이지. 처음 깔아두기로 발동한 광역 중압마법까지 생각하면 이 친구, 듀오토 정도의 실력자가 아닐까.

적어도 미오르티아보다는 강하다.

“네게 쏟아지는 색은 군청!”

한 순간 야코부스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속사포같던 공격이 잠시 멈춘다. 야코부스는 한 손으로 든 창을 길게 빼었다.

이번에는 그의 창 리시디케를 폭풍의 눈으로 삼아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리시디케, 껍질을 벗고 휘몰아쳐라!”

칼바람만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폭풍에 날카로운 리시디케의 흑요석 조각이 섞였다.

폭풍은 아무래도 좋지만, 저런 건 몸 멀쩡히 그냥 받아칠 수 없지.

나는 뒤로 크게 뛰어 기도문을 읊었다.

“되새기는 색은 잿빛.”

“늦었다, 애송이!”

야코부스가 창을 내게 내던졌다.

폭풍은 어마어마하게 비대해져서, 땅을 모조리 갈아엎으며 날아들었다.

뭐, 기도문은 보조일 뿐이고, 딱히 기도를 끝까지 할 필요는 없지.

곧장 마법을 발동했다.

“고작 그딴 마나 실드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리시디케가 너를 꿰뚫어서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확실히.

검은 창끝이 내 마나 실드를 가볍게 관통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검을 휘둘러서, 칼끝으로 빼꼼 튀어나온 창끝을 툭 건드리듯 쳤다.

폭풍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폭풍의 바람결을 따라 휘몰아치던 흑요석 조각들도 구심점을 잃고 멋대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 마나 실드도 내 간섭 탓에 갈기갈기 찢기고 깨져 나가지만, 흑요석 조각이 사방으로 튀는 것까지는 막았다.

“뭣. 도대체. 아니, 리시디케!”

야코부스가 리시디케를 불렀다.

나는 손을 뻗어서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가려는 리시디케의 창날을 붙잡았다.

상처가 나지 않도록 세게 붙잡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야코부스의 모든 마력 간섭이 거절되고, 리시디케는 내 손에 남았다.

“어, 어째서!?”

“너도 아일린을 막으러 온 거 아니었어? 그러면 그 아이의 성질 정도는 알아 두었어야지!”

“설마, 네가 아일린이냐......!!”

뭔가 착각한 모양인가, 아니면 내가 정보를 이상하게 준 걸까.

하여간에 야코부스는 이를 갈며 마력을 모았다. 뭔가 하려는 셈인지.

어차피 통하지는 않겠지만.

“돌려줄게, 이거.”

검은 창 리시디케를 똑바로 잡아 야코부스에게 내던졌다.

뭔가 하려고 마력을 모으고 있었던 야코부스는 자신에게 정면으로 날아오는 창끝을 보더니, 모으던 마력을 풀어헤치고, 동시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리시디케의 창대에 바람을 더했다.

야코부스에게 날아들던 리시디케는 허공에서 빙글 돌아, 내게 창끝을 향했다, 만.

그래, 내가 없겠지. 당황스럽겠지.

“이, 런.”

그가 리시디케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그의 배후로 돌았다.

그리고 베었다. 대각으로 크게.

주르륵, 하고 야코부스의 좌측 상반신이 주르르 흘러 내린다.

“야, 야코부스 님이 당했다!”

“뭘 보고만 있어! 총을 쏴!!”

야코부스의 중압 마법이 풀리고, 구경만 하고 있던 병사들이 사방에서 총탄을 난사해온다.

겁에 질리고, 죽음 앞으로 내몰리는 불쌍한 병사들.

전부 베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벽 근처에 숨어 이쪽을 보고 있던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려 하거나, 그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거나 했다.

너무 피투성이이긴 하네.

“......저기 차 안에 숨어있어. 금방 돌아올게.”

나는 병사용 두돈반 트럭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깥에는 더 이상 병사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나머지도 연구실 쪽으로 향한 것 같다.

아마 바깥의 아이들은 안전할 거다.

그렇게 믿어야지, 뭐.

나는 손이 두 개 뿐인, 그다지 선량하지 못한 사람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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