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인연의 끝
* * *
되돌아오는 도중에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나눌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나는 테레제와 아일린이 마주하게 되면 어떻게 테레제를, 혹은 어떻게 아일린을 변호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무슨 말을 나누게 될지. 아일린이 순순히 따라줄 것인지. 아니면 테레제가 순순히 따라주기나 할 것인지.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아일린이 갑작스레 물음을 던졌다.
나는 아일린의 눈이 멀었다는 것도 잊고 무심코 대답했다.
“그렇게 보였나.”
“안 보여. 알잖아? 그냥 분위기로 느낀 거야.”
“......그러게. 미안해. 우중충한 표정이라.”
“표정 펴. 네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 나를 구해냈을 때처럼 용감하게 있어줘.”
“난 그다지 용감하지 않아.”
그다지 자랑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시설에서 탈출한 것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했다.
탈출하지 않으면 나나 아일린이나, 언젠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꽤 필사적이었지.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떻게든 테레제에게서 벗어나 아일린을 찾아갔을 거다.
141번을 시설에서 구해낸 것만으로 만족하고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내 삶을 사는 것에 바빠서, 눈도 보이지 않는 아이를 그냥 버려두고 있었다.
그냥.
나는 내가 살고 싶어서 도망친 것뿐이다.
내가 널 구해냈어라고 자랑스레 말하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이다.
물론 나는 결코 이기적인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염치를 잊지 않았을 뿐.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다행이네. 나는 조금 더 친근한 네가 좋거든.”
“친근하다니.......”
“사람다워서 좋다고 생각해.”
정말로 좋은 걸지는.
뭐, 모르겠다만.
“나라고 뭐 올곧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아?”
“응?”
“......아냐, 됐어. 반응을 보니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아졌어.”
“싱겁게 뭐야.”
“네 앞에서는 귀엽고 순진한 아이로 남아있고 싶으니까?”
“뭐야, 그게.”
아일린의 말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틈도 없이, 정면에서 와장창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교실동. 4층.
유리창과 벽면 일부가 박살나고, 오웨인이 건물 바깥으로 자유낙하한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내가 당황해있는 사이, 아일린은 망설임 없이 뛰었다.
두 걸음 만에 교실동까지 거리를 좁히고, 크게 도약해 무너져 떨어지는 벽의 잔해를 밟더니 단숨에 오웨인이 떨어진 무너진 벽면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걸 사람의 몸놀림이라고 봐줘야 할까. 일단 나는 그다지 자신 없다.
그나저나 당연하다지만, 아일린. 오웨인에겐 관심이 일절 없구나.
“괜찮으신가요? 누가 습격이라도 했나요?”
“......빌어먹을. 또 너입니까.”
“입이 살아있는 걸 보면 멀쩡한가보네요.”
4층에서 추락한 것 치고는 멀쩡한 모양이었다.
피가 흐르고 있긴 하지만 추락한 탓에 생긴 상처보다는 뭔가에 맞았다는 느낌이고.
정확히는, 상처의 형태가 무방비로 일부러 맞아줬다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래. 나 멀쩡합니다요. 그러니까 어서 올라가서 우리 애송이 왕자님 잘 좀 부탁, 합.”
오웨인은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기절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만약 적의 기습이었다면 걱정할 것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조금 느긋하게 복도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4층에 도착하기도 전에, 칼부림 소리가 벌써부터 요란했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어......?”
“벤 느낌은 있었는데. 기묘하네요.”
“크, 윽.......”
“냄새는 짐승 냄새인데, 기계?”
아일린과 레라가 합을 겨루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왜 레라가 여기에 있는 걸까하고 생각할 틈따위는 없었다. 나는 상황의 긴박함을 뒤늦게 깨닫고 검을 뽑아 레라에게 합세해 아일린의 검을 막았다.
그 짧은 사이, 레라에게는 상처가 몇이나 새겨져 있었다.
내부가 기계인 탓에 피가 나진 않았지만, 그 탓에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다.
“아일린, 멈춰.”
“뭐야. 아는 사이?”
“아까 말했던 후배야.”
“......그래?”
레라는 묵묵부답이었다.
테레제의 제약 탓에 대화를 나눌 수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그냥 말이 조금 적은 편이다.
대신 장식 하나 없이 길게 뻗은 쿼터스태프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자신의 턱 밑에 대더니 회복 마법 비슷한 걸 사용했다.
수복마법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겠지.
“미안. 습격자라고 생각했어.”
아일린이 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사과했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일단 한 번 벤 다음 대화를 시작하던가 또 한 번 더 베던가 하자’식의 과격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레라에겐 그다지 큰 상처를 내진 않은 것 같지만, 레라의 내부가 기계라서 칼이 잘 들어가지 않은 것도 감안해야하지 않을까.
하여간에 위험한 아이다.
“선배님. 어디에 가셨던 건가요?”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선배님이 좀처럼 돌아오시질 않아서, 주인님과 함께 선배님을 찾으러 왔습니다만.”
“잠깐. 그럼 테레제는?”
“교실 안에.”
왜 테레제를 혼자 두는 거야.
나는 다급히 닫힌 교실 문을 힘껏 열었다.
결계가 쳐져 있던 것 같았는데, 내 손에 닿자 그냥 파괴되었다.
“아가씨!”
“......어머. 코넬리아잖아?”
“끄, 끄윽.......”
에드윈을 몰아넣은 테레제가 보였다.
옅은 잿빛 마력에 휘감긴 금발의 머리카락 한 올이 에드윈의 어깨를 관통하고, 그 바로 뒤의 칠판에 박혀 있었다.
단지 한 줄기 머리카락일 뿐인데, 거기서 퍼져나온 잿빛 마력이 에드윈을 칠판에 고정해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마치 전족판에 시침핀으로 꽂아둔 곤충 박제 같은 꼴이었다.
책상이나 의자는 제 자리를 잃고 사방에 뒹굴고 있어서 난장판이었고, 마력이 휘몰아쳐 생긴 자국도 벽에 잔뜩 남아있었다.
“흐윽, 히끅. 히끅.......”
그리고 한 책상. 책상 위에.
옷이 반쯤 벗겨진 세실리아가 누워서 두 팔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로 흐느끼고 있었다.
저질렀구나, 에드윈.
에드윈을 동정하는 듯한 테레제의 눈이 이해가 갔다.
“마침 잘 왔어, 코넬리아. 저기 세실리아가 있거든? 조금 도와줘.”
“테레제. 네가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입 다물어. 너야말로 지금 무슨 짓을 하려 했던 건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네.”
“끄, 끄으으윽!?”
“엄살 좀 그만 부려. 고작 머리카락 한 올을 찔러넣었을 뿐이잖아?”
스커트 자락이 허벅지 위까지 말려 올라가 속옷이 다 보이고 있었다.
속옷이 보인다는 건 미수로 끝났다는 소리이니 그나마 다행이겠지. 다행인가?
저항하다 맞았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상처를 치유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착잡한 얼굴로 세실리아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위로를 해야 할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참에 아일린이 세실리아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세실리아. 내가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흑, 흐윽.......”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아일린은 세실리아를 일으켜 부축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는 말을 남기고서 천천히 교실에서 나서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세실리아, 세실리아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났다.
아일린과 세실리아는 잠시 발을 멈추었다.
“세실리아. 나는 네 연인이잖아? 사랑하는 사이잖아?! 그렇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테레제가 한숨을 내뱉은 그 순간, 레라가 교실로 들어오려다가 문을 막은 아일린과 세실리아 탓에 발을 멈추었다.
레라가 살짝 옆으로 물러나 그녀들에게 작게 목례하자, 아일린과 세실리아는 에드윈의 말을 들으려 발을 멈춘 것이 아니라. 마치 레라의 인사를 받기 위해 멈춘 것처럼 굉장히 자연스레 교실에서 빠져나갔다.
뒤이어 들어온 레라는 조용히 교실의 문을 닫고, 내가 부순 자물쇠를 수복마법으로 고쳐 다시 잠갔다.
“세실리아. 어째서. 어째서 날 버리는 거야? 나는, 나는 널 위해서.”
“거기까지만 말하시지.”
에드윈이 분노하며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테레제가 진저리를 내며 에드윈의 어깨에 박힌 머리카락에 마력을 더했다.
에드윈도 왕족이고 꽤 마법에 소질이 있는 편이었지만, 머리카락을 통한 테레제의 마력간섭에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모은 마력이 흩어버리고 말았다.
“끄으으으윽. 오웨인은. 오웨인은 뭘 하는 거야?!”
“정말로 어릴 적의 총명함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에드윈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테레제가 한숨을 쉬더니, 에드윈에게 말했다.
“후보라서 아직 성녀가 아니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교회의 아이를 덮치려 하다니.”
“닥쳐, 테레제! 전부 네 탓이다! 네 탓이란 말이다! 하필 지금 네가 오지만 않았어도.... 네가 나와의 약혼을 파기하지만 않았어도...!”
“계속 말해봐. 들어줄게. 요즘 들어서는 꽤 아량이 넓어져서 헛소리도 기쁘게 들을 수 있어.”
“나는, 나는 이클리시아의 적법한 세자란 말이다. 나는.......”
“어머. 이젠 아니지. 아니게 될 거야. 메흐레니아 교단이 널 파문할 테니까.”
“파문? 파문, 이라고? 무슨 소리냐. 나는 세실리아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고. 에드윈이 버럭 소리질렀다.
테레제가 한숨을 쉬더니 다시 머리카락에 마력을 더한다. 짧은 비명소리.
“선배님. 아가씨는 싸우실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도 우리 아가씨가 타인을 의도적으로 다치게 하는 모습을 오늘 처음 봤어.”
“흐음.”
“아마 왕자가 상대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조금은 낯이 익은 상대니까.”
레라가 그런 것 치고는 익숙한 것 같다면서 고개를 갸웃하지만, 정말로 처음 본다.
세실리아를 폭파한 건 에드윈을 위해서였고, 나와 레라에게는 상처 공유의 제약이 걸려있으니 우리에겐 상처를 입히기도 하겠지만, 뭐.
그건 의도적으로 상처를 입힌 건 아니지....않나?
모르겠네.
“나와 헤어져 입지가 좁아지고, 세실리아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려 하지 않고. 그런 답답한 상황에서 네 동생이 네 자리를 노리는 탓에 마음이 다급해진 건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자살을 하려 들면 안 되지.”
“이, 이 악녀가. 네가 망쳤어, 네가 모든 걸 망쳤다고!”
“그래, 뭐. 맞아. 내가 널 망쳤어. 그렇다고 치자.”
“빌어, 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나는 왜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건데.......”
에드윈이 울분을 터트렸다.
에드윈이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자, 테레제는 이를 빠득 갈더니 힘껏 따귀를 때렸다.
누굴 때려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때리자마자 자기 손이 아파 다른 손으로 때린 손을 감싸 쥔 귀여운 모습은 못 본 걸로 해주자.
“테, 레제?”
“내가 주는 마지막 충고야. 정신 차려.”
“테레제, 나는. 나는.”
테레제는 에드윈에게서 머리카락을 뽑아내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무너져내린 에드윈이 주먹으로 땅을 몇 번 내려친다.
나와 레라는 일을 마친 테레제에게 다가가 고개를 작게 숙였다.
“......돌아가자. 나까지도 저런 것과 같은 격이 된 것 같아서 언짢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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