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후배
* * *
윌리엄과 엘자를 떠나 보낸 다음날, 테레제와 함께 노른데아셀에 되돌아왔다.
병실 신세를 그렇게 오래 진 건 아니었지만, 정말 오래간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매일매일 놀기만 하다가 오래간만에 일하러 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우선 꽤 오래 쓰지 않아 먼지가 살짝 쌓인 이불을 털고, 바닥을 한 번 쓴 뒤에 걸레를 빨아와 책장이나 책상, 바닥 등에 옅게 남아있는 먼지를 닦았다.
그래도 이 동네는 내가 알던 현대보다는 환경이 굉장히 좋은 덕분에, 그렇게 먼지가 쌓이진 않은 편이었다.
사실 기숙사에는 학생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따로 방 청소를 도와주는 고용인이 있어 학생들이 메이드를 데려온다 해도 그녀들에게 방 청소까지 시키는 일은 잘 없지만, 테레제가 얼굴도 모를 고용인을 방에 들일 리가 없으니.
프라이버시는 중요하지. 이해한다.
“이 정도면 되었으려나.”
“충분히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혼잣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테레제는 아니다. 테레제는 청소가 시작할 때 창문 근처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짧은 낮잠에 빠진 참이었다.
그럼 누구일까.
사실 말하는 것이 늦었지만, 이 방엔 동거인이 한 명 더 늘어났다.
레라. 레라 밀튼.
개나리처럼 샛노란 머리카락 위로 꼿꼿히 선 여우귀와 풍성한 꼬리가 몹시 인상적인 메이드복 차림의 수인 소녀였다.
전직 모험가였었다는 듯하다. 마법사라는데, 후방에서 지원하는 것보다 아다만타이트로 만든 자기 지팡이와 자신의 육체에다 강화 마법을 걸고서 적을 마구 두들겨 패는 것을 즐겼었다고 스스로 모험가 이력을 소개하기도 했다.
테레제가 ‘구매한’ 메이드이자 호위였다.
“좋아, 청소 끝.”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어쩌다 선배가 되었다.
음. 선배는 선배지.
“그럼 나 대신에 정리라도 좀 하고 있어. 나는 식당에 가서 아가씨 간식을 받아올 테니까.”
“아,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정리하는 게 더 귀찮아.”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레라가 허리를 숙였다.
테레제가 레라를 구매했다고 해도, 노예 같은 건 아니었다.
물론 어떻게 말하자면 그저 노예가 아닐 뿐이고 처지는 노예와 비슷한 처지지만.
듣자하니, 400년 정도 예전의 이야기라더라.
레라는 동굴을 모험하다가 거미 마물 아레네의 독에 당하고 동료에게 버림받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으로 거미 둥지에 끌려갔었다고 한다.
뱃속을 반쯤 뜯어먹히고, 뜯어먹힌 자리에는 거미 알이 심어지고. 그렇게 며칠 정도 지났을 무렵에 한 무리의 드워프 토벌대에게 구해졌다고.
그리고 드워프들은 단지 죽지 못했을 뿐인 그녀의 껍데기를 기계 인형에 덧씌워서 살려냈다.
본인이 말하기를, 사람의 부분이 뇌와 신경 일부, 그리고 피부나 꼬리, 머리카락 같은 껍데기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녀석들. 살려놓았으니 몸값을 벌어라라고 명령하더군요.’
레라는 테레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작게 울분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되살려준 감사함마저도 다 사라질 정도로 너무 오래 일했다면서.
드워프의 사회에는 레라처럼 되살아난 인간이 꽤 있으며, 그들은 마치 기계처럼 부려진다고 테레제가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하기도 했었지.
하여간에 레라는 그 이후 400년 정도 드워프의 성채를 지키는 군인, 아니.
성벽에 거치된 대포나 중기관총 같은 신세로 일하다가 끝끝내 테레제에게 팔린 것이다.
“레라 것까지 해서 받아갈 수 있는 만큼 잔뜩 받아가는 게 좋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드워프의 동네에서 나와 루체르덴 산맥의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아이다.
아니, 눈이 부셔서 울었을 수도 있기야 있지만서도, 일단은 ‘400년 만에 다시 본 하늘이지만 아직도 여전하네요.’라면서 눈물을 흘렸으니까.
불쌍한 아이다. 어디 시설에서 약물 조금 주입 받은 걸로 주름잡기는 글렀다.
하여간에 선배로서 잘해줘야지. 후배 위하는 선배가 되고 싶어라.
농담.
“안녕하세요.”
“오. 코넬리아잖느냐. 오래간만이구나.”
바깥에 나와 담배를 피고 있던 젊은 요리사 아저씨가 아는 체를 해주었다.
키는 작아도 탄탄한 몸집에 눈매가 굉장히 날카로워서 언뜻 보면 격투기 선수처럼 생겼지만, 굉장히 인심 좋은 아저씨였다.
다른 메이드들은 겉모습만 보고 무서워서 피하는데, 나는 피하지 않고 서글서글하게 굴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었던가 듣지 않았던가.
메이드들에게 인기가 없는 건 담배 냄새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비교적 익숙한 편이지만.
“네. 요즘 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뭐? 그럴 때는 염소 고기로 보양을 해야지. 금방 만들어주마.”
“아, 아뇨. 괜찮아요, 아저씨. 일단은 제 아가씨께 드릴 간식을 받고 싶은데요.”
“그러냐. 마침 블루베리 크로스타타를 굽고 있었지.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였더니 아저씨가 그래그래, 하고 인심 좋은 표정을 지었다.
밥 주는 사람이랑은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나는 메이드인 주제에 요리류는 전혀 하지 못하니까 말이야.
메이드라고 다 잘할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사람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게 있기 마련이야.
“이봐요, 피에르! 언제까지 숨쉬기 운동하고 있을 건데?!”
“아, 미안해, 미안해. 코넬리아가 찾아와서 말이야.”
“코넬리아?”
식당 안쪽에서 아직 꽤 젊은 청년이 얼굴을 내밀었다.
요리사 아저씨의 동료인가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바쁜 모양이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 뛰쳐나와선 피에르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끌어내어 나로부터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거린다.
물론 다 들리지만.
“저 아이, 이젠 귀족집 아가씨야. 스스럼없이 대했다간 혓바닥 잘려, 인마......!”
“뭐? 무슨 소리야? 그냥 메이드였잖아? 귀족집?”
“자작 집안인가에 수양딸로 들어갔다던가 그랬다더라.”
“농담이겠지....”
어깨동무가 풀리자, 두 남정네가 거의 동시에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이런 취급이 싫어서 귀족이 되지 않으려 했던 건데.
그나저나 소문 퍼지는 거, 너무 빠르지 않나?
만약 누가 일부러 소문을 퍼트렸다면야 이해가 가긴 가는데. 그럴 사람이 있으려나.
“부담스러우니 너무 그러지 말아주세요.”
“설마 진짜.......”
“죄, 죄송합니다! 이놈이 세상물정을 몰라서!”
피에르 아저씨가 벙쪄있는 사이 옆의 청년이 피에르 아저씨의 머리를 붙잡고 숙이게 했다.
진짜 이러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나저나 청년이랑 아저씨랑 생긴 건 꽤 나이 차이나게 생겨도 의외로 또래인 모양이었다.
피에르 아저씨가 노안인걸까, 아니면 청년 쪽이 동안인걸까.
“그러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대해주세요.”
“그래?”
“그래는 무슨 그래냐, 이 머저리야! 저,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정말로 괜찮다니까 자꾸 그러네요. 어차피 별 권리도 없고. 이름뿐인 입양이고.”
“그래, 너는 본인이 됐다는데 왜 자꾸 그러냐.”
“아니, 너는 진짜”
“됐고. 들어가서 크로스타타나 좀 잘라주자고. 그거 가지러 온 거니까.”
피에르가 투덜거리는 청년을 데리고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금방 크로스타타를 챙겨 넘겨주었다. 상자에는 보존마법이 똑바로 걸려있었다.
......방으로 되돌아가는 동안에 여기저기서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져서 곤란했다.
뭔가 여태 쏘아지던 시선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서 괴롭네.
음. 선망의 시선이라고 해야 하려나. 하여간에 괴롭다.
“다녀왔습니다.”
“어서오십시오, 선배님.”
“어서와, 코넬리아. 안 그래도 널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게 말한 테레제는 살짝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뭘까 싶었는데 레라의 무표정이 면목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 있었나요?”
“들어봐, 코넬리아. 네가 간식을 가지러 갔다고 그러길래 레라에게 음료를 부탁했거든. 그런데 레라, 커피를 절망적으로 못 타는 거 있지?”
“죄송합니다, 아가씨.”
“못해도 괜찮아. 코넬리아도 요리만큼은 절망적으로 못해.”
“죄송합니다, 아가씨.”
거의 반사적으로 사죄의 말이 나왔다.
아니, 그래도 못하는 걸 어떻게 하라고.
감칠맛이란 도대체 어떻게 내는 거야?
“그래서 무슨 간식이야?”
“크로스타타에요.”
“라즈베리?”
“블루베리네요.”
“그것도 괜찮지. 맛있겠다. 막 돌아온 코넬리아에겐 미안하지만, 차를 부탁해도 괜찮을까?”
“제 기쁨입니다, 아가씨.”
빨리 커피 타서 가져다주자.
빨리, 라곤 해도 퀄리티를 보장하기 위해선 결국 느긋하게 타게 되지만.
탕비실에서 10분 정도 느긋하게 추출한 커피와 포크 등을 챙겨서 테레제에게 돌아갔다.
테레제는 레라에게 마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다지 거창한 건 아니다.
레라의 등을 물리적으로 열어, 꽤나 소모된 마석을 새 마석으로 바꿔줄 뿐이다.
안쪽은 확실히 기계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질감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으려나.
저거 닫아버리면 틈 하나 생기지 않는다는 게 또 신기하지만.
“됐어. 이걸로 일주일은 갈 거야.”
“감사합니다, 아가씨.”
“됐어. 내가 너를 샀어. 그러니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일 뿐이야.”
우리 아가씨 최고다.
물론 레라에게도 계약 마법이 걸려있긴 하다.
나에게 걸린 것, ‘테레제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테레제가 다치면 나도 똑같은 부위에 똑같은 상처를 입는다, 테레제의 허락 없이 테레제에게 닿을 수 없다’의 세 제약은 물론, ‘테레제의 허락 없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는 제약까지도 걸려있다.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나은 취급이라며 레라는 좋아했지만.
“커피 나왔습니다. 레라도 한 번 마셔봐.”
“네?”
나는 레라에게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건네었다.
놀란 레라의 귀가 벌떡 섰다. 조금 귀여우려나.
그래도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는데.
“제게, 주시는 겁니까?”
“응?”
“맞아, 레라. 코넬리아가 네게 주는 거야. 그거 마시고 분발하도록 해.”
테레제가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레라는 커피 냄새를 킁킁 맡더니, 꼬리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꼬리 흔들리는 걸 보니 문득 개는 커피를 먹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내부는 기계니까 괜찮겠지.
......아니, 다시. 기계면 미각은 있으려나.
에라, 몰라.
“흐, 흐윽.”
“어? 어어? 뭐야. 혹시 정말로 커피를 먹으면 안 된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
“그, 런게 아니고.......”
“됐어, 레라. 괜찮아. 이해하니까. 그리고 코넬리아는 쉿.”
그런가. 나도 이해했다.
레라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는 간식 시간을 조금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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