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48화 (48/100)

〈 48화 〉 원치 않는 명령

* * *

“아가씨. 왜 제게 윌리엄 왕자가 오실 거라고 이야기해주시지 않으셨나요?”

테레제가 머리카락을 말리는 것을 도우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테레제의 황금색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고운 탓에, 빗질을 하거나 건조를 위해 온풍을 쐬게 할 때는 가끔 걱정마저 들곤 했다.

내 손길이 너무 거친 것은 아닌지. 조금 더 섬세한 사람이 만지는 편이 좋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봐야 뭐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그래도 왕자인데.”

“그런 건 왕자 취급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윌리엄도 그다지 우리에게서 왕자 대접받고 싶진 않을걸?”

“그런가요.......”

머리카락이 따스하게 잘 말랐다.

나는 천천히 빗질을 시작했다.

테레제의 머리카락은 그 색깔처럼 어딘가 따스한 느낌이 났다.

그저 뇌의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로 마력적인 뭔가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그 녀석은 날 보러 온 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내가 부른 것도 아니야.”

“네?”

“아야. 아파, 코넬리아.”

“앗. 죄, 죄송해요. 아가씨. 조금 놀라서.”

안 그래도 나도 방금 머릿가죽이 당겨지는 느낌이 났다.

머리카락도 몇 올 빠졌고. 꽤 아팠겠다 싶었다.

“놀라? 으음. 내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걸까?”

“저는 틀림없이 아가씨가 초대하셨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듀오토도 그렇게 말했었지.

‘뭐. 왕자의 내방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테레제 아가씨의 생각이다. 사랑의 묘약이라도 먹여서 둘을 이어버리면 귀찮은 일은 이제 없어질 거라고 하시더군.’이라고.

물론 듀오토가 전부 다 알고 있는 건 아닐테고, 테레제도 테레제 나름대로 대충 구겨서 말할 수도 있는 법이긴 하니까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내가 문제일 수도 있긴 있는데.

있긴 있는데 말이지이이이.

“아냐. 이틀 전인가 윌리엄이 엘자가 행방불명되었으니 거기 있겠지­하고 먼저 연락해오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제멋대로 방문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첩을 보내온 거야.”

“일방적으로? 여전히 이상하네요. 혹시 윌리엄 왕자가 엘자를 짝사랑했나요?”

“짝사랑?”

테레제는 내 물음을 듣더니, 가당치도 않다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어어. 뭘까.

내가 당황하느라 아주 짧은 침묵이 머물렀다.

침묵을 깬 것은 테레제의 마치 터져나오는 듯한 작은 웃음소리였다.

남을 놀리기에 앞서, 머릿속으로 다 전개도를 그리고 앞서 내뱉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이제 보니 코넬리아도 영락없이 아가씨잖아. 귀여워, 귀여워. 물론 연애 이야기가 재밌지.”

“네?”

“짝사랑이라니.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저, 아가씨.”

“미안해, 아아, 코넬리아. 결코 비웃으려던 건 아니야. 미안해.”

테레제는 눈물까지 찔끔 흘렸는지 손등으로 얼굴을 슥슥 닦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근데 말이야. 이게 천상 여자아이 소리 들을 만한 이야기려나.

연애 이야기고 자시고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추론해낸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게다가 할 말이 아니라서 굳이 입 밖에 내뱉진 않겠습니다만, 재밌다­라고 퉁치기에는 우리 아가씨께서 에드윈에게 반해서 속앓이하던 세월이 너무 길었던 것 같지 않나 싶기도 하고.

“들어보렴. 윌리엄은 신개념 용병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잖니.”

“신개념 용병사업...인가요.”

확실히 신개념은 신개념이다.

나 같은 걸 양산해서 전쟁터에 투입하면 마법사들은 다 죽어나가겠지.

양산 가능한지는 모르겠고, 나나 아일린 만큼의 완성도가 나오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을 잘못했네. 윌리엄 본인의 말이야. 나를 너무 책하진 말아주렴.”

“괜찮아요.”

“하여간에 인체 실험이건 실험의 산물이건, 메흐레니아 교단에선 그다지 좋게 보지 않거든. 그래서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으니까, 우선 단골을 만들어 놓을 생각인 거야. 변경의 군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도록. 먼 교리를 무시하고 가까운 용병을 고용하도록.”

“확실히 결혼의 연을 맺으면 단골이 되지 않으래야 안 될 수가 없겠네요.”

“그래그래. 그런 거야.”

달콤한 연애 이야기 같은 건 없단 말씀. 테레제가 덧붙였다.

뭐어. 그래도 우리에게 있어선 차라리 나은 걸지도 모른다.

윌리엄이 엘자를 도구로만 본다면, 엘자와의 정에 얽매여서 그녀의 복수를 도운다던가 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왕자가 왔다고 격식 차릴 것도 없어. 편한 옷으로 부탁할게.”

“네, 아가씨.”

옷장에 다시 다녀와야 할지도 모르겠네.

왕자가 왔다고 해서 괜히 에드윈이 왔을 때 입곤 했던 답답한 옷들만 챙겨왔다.

실수했어.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테레제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고 나이가 지긋한 하우스 메이드 하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하우스 키퍼 부인께서 웨블리 양을 뵙고자 하십니다.”

“무슨 일일까요.”

“미안해, 마르타. 지금 우리 코넬리아는 바쁘거든.”

“죄송합니다, 아가씨. 하우스 키퍼 부인께선 한시가 급하다고 하셨습니다. 몸 단장 정도라면 제게 맡기셔도 괜찮으리라고.”

“으으으으으. 글로리아아아아........”

테레제가 대놓고 싫은 소리를 뱉으며 얼굴을 구겼다.

이 메이드는 꽤 엄한 타입이었다.

테레제가 편한 옷을 입으려고 해도, 이 메이드가 담당이라면 ‘이클리시아의 왕자가 오셨는데 무슨 소리십니까’라며 혼내면서 격식 차린 옷을 입히려 하겠지.

“됐어. 가 보렴, 코넬리아.”

“네, 아가씨.”

나는 마르타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바깥으로 향했다.

마르타는 내가 나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역시 제대로 된 쪽은 뭔가 다르다고 할까. 벌써부터 답답하다고 할까.

하여간에, 나는 방에서 나서자마자 곧바로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예로부터 글로리아에게 호출되면 알아서 찾아갔어야만 했었다.

물론 이젠 내가 호출된다고 무조건적으로 넙죽넙죽 찾아가야만 하는 그런 짬은 아니지만.

“귀빈실이네.”

엘자의 방 앞이었다.

또 무슨 일이려나. 나는 불길한 기분을 가득 품은 채로 글로리아에게 찾아갔다.

“일찍 오셨네요. 테레제 아가씨가 볼멘소리하지 않으시던가요?”

“무척 하시던데요.”

“업무 중에 불러서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로 급한 일이라서.”

“뭔가 저 혼자선 결정해선 안 될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기분이 팍팍 드는데요.”

“들어가보세요.”

글로리아가 귀빈실을 가리켰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명령하는 건가요?”

“제 명령이 아니라 윌리엄 왕자의 명령이라면요?”

“그렇겠죠.”

나는 노크를 한 뒤, 들어오라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문을 열고 방 내부로 들어갔다.

우리 테레제 아가씨보다 연하지만 한참 전부터 발육이 굉장히 좋았던 윌리엄은 이미 성인이나 다름없는 풍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굳이 내게 자랑하진 않았으면 하지만.

“왔나요, 코넬리아.”

“......저를 욕보일 셈이라면 나가보겠습니다만.”

“욕보여? 건장한 왕족의 몸입니다. 왕국의 미래이자 국보입니다. 바라보는 것마저도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않겠습니까?”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침대에 알몸으로 앉아있는 윌리엄 왕자는 당당하다는 듯 그리 말했다.

엘자는 어디 갔나 했더니, 침대 한구석에 알몸으로 널브러진 채 경련하고 있었다.

침대에는 핏자국. 돌겠네. 왜 유르덴 저택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냥 데려가던가.

“혹시나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제 명예가 더럽혀질까 싶어서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저는 결코 약물 같은 건 안 썼습니다. 하우스 키퍼라는 사람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약물을 주긴 줬는데, 여기. 조금도 줄지 않았죠?”

“아, 그러십니까? 정말 대단하시네요.”

웃기는 소리 하기는.

그런 소리를 하려거든 혼이 나가서 반쯤 기절해버린 엘자에게 들러붙어 아직까지도 애무하고 있는 운디네부터 어디로 치워버리고 말씀하시지.

말이 운디네지 촉수괴물이나 다름없는 그 녀석 말이야.

“다행히도 저는 왕자님의 조교 행위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그렇게 혀가 가볍지도 않습니다. 부디 안심하시고 용건이나 말씀하세요.”

“조교라니. 어째서 타레이아 양이 짐승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여자는 제 부인이 될 사람입니다. 제가 선택한 제 왕자비입니다. 그리고 이건 제 나름대로 사랑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애프터케어는 중요하지 않습니까? 방금 언행은 자칫하면 왕족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시길.”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용건이나 말하시지요.”

“당신은 아일린을 안 죽입니까?”

곧바로 용건을 부딪쳐오는구나.

분명 윌리엄이 부탁아닌 부탁을 하긴 했었지.

아일린이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습격한다고, 죽여달라고.

그런데 세실리아는 우리를 적대하지 않기로 했는데.

“성녀 후보는 그쪽 일에서 발을 빼었을 텐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세실리아는 목줄을 잘 간수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세실, 리아......?”

친구의 이름이 언급되자, 엘자가 지친 목소리로 반응했다.

윌리엄은 실례, 하고 말하더니 허리를 돌려,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킨 엘자의 턱을 붙잡고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을 떼자, 거의 동시에 운디네 괴물의 움직임이 갑작스러워졌다.

엘자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신음을 흘리며 침대 위에서 비틀어졌다.

저렇게 괴롭힘 당하다가는 정말로 허리가 빠질 지도 모른다.

애초에 저런 꼴이면 기뻐하는 건지 괴로워하는 건지도 알 수도 없고.

“하여간 아일린은 성녀 후보 몰래, 아니면 묵인 아래에서 잘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죽이세요. 애초에 처음부터 죽이라고 주문하지 않았습니까? 왜 주문대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아. 갑자기 열 받네요.”

“......이해했습니다.”

“이해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좋았겠지만, 뭐. 저는 아량이 넓은 편입니다.”

나가보세요. 윌리엄이 명령했다.

어떻게 형이나 동생이나 둘 다 이렇게나 인간이 되지 못한 걸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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