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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47화 (47/100)

〈 47화 〉 인질극

* * *

평소대로 테레제보다 일찍 일어나, 씻고 왔다.

그리고 아직 새벽이라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건지 예의 바르지 못하게 잔뜩 하품하며 복도를 돌아다니던 어린 트위니 메이드 하나를 붙잡아 테레제의 아침 식사가 내 방으로 보내질 수 있도록 부엌에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테레제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을 글로리아나 기사들이야 테레제가 내 방에서 잔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만, 부엌까지 알고 있을지는 모르니까 말을 해두는 편이 낫겠지.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는 사이 테레제는 주인이 없어진 내 이불까지 그러모아 덮고 있었다.

덮고 있다기보단 파묻혀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나름 두꺼운 이불이니까.

덥지 않으려나.

깨우지 말고 계속 자게 두자. 어린이는 아직 잘 시간이다.

“벌써 일어났어......?”

“죄송해요. 깨워버리고 말았네요.”

“괜찮아아.”

깨우지 않기로 막 다짐한 참이었는데.

테레제는 이불 속에서 오른팔만 꺼내어 휙휙 흔들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 그러더니 힘을 잃고서 팔꿈치 언저리에서 추우욱 늘어졌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대로 다시 잠든 모양이다.

“아가씨도 참.”

나는 침대로 다가가서 테레제의 팔을 편하게 내려주려 했다.

하는 김에 이불도 똑바로 덮어주려 했다. 이불 두 겹의 푹신함에 대해선 나도 엄청 잘 아니까 딱히 이불을 뺏을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자 힘을 잃었던 팔이 무척이나 갑작스레 휙휙 흔들렸다.

발소리는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안 걸까.

“괜찮아아아아. 일어났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에요. 조금 더 주무셔도 괜찮아요.”

“으응? 으으으응.”

테레제는 내 말을 듣더니 알아들었는지 알아듣지 못했는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자기 팔을 다시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으음. 알아들었다는 소리겠지.

물론 테레제가 아침에 약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내 방에는 깊은 잠을 자도록 도와주는 마도구가 없기 때문이겠지.

마도구가 있었더라면 내가 먼저 일어나 옆에서 돌아다닌다고 해서 잠든 테레제가 이렇게 일찍 깨어나 인사불성일 일도 없었다.

“악몽을 꾸지 않으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코넬리아가 좋아.......”

그 말을 끝으로, 테레제는 이불 두 겹의 푹신함 사이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 글로리아가 넘겨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 좋다.

할 일이 없어서 너무 좋다. 느긋하게 빈둥대는 거 최고야.

물론 기숙사였다면 내가 직접 아침 식사를 가져와야 했을 테니 느긋하게 있을 수 없었겠지만, 여긴 메이드들이 음식을 배달해준다.

물론 점심과 저녁은 가족, 가신들과 함께 식당에서 먹지만, 아침은 예외.

유르덴 공작은 보통 저택에 없고, 유르덴 공작부인은 아침 기상이 힘드시다는 모양이고.

어차피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듯하다.

편한 게 좋은 거지.

“......마실 거라도 받아올 걸 그랬나.”

물론 내가 마실 것도 있지만, 테레제가 깨어났을 때 목이 마를 수도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받아올까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저택 어디선가 둔중한 진동과 함께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뭐야.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테레제를 보았다.

이불 더미가 덜덜 떨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제가 바로 옆에 있어요.”

“코넬리아아.”

덜덜 떨던 테레제가 천천히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새파란 안색으로 괜찮아졌어,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범인은 엘자겠지.”

“그렇게 쉽게 움직일 수 있을 몸 상태가 아니었어요. 기습일지도.......”

“아냐. 이 마력은 엘자의 마력이야.”

나는 전혀 모르겠지만, 테레제는 나 같은 것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니까 아마 맞겠지.

테레제는 한숨을 한 번 뱉더니, 이불 도롱이가 된 채로 침대에 앉았다.

“한 번 상태를 보고 오렴.”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하우스 키퍼 부인이나 기사장께서 알아서 하게 두는 것도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듀오토는 어머니의 곁에 있어야 해서 움직이지 않을 거야.”

테레제의 동생인 테오도어의 호위를 맡으러 떠난다고 했던 인물이 왜 여기에 남아있는 건가 했더니 아무래도 테오도어가 새 기사를 받던가 한 탓에 공작 부인의 호위를 맡으러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조금 의문이긴 했었어.

하긴 기사장이기도 하고. 물론 본진 방어는 중요하지.

충분히 이해 가능한 바다.

“그럼 하우스 키퍼 부인께서.”

“글로리아라면 자칫 엘자를 죽여버릴지도 몰라.”

“......다녀오겠습니다.”

“응.”

글로리아라면 정말로 죽여버릴 것 같아서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곧바로 방에서 나와, 거의 복도를 달리다시피 걸어 별관의 귀빈실로 향했다.

여기저기 겁먹은 까마귀나 참새처럼 메이드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고, 그 중앙에선 파이어 볼이라도 맞았는지 가슴 갑옷이 잔뜩 그을리고 수염까지 불타 새까맣게 짧아진 기사 레오날이 상당히 당황한 모습으로 문 바깥에서 손을 흔들며 문 안쪽에다 대고 뭐라뭐라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가씨. 그런 일 해 봐야 아가씨께 좋을 일 하나 없습니다! 어서 그 아이를 풀어주십시오!”

“시끄러워! 닥쳐! 나는 지금 테레제를 데려오라고 말하고 있잖아아아아아!!!!”

불화살이 날아들어 레오날의 가슴을 다시 때렸다.

커다란 충격. 이번에는 흉갑이 박살나고, 레오날이 심하게 밀려났다.

레오날의 가슴팍엔 불이 들러붙었고 무릎마저 꿇었지만 으으으응­하는 끓는 듯한 기합 소리를 한 번 크게 내지르니 무슨 원리인지 그의 몸에 붙은 불길이 단번에 꺼졌다.

“아가씨. 계속 이러시면 저희로서도 아가씨를 더 대우해드릴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아, 웨블리 양. 하우스 키퍼 부인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저는 이미 와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크흠. 부인께서는 대체 무얼 하고 계시는지.”

나는 레오날의 옆으로 다가가 귀빈실 안쪽을 보았다.

엘자가 리리아네트를 인질로 붙잡고 손끝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리리아네트의 안색이 굉장히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리리아네트에게 마나 드레인을 해서 부족한 마나를 충당한 모양이었다.

지쳤다고 해서 움직이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 완전히 착각이었나.

“너어어어어어!!”

엘자가 나를 보더니 얼굴을 악귀처럼 찌푸렸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내게 파이어 볼을 쏘았다.

마력 아깝게.

“누으우우우우우웃!!!”

어.

레오날이 갑자기 몸을 던져 날아들어오는 파이어 볼을 자기 몸으로 막아주었다.

고맙긴 한데. 아니 뭐, 고맙긴 한데.

전혀 그럴 필요 없었는데.

기사도 정신?

“으오오오오!! 육체를 죽이지 못하는 미지근한 불길은 다만 육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

“아, 네에.”

레오날이 다시 기합을 뱉으며 자신에게 붙은 불길을 껐다.

이젠 상의가 다 불타버려서 근육이 우락부락한 상반신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보이고 있었다.

가슴털이 새까맣게 타버렸지만, 번들거리는 피부와 터질 듯한 근육에는 상처가 전혀 없었다.

으음. 저런 모습이야말로 진짜 마법 이뮨이 아닐까?

“히, 히익.”

“분이 풀렸다면 그만 그 불쌍한 메이드 아가씨를 풀어주시오.”

“허, 헛소리 하지 마. 풀어줄 리가 없잖아......!!”

엘자는 악을 쓰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빨을 한 번 빠득 갈더니, 리리아네트에게 손을 뻗었다.

또 마력을 빨아들일 생각이다.

나는 레오날을 살짝 밀어내고 귀빈실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뭐, 뭐 하는 거야!! 들어오지 말라고!”

“또 마력을 흡수했다간 리리아네트가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리리아네트는 마법과 연이 전혀 없는 일반인이니까. 당신이 어차피 그녀를 죽여버릴 셈이라면 제가 손 놓고 보고만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죠.”

“......죽어?”

엘자가 리리아네트의 얼굴을 보았다.

어쩌면 한 두 번 마력을 더 빼앗긴다 한들 죽지 않고 멀쩡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얼굴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내게, 대체 어쩌라는 거야.”

“리리아네트는 무관계한 사람이에요.”

사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엘자를 제압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는 내게서 미오르티아를 빼앗아갔잖아. 네가 빼앗아간 만큼 돌려받으려고 하는 것뿐이야. 이게 그렇게 잘못되었어?!”

“아뇨. 당신의 마음은 이해해요.”

“이해해? 그게 지금 네 입으로 할 소리야?”

“네. 이해해요. 그러니까 리리아네트가 죽으면, 저도 당신이 빼앗아간 만큼 돌려받으려 할 수밖에 없어요. 그다지 기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지만요.”

“이 살인자! 지금 누가 누구를 협박하는 거야?! 이해해?! 헛소리 하지 마! 너 같은 게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속으로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정면에서 얼굴을 보이는 건 아무래도 역효과밖에 없다.

글로리아는 대체 언제 오려는 거야.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그래, 알아들었으면 그만 죽어버려! 칼을 뽑아서 네 목을 찔러버려. 죽어서 미오르티아에게 사과하란 말이야!!”

“하지만, 저나 리리아네트가 죽으면 당신도 저 같은 살인자가 될 뿐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같아?”

엘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살난 기물. 불타버린 벽. 힘 없이 신음소리를 뱉고 있는 리리아네트.

엉망진창인 자신의 모습.

“저야 뭐. 태생이 나쁜 사람이니까 상관 없지만.”

“.......”

“기사님은 아가씨의 손이 피로 물들기를 바라진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는 테레제 아가씨가 언제까지고 순진무구하기만을 바라고 있으니까.”

이미 피로 물든 것 같긴 하지만.

역을 날려버리고, 역에 있던 무고한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잖아.

굳이 지금 말하지는 않는다.

“흐윽....... 미오르, 티아아.......”

엘자가 흐느끼며 손을 놓았다.

리리아네트가 쓰러지고, 뒤에서 쭉 상황을 보고 있던 레오날이 재빠르게 진입해 리리아네트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일이 다 끝나자 느긋하게 찾아온 글로리아가 내게 미소로 인사하고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엘자에게 다가가 주저앉은 그녀에게 작은 모포를 둘러주었다.

“......히끅.”

“이렇게 얇은 옷차림으로 울면 감기에 걸린답니다.”

“너희들을 증오해. 너희들이 미워. 전부 다 밉다고.......”

“잃은 건 다시 채우면 될 뿐이에요. 굳이 남에게서 빼앗아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달콤한 목소리. 귓가에 천천히 파고드는 음색.

지금 뭐 세뇌라도 하는 건가.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씻고 깔끔하게 갈아입고, 식사부터 해요. 눈물자국 지우고. 마침 오늘 엘자 아가씨께 손님이 오시기로 했거든요.”

“......손, 님?”

“네에. 손님. 멋지신 분이랍니다. 그러니까 어서 가요. 함께 씻도록 해요.”

아주 무서울 정도네.

뭐어. 됐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방에서 나와 테레제에게로 되돌아가려 했다.

문득 보인 창밖에 마차가 보였다. 이클리시아 왕가의 마차였다.

하지만, 에드윈의 것은 아니었다. 윌리엄의 것으로 보이는데, 왜.......

“손님이라는 게 윌리엄이었어?”

“모르고 있었나?”

듀오토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볼 것도 없이 대답했다.

“왜 하우스 키퍼 부인이고 듀오토 경이고 전부 일 끝나니까 얼굴을 들이미는 건가요?”

“반대다. 일이 끝났으니까 모습을 보인 거다.”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요.”

“뭐. 왕자의 내방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테레제 아가씨의 생각이다. 사랑의 묘약이라도 먹여서 둘을 이어버리면 귀찮은 일은 이제 없어질 거라고 하시더군.”

엘자에 대해서는 알겠는데, 윌리엄 왕자는 뭐가 꿇려서 테레제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었다던가?

설마 둘 모두에게 먹일 생각은 아니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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