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피어오른 불길
* * *
“이거 괜찮아 보이는걸.”
테레제가 벽의 액자에 걸린 칼을 보며 말했다.
칼집에서 나온 칼과 칼집이 따로 한 액자에 걸려있었는데, 혈조가 파여있지 않고 곡률이 아주 살짝 들어간 환도 형태의 칼이었다.
띠돈이라.
허리띠에 칼을 그냥 꽂고 다니는 것보다는 보기에 나으려나.
지금이야 큰 칼 대신에 단검 길이의 아레이유를 등에 차고 다니니까 다른 사람에겐 잘 보일 일이 없어서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메이드가 커다란 칼을 대놓고 허리띠에 꽂아 다닌다고 학교 사람들 사이에서 꽤 말이 많았었다.
똑같은 큰 칼이라도 칼자루에 새빨간 유소??가 달려 화려하게 늘어졌고, 새까만 칼집에도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었더라면, 그리고 그런 환도를 멋들어진 띠돈으로 깔끔하게 허리에 매달고 다녔었더라면.
그랬었더라면 말이 조금 덜 나왔으려나.
......아마 그랬더라면 겉멋이나 부린다고 욕을 먹었겠지.
딱히 활을 쏘는 것도 아니니까 띠돈을 쓰는 게 실용적이지도 않고.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다면 그걸로 할까요?”
“뭔가 아닌데. 아레이유를 봤을 때 그 표정이 아니야.”
“그때 저,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가요?”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표정.”
“으엑.”
“장난이야.”
장난이라고는 말했지만, 그것과 거의 비슷한 표정이었던 게 아닐까.
그래도 사람을 보고 그런 표정을 지은 게 아니니까, 별 문제 없지 않을까......?
아니 근데 불칼 얼음칼을 어떻게 참아? 못 참지.
그러니까 티라노사우루스나 변신 로봇 같은 거잖아.
“그래도 나는 이 칼이 마음에 들어. 일단 사자. 이걸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네가 보고 싶어.”
“아가씨께 자랑스레 보여줄 만한 실력이 아니라서 조금 부끄럽네요.”
“그래? 나는 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칼끝이 그리는 선이 무척 예쁘거든.”
그렇게 봐준다면야 정말 다행이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칼은 검술 같은 것이랑 별 관련이 없다고 본다.
좋게 말하면 실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여태껏 배운 형?과 태?를 전부 무시하고 그냥 힘과 속도로 상대를 압도해 일단 때려눕힌 다음에 생각하는 수준이라고 말해도 할 말 없다.
절도가 있고 각이 잡혀있다던가, 그런 게 전혀 없다.
당장 최근의 몇 번 전투를 생각해도 무지성으로 뛰어 들어가 몸으로 덮쳐서 낙마시킨다던가, 마치 조직폭력배처럼 배를 난자한다던가. 예쁜 선이라고 말할 건 없지 않나 싶다.
반면 아일린의 발도술은 정말 아름다웠지.
준비 자세부터 검을 휘두르고 다시 수납하는 그 순간까지, 호흡하는 입술과 칼자루를 쥔 손끝 모두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물론 아일린의 칼끝은 제대로 눈에 담을 수도 없었지만, 보통 그런 걸 보면서 예쁜 선이구나라고 말하지 않나 싶다.
“자신감을 가지렴, 코넬리아.”
“감사합니다.”
“일단 이거 꺼내 달라고 할까. Kcliare!”
테레제의 부름에 엘프 종업원이 천천히 걸어왔다.
엘프어로 몇 마디를 나누더니, 엘프 종업원은 잠시 기다려달라는 듯한 말을 하더니,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는 카운터를 맡고 있던 매니저처럼 보이는 소녀와 몇 마디를 하더니, 바톤터치하듯이 매니저 소녀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엘프어로 다시 뭐라뭐라 몇 마디를 했다.
이봐, 엘프. 공용어가 좋다고. 공용어로 대화해.
“잘 됐네, 코넬리아.”
“네? 무슨 일인가요?”
매니저 소녀는 양복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장식장 아래를 열고 있었다.
“이건 장식품이라서 팔기에 곤란하고, 조금 더 쓸만한 걸 보여주겠다는데.”
“솔직하네요.”
“그렇네. 혹시 코넬리아는 알고 있었어?”
“네? 아뇨. 모르고 있었어요.”
“그래도 손에 한 번 쥐어 봤다면 바로 알아봤겠지?”
“아마도요.”
“그럼 네 걸음걸이나 호흡이나, 그런 걸 보고 저쪽도 알아차린 거 아닐까 싶네.”
설마, 싶지만.
때마침 매니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니저가 연 장식장 아래 서랍장엔 액자에 걸린 것과 비슷한 형태의 환도가 마치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무슨 칼을 서점에서 책 재고 보관하는 것처럼 보관하고 있어.
그 가운데 한 자루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새까만 환도였다. 그냥 옻칠을 해서 새까맣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흑요석 같은 질감이었다.
그것을 들어서 칼날을 뽑아보았다. 혈조도 파문도 없이 그저 새까만 칼날이었다. 다만 칼날이 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칼날만큼은 번쩍거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무슨 금속을 썼는지는 모르겠다. 엘프의 기술이겠지 하고 넘길 뿐.
무진장 날카로워 보이네.
칼끝에 손가락을 대고 살짝 당겨보았다.
힘을 많이 준 건 아니었지만, 전혀 휘지 않았다.
“그래. 그걸로 하자.”
“......설마 또 저, 그. 짝사랑에 빠졌다는 그런 눈을 하고 있었나요?”
“물론이지. 그걸로 하자. 다른 칼들도 한 번 살펴봐. 예비가 필요할지 모르니까.”
“이걸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 싶지만요.”
“어허.”
군말없이 더 뒤져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같은 종류의 상품들을 한데 모아 넣어놓은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전부 환도네.
색깔도 재질도 전부 가지각색이라서 살펴보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한 자루 좋은 게 있으니까 딱히 손이 안 간다.
“하아. 그만두자. 다른 데 찾아보는 게 낫겠어.”
“그렇게 표정으로 알아보기 쉽나요?”
“평소에는 맹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뭔가 표정이 다채로워질 때가 있더라고. 칼이나 대포, 자동차라던가 비행선 같은 걸 볼 때 말이야.”
“......뭔가 참 소년답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못 들은 걸로 하겠어.”
네네.
새까만 환도를 구매해 상점 바깥으로 나가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게일이 바쁘게 달려와 짐을 받으려 했다.
그리고는 짐이 하나도 없는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내 허리춤의 환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는 옷을 사러 온 줄 알았습니다. 가게가 너무 화려하게 생겨서.......”
“확실히 대장간처럼 생기진 않았다고 생각해.”
“굉장히 아름다운 검이군요. 웨블리 양에게 굉장히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말튼베리 경.”
빈말이라도 받아줘야지.
“안 그래도 다음은 옷가게에 갈 거야. 코넬리아의 사복을 살 거니까.”
“네? 잠깐만요. 제 사복? 권총이라던가.”
“그건 드워프네 동네에 가서 볼 거야. 군말 말고 따라와.”
/
“죄송합니다.”
몰래 조용히 게일에게 사과했다.
그는 지금 옷을 스무 벌 정도 들고 있었다.
내 옷이 여덟 벌에, 나머지는 전부 테레제의 옷이었다. 꽤 무겁겠지.
저걸 들고 몇 시간 째 걷는 중이다.
아니면 훈련을 받았으니까 이 정도는 가뿐하려나.
그래도 어쩐지 미안했다. 저런 모습이 그다지 낯설게 보이지 않아서일까.
“괜찮습니다. 가뿐합니다.”
“아. 예쁜 옷 많이 사줄 수 있어서 즐거웠다”
결제를 끝내고 상점에서 나온 테레제가 신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를 갈아입히면서 시종일관 즐거운 얼굴이었지.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인형놀이 하는 기분?
게다가 나는 사복이 그다지 필요 없는 데다가 금방 자랄 거라 이번에 산 옷을 입을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불필요한 소비를 한 느낌이지만.
“그만 돌아가자.”
“네, 아가씨.”
해가 뉘엿뉘엿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도착해서 저택에 돌아가면 딱 해가 지겠지.
오늘 구매한 물건은 적당히 메이드에게 맡기고 저녁식사를 하면 하루가 지나리라.
역으로 돌아가, 주문서를 구매했다.
그리고 주문서를 사용해, 유르덴 령으로 순식간에 되돌아왔다.
“아, 힘들었다. 어서 돌아갈까.”
테레제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기사인 게일이나 신체가 사람 신체가 아닌 나와 다르게, 테레제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피로하긴 해도 거뜬할 게일이나 거의 멀쩡한 나와는 다르게, 테레제는 피곤할 만 했다.
승강장에서 나와 대합실로 나왔다.
“첫 임무 수고했어, 게일.”
“감사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제 임무는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그런 마음가짐 싫지 않네.”
그렇지. 음음.
나도 싫어하지 않아.
이 친구랑은 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어”
쾅.
하고, 갑작스레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어디에서 폭발이 일었는가. 알 방도가 없다.
그저 사방이 불길이었다. 순식간에 화염이 파도가 되어 밀려들었다.
테레제는 전혀 반응하지 못한 모습이었다만, 다행히도 테레제가 몇 개나 몸에 숨기고 다니는 아뮬렛의 자동방어결계와 테레제가 외출할 때마다 자신에게 사용해두는 방호결계는 똑똑히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수 겹의 결계가 위협에 반응해 펼쳐져,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테레제를 감싼다.
저 정도라면 충분히 몸을 지킬 수 있으리라. 게일도 마력 장벽으로 문제 없이 몸을 지켰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다른 사람들. 무고한 승객들.
모두가 순식간에 불길에 휘감겨 잿더미로 변해간다.
나는 이를 갈았다.
나는, 나만큼은 저런 편리한 거 못한다.
이게 마법적인 불길이라면 그냥 서서 파편만 피한다면 상처 하나 생기지 않겠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폭약으로 터트린 거다.
곧바로 띠돈을 돌리고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어서, 다가오는 불길에다 대고 휘둘렀다.
불길을 자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자른다고 해도, 화염은 전방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도 아니면 모지. 빌어먹을. 어차피 칼날은 휘둘러졌고.
아마 여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웨블리 양! 이쪽으로”
“다가오지 마! 너는 아가씨 곁에 있어!!”
게일이 나를 붙잡으려 해서 손을 뺐다.
마력 장벽으로 몸 잘 지키고 있는데, 그런 게일이 내게 닿았다간 두 명이 죽을 뿐이다.
그리고 화염, 베어갈랐다고.
전방의 불길은 좌우로 흩어졌다, 만. 좌우와 뒤의 화염은 어차피 다가온다.
충격파도 몸을 뒤흔들고 있었다. 파편도 장난이 아니겠지.
내가 검을 휘두른 탓에 화염이 잠시 갈라진 그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으으으윽!!”
사실상 몸을 던진 게 아니라 날아갔다.
뒤에서 뒤쫓아온 화염 폭풍이 온몸을 두들기고, 등에 불이 붙은 채로 벽 언저리까지 데굴데굴 날아갔다.
아, 진짜 팔자 사납네.
날아가는 도중에 게일과 테레제를 보았는데, 게일은 마력장벽이 깨지긴 했어도 버틴 모양이고 테레제에 이르러서는 방호결계가 단 한 장도 깨지지 않았을 만큼 멀쩡하다.
갑작스레 들려온 커다란 소리와 불길 탓에 놀라서 제자리에 쪼그려앉아 버리긴 했지만.
다행이네.
“빌어, 먹을.......”
나도 마법 좀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나도 수호결계나 마력 장벽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내 외부에 두르는 거라 그런지 펼쳐 봐야 내 손끝이라도 닿았다간 바로 깨져버린다.
그래서 그냥 안 배웠지. 무진장 후회된다.
이런 상황에선 그냥 펼쳐놓고 꼼짝 않고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건데.
“으, 으윽.......”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아가씨! 젠장.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보니, 눈길 닿는 곳마다 불길이었다.
폭발은 어떻게 버틴 모양인데. 테레제와 게일이 어느 정도 폭발의 방어벽이 되어준 느낌이다.
“아.”
배가 뜨거워서 내려다보니, 뭔가 꽂혀 있었다.
콘크리트가 달린 철근이다.
철근은 가느다란 게 2개 정도. 이 정도면 중상이라도 많이 심한 건 아닌데, 두 철근을 둘러싼 콘크리트가소주잔 정도 지름의뭉툭한 녀석이었다.
이런 게 등 뒤에서 배를 뚫고 나온 거다.
내장 상태가 심각하겠어. 또 병원살이인가. 미치겠네.
그나마 사지 멀쩡히 이 정도로 끝난 것에 감사해야겠지. 적어도가슴팍에 맞아 즉사하진 않았잖아.
등짝을 볼 수 없으니까 확신은 금물이지만.
“이거, 뽑아내면 죽겠지......?”
뭐가 박히면 뽑아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태평하게 무슨 소리야 싶지만, 생각을 계속 거듭해나가야만 했다. 아직 아파오지도 않고 그저 몽롱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적은 어디. 젠, 장. 그래도 말이야. 아.
지금 정신, 잃으면 안 되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