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웨블리
* * *
결국 성씨를 받긴 받았다. 웨블리라는 성씨였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웨블리 양, 코넬리아 웨블리다. 우하하.
......당연하다시피 양을 붙이고 있어.
어쨌거나.
유르덴 공작가의 여러 공관 가신 가운데 웨블리 자작이라고 해서 토지 관리직을 맡은 남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의 양녀로 들어갔다는 모양이다.
호적상 아버지 될 사람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 일이 다 끝났다는 모양이다.
2남 3녀의 막내로 들어간 데다가 자작위라는 것 자체가 따로 받는 영지도 뭣도 없는 비세습 작위라서 의미 없는 성씨를 받은 셈이다.
기껏해야 장남이 유산을 상속받을 때 이름을 기억해주고 고기 조각 몇 개 던져주는 정도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원래 그렇긴 한데, 코넬리아는 조금 다르려나.”
“뭔가 벌써 예감이 안 좋네요.”
“이클리시아와의 정략혼 이야기가 파탄이 난 덕분에 고개를 드는 이야기긴 한데, 만약에 내가 유르덴 가문을 잇게 되면, 코넬리아와 웨블리 가문은 자작위를 유지하게 될 거야. 세습 아닌 세습 같은 느낌이겠네.”
뭔가, 이거.
누구 원한 사기에 충분한 일 같은데.
“......자, 잠깐만요. 그렇게 되면 제가 난데없이 굴러와서 웨블리 가문의 자제들의 박힌 돌을 빼버리는 셈이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어차피 네가 걱정하는 그쪽 친구들은 자기 아버지만큼이나 잘나지 못해서 유르덴에 고용될 일 없어. 그러니 현 웨블리 자작이 죽으면, 웨블리 가문은 다시 남작 가문으로 되돌아갈 뿐이야.”
“그래도 저는 어디 가문의 가주 같은 거 못할 거 같은데요.”
“가주? 아. 네가 저 친구들을 이끈다고? 웨블리 자작 가문의 자작이니까?”
내 말을 듣더니, 테레제가 까르르 웃었다.
귀족 가문 어려워. 이래서 하기 싫다는 거야.
그리고 애초에 이 모든 이야기는 테레제가 다른 곳으로 정략혼을 떠나지 않고, 현 후계자인 윌리엄을 대신해서 유르덴 공작으로서 가문을 세습할 때의 이야기다.
의미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까놓고 말하자면 역시 의미 없다.
그러니까, 그냥 김칫국 마시는 소리다 이거다.
“너는 지금 하던 대로 하면 돼. 가주가 될 필요 없어. 저쪽과 얼굴 마주할 필요도 없어. 네가 자작이 된다면, 웨블리 가문은 그냥 알아서 ‘우리 아직 자작 가문이요’하고 말 테니까. 애초에 그런 조건으로 네게 웨블리 성씨를 준 거야.”
“네에.......”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부탁해, 웨블리 양.”
“아하하하.”
실감도 뭣도 안 오지만.
물론 그런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른 애매한 성씨보다 더 큰 선물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네게 준 칼이라는 게 바로 이거야?”
“네, 아가씨.”
“흐음.”
검 한 자루가 침대 옆에 세워져 있었다.
크로스가드가 아름다운 형상의 사이드 링과 핑거 링에 휘감겨 있는, 흔히 레이피어라고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그런 형태의 검이었다.
그렇다고 레이피어는 아니고, 칼날 한쪽만 시퍼렇게 날이 선, 백 소드 타입의 직도??였다.
칼등에 곡률이 들어가면 세이버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본래라면 기마용 무기다.
“어지간히도 기사로 만들고 싶었나 보네.”
“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어요.”
사실 충분히 생각했지만, 못한 척하자.
“그냥 좋은 칼이네, 싶었어요.”
“이건 액자에 걸어서 이 방에 장식하자. 네가 쓸 검은 따로 또 구하기로 하고.”
“네? 아, 아뇨. 괜찮아요, 아가씨. 저는 이미 아가씨에게 아레이유를 받은, 지, 라.......”
“내가 주는 건 싫어?”
“아뇨. 감사합니다.”
바로 꼬리 내렸다. 어차피 사양할 필요도 없고.
한 순간 테레제, 눈에서 빛이 사라진 게 무진장 무서웠다.
그 뭐냐, 세실리아도 꿈을 꿨다면서 옛날에 말했었지. 에드윈을 감금조교하려고 이클리시아 멸망시키고 여왕이 되어버렸었다고.
꿈 이야기라지만, 이 아가씨라면 진짜 저지를 것 같아서 가끔 섬찟섬찟하다고 할까.
그렇게 안 되도록 잘 보필해야지.
“이런 형태의 칼이 좋아?”
“실은 잘 안 부러지고 날카롭기만 하면 뭐든지 좋아요.”
아무리 검이 소모품이라지만, 판타지틱한 세상이니까 아레이유 같은 칼이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특수능력을 쓰지 못한다고 해도, 강철 갑옷을 베어 가른다던가, 상당히 험하게 굴리긴 했는데 여태 칼날에 이 한 번 빠진 적이 없었다.
기왕 검이 생긴다면 아레이유 같은 칼이 좋겠다. 형태는 그다지 신경 안 쓰니까.
“그래. 그리고 또 권총 같은 건 어때?”
“권총, 말씀이신가요?”
“아니다. 물어볼 것도 없었네. 이건 네 호불호랑 관련 없이 한 자루 챙겨 다니는 게 좋겠어.”
확실히 이번 전투 때 권총이라도 한 자루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마력 장벽을 쓸 줄 아는 마법사 상대로는 별 쓸모도 없는 무기긴 하다.
나는 이미 마법사 상대로는 적 마법 공격에 대한 압도적인 방어력과. 적 마법 방어력에 대한 절대적인 관통력이 보장된 탓에, 상대의 마법을 대충 몸으로 막고 무지성으로 냅다 직선으로 달려가서 베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가장 효율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지팡이 대신 총을 든 다수의 적 상대로는 이게 어려웠다.
총구 보고 사선 피하는 것도 적 숫자가 하나나 둘, 그것도 단발총이 상대일 때의 이야기다.
이번처럼 기관총이 상대라면 탄환세례 앞으로 돌격하다 벌집핏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다행히 제레미가 견제로 숫자를 둘이나 줄여주었고, 특제 방탄 메이드복 덕분에 인디언밥으로 끝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팔이 부러지지 않았나.
확실히 권총이 있다면 견제에 도움이 될 테지. 총구를 잠시 돌리게 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마력 장벽을 쓸 줄 아는데 총을 드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견제력도 충분할 테고.
물론 평소 상황에선 그냥 무지성 돌격이 더 효율적이겠지만.
그나저나 왜 선물을 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처럼 이러실까.
“뭔가 어렵네.”
“네?”
“여자아이라면 보통 이런 화약냄새 짙은 이야기는 잘 안 하지 않나 싶어서. 보통 어느 회사의 화장품이 갖고 싶다던가, 어떤 보석이 박힌 반지나 목걸이가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텐데.”
보통 안 하지.
“아, 아하하.”
“갖고 싶어? 사줄게.”
“아뇨, 딱히.”
“열흘 붉은 꽃 없다더라고. 코넬리아도 관리하지 않으면 망가질 거야.”
“그러는 아가씨께서도 화장을 꺼리시는 편이잖아요.”
“그렇네. 주인이 먼저 본을 보여야 했구나. 메이드는 주인을 닮는다더라. 그런 거지?”
“아뇨,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딱히 필요 없지 않나 싶은데.
이런 동네니까, 다 잘 숨어놓고 화장품 냄새로 추적당할 것 같아서 무섭다.
지금 안 그래도 투명인간 느낌이 딱 좋은데.
“그냥 월급 받을래?”
“네?”
“왜 놀라는 거야? 여태 노예처럼 무급으로 일한 게 이상한 거야.”
“여태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못했었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주인님 카드로 긁아니지. 뭔가 제 돈이 아가씨 돈이고 아가씨 돈이 제 돈이라는 느낌이라서.”
카드라는 말이 튀어나오긴 했는데, 이 동네에 카드는 없다.
그냥 여태 몇 번 일하러 나갈 때 필요할 때 부족함 없이 쓰라고 받은 돈이 엄청 귀족적이라 무진장 많아서, 아직까지도 다 쓰지 못했을 뿐이다.
돌려주는 것도 뭐해서, 용돈 카드 같은 느낌으로 쓰고 있었지.
애초에 평소에는 혼자서 뭔가를 사러 나갈 틈도 없고.
“뭔가 굉장히 깜찍하게 괘씸하네, 그거.”
“네? 그, 그래도 전 꼭 필요한 것만 샀어요!”
“알아.”
그나저나 월급이라.
솔직히 필요 없을 거 같긴 하다.
잘 곳 주지, 밥 주지, 공적인 일에 필요한 건 전부 사주시지.
방금도 말했지만, 혼자서는 뭔가 살 틈도 없고. 가족이 있어서 생활비를 부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 주문이라도 있으면 취미생활이나 하나 잡아서 뭘 사든 사볼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럼 만약 퇴직하게 되면, 퇴직금으로 주세요.”
“어? 퇴직할거야?”
왜 안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물론 안 할 거긴 한데. 그.
처음에 그랬었잖아. 퇴직하거나 졸업할 때 되면 팔찌 풀어서 남자로 되돌아가면 된다고.
그런 계약 아니었었나.
아니 근데 이 눈은 진짜로 놀란 눈인데.
“마, 말해두지만 사표 절대 받아줄 생각 없어.”
“저도 사표 낼 생각 없지만, 그. 있잖아요. 제 일은 자주 다치는 일이잖아요?”
나는 깁스를 한 왼팔을 위아래로 슬쩍슬쩍 흔들어보였다.
테레제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회복 마법도 안 들으니까, 자칫하다간 금방 더 쓰일 구석 없을 만큼 망가지게 될지 몰라요.”
“.......”
“그럼 퇴직해야죠, 뭐. 퇴직금 받아서 어디 구석진 땅 사서.... 아가씨?”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냥 현실적인 이야기에요.”
“내가 네 팔다리가 다 잘려나간다고나 해서 헌 옷 버리듯 버릴 것 같아!?”
화난 얼굴이다.
뭔가 잘못 말한 모양이네.
테레제는 현실적인 아이니까, 대충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아가씨.”
“됐어. 너는 내가 책임져. 진짜로 이유가 있어서 퇴직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망가졌으니 퇴직하겠다고? 웃기지 마. 그런 이유로는 절대 안 돼!”
역시 복지가 잘 되어 있단 말이야.
나라도 더 할 말은 없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네요. 아가씨께선 제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으시다는 것 같고. 그럼 팔다리 다 잘려나갈 때까지 열심히 일해보도록 할게요.”
“그 농담, 재미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살벌해라, 살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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