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제안
* * *
일주일 정도는 병상 신세를 져야할 판이었다.
판타지틱한 약에 더해서
내 손으로 걸자 치유마법! 나도 테레제도 정말 좋아하는 치유마법!
치유!
......어쨌거나, 최근 들어서 크게 다치는 일이 잦았다.
글로리아에게 상급 치유마법이라도 배워두는 게 좋지 않을까.
팔 부러지고 총에 맞고, 솔직하게 말해서 생전과 비교하자면 일주일도 굉장히 빨리 완치하는 셈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말이지.
이 동네 사람들은 설령 팔다리가 다 잘려나가도 살아만 있으면, 그리고 돈만 있으면, 판타지 파워의 힘으로 얼마든지 하루 만에 회복할 수 있는데 나만 그게 안되는 거니까.
뭔가 조금 아쉽다고 할까.
“무슨 일 있나?”
갑작스레 찾아온 휴가를,
아니네. 그냥 병가구나.
하여간에 갑작스레 찾아온 병가를 즐기고 있던 중에, 창밖에서 뭔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났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살짝 내려놓고, 살짝 몸을 일으켜서 창문 밖을 보았다.
누군가 했더니, 유르덴 공작 디트리히였다.
유르덴 공작은 이클리시아에서 재상직을 맡은 탓에 집에 잘 돌아오지 않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내가 테레제와 학원에 가기 전 몇 년 정도 유르덴 가문에서 일하고 배우는 동안, 먼발치에서나마 공작 씨의 얼굴을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에,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었다.
그런데 최근 자주 보네.
이번 달엔 이미 테레제와 에드윈 사이의 트러블로 한 번 봤었다.
“별일 아니겠지.”
나는 창문에서 얼굴을 떼고, 다시 편하게 침대에 누웠다.
비록 노른데아셀 학교의 기숙사 침대만큼 편하고 푹신한 침대는 아니었지만, 이 침대는 오직 나만을 위한 개인실의 침대였다.
물론 테레제와 같은 기숙사를 쓰는 것이 싫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래도 가끔은 이런 조용하고 고즈넉한 퍼스널 스페이스가 그리워진단 말이지.
이렇게 햇살 따스한 대낮에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늘어지게 잘 수 있는 공간 말이야.
나는 살짝 내려놓았던 책에 책갈피를 물려 아예 덮었다.
그런 뒤에 침대 옆의 탁자에 대충 던져놓고, 기숙사의 것보다는 조금 부족해도 충분히 푹신한 이불을 끌어올렸다.
팔 하나로 몸을 다 덮으려니 좀 손이 많이 가긴 하네.
“낮잠이다”
이불에 얼굴 파묻었다. 몰라 이젠 잘 거야.
솔직히 졸린 건 아니었다. 그냥 낮잠을 자며 빈둥거리고 싶었다.
낮잠 잔 지 3억년은 지난 느낌이니까.
아. 이틀 전에 총 맞고 기절한 것도 낮잠으로 쳐야할까.
“코넬리아!”
덜컹, 하고 누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도 일부러 안 잠그긴 했는데, 너무 박력 넘치는 거 아닐까.
노크는 좀 하던가.
목소리를 듣자 하니 끝끝내 유르덴의 팔러 메이드가 된 리리아네트의 목소리였다.
“자, 자고 있어?! 어, 어어어어어쩌지.”
“......자려던 참이었어요.”
“다행이다아!! 일어나! 어어서어서 일어나!!”
“무슨 일인데요?”
어차피 졸린 것도 아니었고, 빈둥거려보겠다고 억지로 자려던 참이었으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긁힐 일은 아니었다.근데 어쩐지 사적인 일이 아닐 것 같다는 게 조금 그렇다고나 할까.
“주인님이 부르셔! 어서 준비해!!”
“주인님? 유르덴 공작님 말씀이신가요?”
“아, 맞아맞아! 그러고보니 코넬리아의 주인님은 테레제 아가씨였지.”
“빨리 준비할게요. 그런데 무슨 일이래요?”
“몰라! 너 어서 불러오래!”
왜 저렇게 급할까.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자꾸만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대충 침대에서 빠져나와 옷장에서 검은 원피스를 꺼냈다.
그런데 리리아네트가 방에서 안 나갔다.
“좀 나가주시면 좋겠는데요.”
“왜? 왜에? 여자끼리 좀 볼 수도 있지. 아니, 그것보다 진짜 급하니까! 네가 방에서 나가서 주인님 집무실에 갈 때까지 내가 감시해야 한다니까!”
“......에휴.”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한숨 한 번 뱉고, 각오하고, 하늘하늘한 잠옷을 벗었다.
그리고 재빨리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이거 혼자 벗고 입고 그럴 때는 머리 비우고 전혀 신경 안 쓰지만, 어쩐지 남이 보고 있으면 뭔가 진짜 부끄럽다니까.
“뭔가, 코넬리아.”
“네?”
“꽤 자라지 않았어?”
“물론 성장기니까 자라긴 자라겠죠.”
근데 별로 안 자랐는데.
나는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고 거울에 보이는 내 모습에 대고 슥슥 선을 그어보았다.
그대로인데. 진짜 더럽게 안 자란다.
여자아이는 빨리 성장한다던가, 그런 거 옛날에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니, 키 말고 가슴이.”
“뭐요?”
실수. 말투가 뭔가 시비 거는 말투가 되어버렸다.
거울을 다시 똑바로 보았다. 아직 원피스 뒷 지퍼 안 잠가서 앞가슴이 다 비춰졌다.
붕대에 휘감긴.
아니, 자라고 자시고, 나는 지금 맨살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붕대를 감고 있는데, 뭐가 얼마나 어떻게 되었는지 잘도 알아본다 싶었다.
“이거 보고 뭐 차이가 느껴지긴 해요?”
“뭔가 붕대 아래서부터 벌써 볼륨감이 다른데.......”
“그, 래요?”
“아, 아냐! 이럴 때가 아냐! 어서 갈아입고 가자!!”
재빨리 마무리짓고, 앞치마를 걸쳤다.
그리고 한시가 급한 리리아네트를 따라 바로 며칠 전에 갔던 집무실에 들어섰다.
테레제는 보이지 않았다. 유르덴 공작과, 유르덴 공작부인, 그리고 글로리아까지 셋뿐이었다.
유르덴 공작이나 글로리아는 그렇다쳐도, 유르덴 공작부인은 상당히 의외였다.
저번과는 다르게, 유르덴 내외는 이전에 나와 테레제가 앉아있던 탁자 쪽에 앉아있었고, 유르덴 공작의 책상은 비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좋은 점심입니다. 테레제 아가씨의 메이드, 코넬리아입니다. 공작님과 공작부인 두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로구나!!”
대답이 돌아온 건 공작부인 쪽이었다.
공작부인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잔걸음으로 달려와 나를 품에 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당황하고있었는데, 마치 어머니처럼 나의 등을 토닥토닥해주는 게 꽤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말없이 그냥 받고 말았다.
......응석 부렸다고 말해도 할 말 없겠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부인은 포옹을 풀고 무릎을 숙여서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그리고 이번엔 깁스한 내 팔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저, 저기. 부인. 자꾸 그러시면 제가 곤란해요.......”
“받아다오, 코넬리아. 그이는 네가 테레제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그토록 고마운 모양이니.”
“아.”
“아팠지? 많이 아팠지?”
“아뇨. 괜찮아요. 이 정도는 가뿐합니다.”
“너나 테레제나 아직 아이란다. 이런 일을 당해선 안 될 텐데. 흐윽.”
“글로리아. 내 아내가 감정이 많이 격해진 모양이야. 데려가서 좀 쉬게 하는 게 좋겠어.”
“네.”
글로리아가 다가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공작부인을 부축했다.
그리고 공작부인과 함께 집무실에서 퇴장했다.
뭔가 폭풍처럼 감사를 받았는데, 뭔가 그 감사의 단맛을 곱씹어 보기도 전에 순식간에 공작과 단 둘이 되었다.
어색하네.
“나도 아버지로서, 네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구나.”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꽤 많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틀림없이 잘 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칭찬받아야 할 일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곤 하지. 세상 일이란 본래 할 일 이상으로 잘해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받은 급료 이상으로는 일하지 않는다던가.
대충 그런 사상인 걸까.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까하고 잠시 생각하는 사이, 유르덴 공작은 곧바로 내게 말했다.
“고맙다, 코넬리아.”
“......말씀만으로도 분에 겨울 정도로 황송합니다.”
“말씀뿐이겠나.”
“네?”
물리적인 보상이 있다는 뜻이려나.
생각지도 못했던 탓에,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말할 것도 없지만, 윗사람에게 그다지 보이기에 좋은 모습은 아니다.
“유르덴킬라이나에는 남는 땅이 꽤 있지. 나는 기름진 땅 한 조각을 그대에게 줄 생각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원하는 성씨를 하나 만들어, 남작이라고 자칭하고 다녀도 좋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귀족이 된다, 그 말인가?
남작이면 시골 이장 급의 최하위 귀족이긴 하지만, 확실히 귀족은 귀족이다.
이거, 기뻐해야하는 거 맞겠지?
그럼 이제부턴 메이드가 아니라 시녀가 되는 거려나.
이미 메이드라기보다는 시녀 같은 생활을 하고 있긴 한데.
그럼, 말이지.
“......그, 죄송합니다.”
“음? 말해보게.”
“저는 테레제 아가씨를 섬기는 데 열과 성을 다하고 싶기에, 영지니 작위니 하는 것은 조금 번잡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한 생리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도 없기에.......”
“귀족이 되고 싶지 않은가?”
“말씀드렸다시피, 아가씨를 섬기는 것이 제 기쁨일 뿐입니다.”
“그런가. 하하. 그렇군.”
유르덴 공작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뭔가, 화나게 한 건 아니겠지.
거절한 이유는 말 그대로다.
나를 시험하는 걸지도 몰라하는 생각이 아주 조금 있기야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냥 귀족이니 뭐니 다 귀찮아서 그랬을 뿐이다.
“아무래도 그대는 메이드보다는 군인 체질이었던 모양이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칭찬 맞네. 테레제에게서 빼앗아서 기사단에 입단시키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야.”
“예?”
“빼앗아? 절대 안 돼요. 내 거니까. 내가 믿는 코넬리아니까.”
저번에 유르덴 공작이 앉아있던 책상 아래에서 테레제가 기어나왔다.
놀랐다.
마법도 뭣도 없이 그냥 아이처럼 숨어있었다. 내가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다.
신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진짜로 시험하는 거였냐아아아
“농담이야. 이 아버지는 이미 인재가 많으니까.”
“표정 풀고 말해주세요.”
싸우는 거 아니겠지......?
아니, 뭐. 사춘기의 딸과 아버지는 자주 싸운다고 하니까?
신경줄 닳는 소리 들리는 거 같다.
진짜 이런 거 안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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