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37화 (37/100)

〈 37화 〉 사과는 달콤하더라

* * *

아레이유를 뽑아내자, 문득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군번줄이었다. 나는 팔을 뻗어서, 붉은 비늘의 목에 걸린 군번줄을 뜯어내었다.

성씨, 이름, 이니셜, 군번, 혈액형 등, 모든 부분이 강판 같은 것에 갈려 있었다.

갈리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은 딱 하나, 종교 부분이었다.

모르탈리온.

아무래도 사냥의 신 모르탈리오스를 신봉하던 모양이었다.

그리 널리 퍼진 신앙은 아니다만.

“......미련 갖기는.”

아쉽게도, 나는 모르탈리오스 신봉자들을 위해 명복을 빌어주는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장례의식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

그거야 시체 수습한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쓸데없이 자꾸만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감히 우리 대장님을......!!”

“자, 잠깐! 지금은 빠지는 편이­”

“닥쳐!”

길을 막은 거대 박격포를 피해 빙 돌아온 세 명의 반룡이 죽은 동료의 시체를 보고 뭐라뭐라 소리치더니, 한 놈이 냅다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나는 축 늘어진 붉은 비늘을 고기방패로 쓰려다가 그만두고 주인 잃은 기계태엽 말에 올라타, 총구를 피해서 사선으로 달렸다.

후퇴를 종용하던 나머지 둘도 혀를 차더니 내게 총구를 겨누었다.

“이 개자식들아! 숙녀가 탄 마차에 대체 무슨 짓이냐!!”

“컥?!”

타다당. 총탄이 날아와 세 반룡 가운데 하나를 꿰뚫어 낙마시켰다.

고개를 살짝 돌려 총탄이 날아온 곳을 확인했다.

어느새 차에서 탈출한 제레미가 코피를 줄줄 흘리며, 걸레짝이 된 차를 엄폐물로 삼아서 몸을 의탁하고서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총도 있었으면서 왜 이렇게 늦어, 라고 투정을 부리려다가, 제레미의 옆에 테레제가 숨어있는 걸 보고서 그만두었다.

아까 전에 박격포를 소환할 때엔 엄폐물 하나 없는 평원에 대놓고 뛰쳐나와있었다. 그러니까 테레제를 끌고 돌아와 몸을 숨기느라고 도움이 늦은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해해줄 수 있어.

“뭐, 뭐야. 증원?! 크악!?”

반룡 하나가 크게 당황한다.

그리고 총구를 제레미 쪽으로 돌리려다 총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진다.

마지막 하나는 정말로 열이 머리 끝까지 올랐는지 동료가 죽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방아쇠만 당길 뿐이었다.

그리고, 철컥. 탄띠의 마지막 탄피가 튀어오른다. 거칠게 당겨진 노리쇠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놈은 텅 빈 기관총을 냅다 버리고, 말 허리에서 소총을 꺼내들려 했다.

소총을 꺼내려고 고개를 숙이려다가 제레미가 쏜 총탄을 이마에 맞아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잠시 움찔하기만 할 뿐 자기가 총을 맞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듯 말 허리에서 총을 찾았다.

하지만, 안 되지. 늦었어.

크게 사선을 긋던 말에서 뛰어내려, 곧바로 마지막 남은 반룡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단번에 도약하여, 허리를 굽혀 말허리의 소총을 찾느라 바쁜 반룡의 뒤통수에 니킥을 박았다.

“커, 억......!?”

“미안하게 됐어.”

뒤통수가 아니라 안면이었다.

니킥이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뭔가 불길한 거라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서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린 탓이었다.

우드득, 하고 안면에서 나기엔 너무 불길한 소리와 함께 반룡은 말허리에 허리를 굽힌 채로 추욱 늘어졌다가, 흘러내리듯 힘없이 말에서 떨어졌다.

겨우 찾아낸 소총이 그의 손에서 힘 없이 풀밭에 떨어진다.

“으, 아아.......”

신음소리. 어딘가 불길함이 느껴져서 슬쩍 고개를 돌렸더니, 아까 제레미의 총에 맞아 낙마한 반룡 가운데 하나가 피웅덩이 속에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총 총구를 내게 겨누고 있었다.

만약 폭탄이었더라면 위험했겠다.

“주, 죽어.”

탕, 탕.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도, 총알은 아무것도 맞추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아갔다.

반룡은 방아쇠를 더 당길 힘을 잃어버렸는지 조용히 염병할­하고 중얼거리더니, 덜덜 떨리던 손에서 권총을 툭 떨어트렸다.

“이긴..., 거지?”

“자, 잠깐만요, 아가씨. 아직 모르니까 나가면­”

“코넬리아! 코넬리아아아!!”

엄폐물로 삼던 차에서 뛰쳐나온 테레제가 내게 달려왔다.

나로서도 말리고 싶긴 한데, 전투가 끝나서인지 힘이 쭉 빠져서 목소리가 안 나왔다.

정말로 아일린과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때보다는 덜 다친 것 같긴 한데.

“코넬리아아아.......”

내게 달려든 테레제가 가슴팍에 뛰어들 듯 안겨들었다.

눈물콧물 다 흘리면서 누구 초상이라도 난 듯 서럽게 우는데,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파서.

뭔가 싸움이 끝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온몸이 비명을 질러왔다.

뭔가 멍석에 말려서 죽을 때까지 얻어맞은 사람들이 이런 느낌일까.

물론 총 맞은 자리마다 구멍이 생기진 않았어도 시퍼렇게 멍이 들었거나 살이 터졌을 텐데, 이게 안 아프면 물론 이상하겠지.

왼팔은 아예 움직일 생각도 안 하고.

그래도 시설에서 여러 가지 처치를 당한 보람이 있다고 해야할까.

일반인이라면 지금쯤 땅을 뒹굴면서 비명도 못 지르는 채로 끙끙대고 있지 않았을까?

“흑, 흐으윽. 이게 대체 뭐야. 피투성이잖아. 피투성이잖아아.......”

“아가씨가 멀쩡하면 됐어요.”

“흐아아아아아아앙......!”

좀 떨어져주라.

내 품에 얼굴 비비는 건 좋은데, 비빌 때마다 테레제 얼굴에 피가 묻어났다.

아마 붉은 비늘을 마무리할 때 튄 피인 거 같은데.

그거 지지야지지.

“피 묻어요, 아가씨.”

“괜찮아. 코넬리아. 나는 괜찮으니까.......”

“그리고 아파요.”

가슴에 언제 총 맞은 지 모르겠는데, 더럽게 아프다.

내겐 멍든 자리를 이렇게 꾹꾹 누르면서 행복해하는 마조히스트스러운 취미는 없다.

테레제는 내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떼었다.

눈물은 여전히 흐르는 채였지만, 코를 킁, 훌쩍, 하고 마시면서 내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귀엽다.

얼굴에 피가 잔뜩 묻었어도 귀엽다.

“미, 미안해.”

“괜찮아요. 아마도.......”

/

“일어났어?”

눈을 뜨니 유르덴 본가의 자그마한 내 방이었다.

여차저차 헤르게모스 왕국의 역까지 가서 유르덴 령에 되돌아온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유르덴 령의 역에서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래도 깜빡 졸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눈을 뜨자마자 테레제가 보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이번에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데다가, 우리 아가씨는 자기 것에 한해서라면 한없이 물러지니, 자기 대신 상처 입은 메이드를 위한 보상으로 간병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테레제가 메이드 복을 입고 있었다.

어어.

왜?

아니, 뭐. 풋풋하니 이쁘고 무진장 귀엽긴 한데.

“......아가씨?”

“응. 오늘 하루 코넬리아 아가씨를 보필하게 된 테레제라고 해.”

“아가씨???”

“테레제라고 불러도 괜찮은데.”

이게, 그게.

그러니까.

귀족 꼬맹이의 소꿉놀이 같은 감성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이상하진 않은 것 같지만?

“혼날 거예요.”

“누가 혼내는데요?”

다른 목소리. 글로리아였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와 테레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저. 저년 보게.

자기가 섬기는 가문의 귀한 아가씨에게 하녀복을 입혀놓고 실실 웃는 것 좀 보라지.

미쳤네. 안 말리고 뭐 하는 거야?

그래. 응. 너. 뭘 웃고 그래.

좀 최고야.

“그런 건가요?”

“응? 뭐가?”

“아뇨. 생각해보니 테레제는 하녀인데 말이 좀 짧다 싶어서요. 어디 다시 자기소개 해보시지 않을래요?”

“어? 어어......?”

“자. 리피트 애프터 미. ‘오늘 하루 코넬리아 아가씨를 보필하게 된 테레제입니다. 아가씨께선 부디 저를 테레제­라고 불러주셨으면 해요.’”

“응? 그게. 그러니까.”

테레제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물론 나는 테레제의 얼굴을 즐기기 전에 글로리아의 얼굴부터 보았다.

여전히 실실 웃는 얼굴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거지. 좋아.

“오늘 하루 코넬리아 아가씨의 곁을 보필하게 된 테레제라고 합니다. 아가씨께선 부디 저를 테레제­라고 불러주셨으면 해요.”

“고마워요.”

“기쁘세요?”

“네. 엄청 기뻐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자자, 테레제. 준비한 게 있었잖아요?”

갑자기 글로리아가 그런 말을 했다.

테레제가 응, 하고 짧게 글로리아에게 대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뭔가를 들고 돌아왔다.

그 사이에 나는 내 몸 상태를 잠깐 점검했는데, 아무래도 미이라같은 신세인 모양이었다.

“여기, 과일 드세요.”

깎은 사과를 올린 접시였다.

토끼처럼 귀엽게 귀를 세운 사과였다.

혹시나 싶어서 슬쩍 테레제의 손가락을 보았는데, 상처가 보이진 않았다.

다행이네.

남에게 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시키더라도 테레제가 다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상처가 났지만, 치료 마법으로 회복시켰다는 가능성도 있다만.

나는 이불 아래 내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았다.

딱히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지진 않았다.

상처를 공유하니까, 만약 상처가 났더라면 테레제가 나았더라도 내겐 상처가 남았을 것이다.

“테레제 양은 처음인데도 잘 깎더라고요.”

“아까부터 자꾸 왜 그러는 거야, 글로리아아. 아무리 봐도 각지고 삐뚤빼뚤하잖아아.......”

“그렇지 않아요. 확실히 잘 깎으셨네요. 잘 먹을게요, 테레제 양.”

빈말이 아니라, 처음 깎는 건데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테레제가 저러는 건 분명 지금 비교대상을 내가 깎은 사과로 삼고 있어서 그런 거다.

“포크가 없는데요.”

“아뇨, 아뇨. 아니지. 그게 아녜요.”

“맞아. 코넬리아는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아.”

테레제가 자기가 들고 있던 은제 포크로 사과 토끼를 찔러, 내게 향했다.

이거 그거지.

아앙­인가 뭔가 그거지.

아니, 설마 사과 갖고 이런 거 하면 제가 좋아하실 줄 아셨다면 크나큰 오예입니다.

“자, 잘 먹을 게요.”

“꼭꼭 씹어 드세요.”

사과를 받아먹었다. 맛있다. 달다. 상큼하다.

아.

직업 만족도 올라가는 소리 들린다. 최고야.

“맛있어?”

“네. 아가씨의 정성과 애정이 느껴져서 최고에요.”

“어머. 테레제겠지요?”

글로리아가 딴죽을 넣었다.

아니, 아니. 그거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맞아요. 꼭꼭 테레제라고 불러주세요.”

“이젠 조금 부담 되는데요.......”

“그래? 그럼­”

“아뇨. 안 됩니다, 테레제. 오늘 하루 메이드가 되기로 하셨지요? 제가 안 된다고 그렇게 거듭 말씀하셨는데도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말씀하셨었지요? 그러면 매듭을 지어야 하겠지요?”

글로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으, 하지만 코넬리아가 부담된다는 걸.”

“고작 부담으로 끝내서야 되겠습니까? 배에 구멍이라도 내보죠.”

젠장, 당했다.

벌써 위에 구멍이 날 거 같아.......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