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35화 (35/100)

〈 35화 〉 헤르게모스 공국

* * *

아르덴킬라이나 주에 위치한 헤르게모스 공국이 몰락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유가 뭔가 하니, 헤르게모스 공작은 대대로 순수한 가문의 피를 지키겠다며 대대로 한 엘프 부족의 공주와 결혼했다는데, 대에 대를 거듭하다 보니 끝내 최근 대에서 뭔가 크게 유전병이 터진 모양이었다.

피에 대한 집착이 장난이 아닌지라 그럴듯한 방계도 없었던 모양이고, 있었다고 한들 엘프의 피를 이은 만큼 가주가 항상 하프 엘프였던지라,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젠 너무 머나먼 피가 되었다는 듯하다.

“잠깐. ‘한 엘프 부족’의 공주가 아니라, 한 ‘엘프 부족의 공주’야.”

“네? 뭐가 다른......? 어. 아니, 설마.......”

“엘프 부족의 어떤 공주­ 그러니까, 3천 년 내내 일족의 모든 남자가 대에 대를 이어오며 단 한 명의 엘프 공주와 결혼했다고. 즉 고조할머니이자 증조할머니이자 할머니이자 어머니이자 아내라는 느낌이겠네.”

“와, 와아아.......”

“심지어 그 공주님께서 회임하시면 태반에 마법을 걸어서 반드시 아들만이 태어나도록 만들 정도였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병이 안 생길 수가 없었겠지.”

이게, 판타지?

내가 알던 판타지란, 대체......?

“피를 이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고, 저번 주엔 그 공주님까지도 자살했다는 듯해. 이젠 여기저기서 우리 같은 하이에나들이 버려진 시체에 남은 고기가 없나 싶어 몰려들 뿐이지.”

“그, 렇겠네요.”

사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뭐라 대답도 잘 나오지 않았다.

엘프 공주님과 근친을 거듭하며 대를 잇는 것에 대해서 나름 이해해 볼 수 있으려던 참인데 그 결말이 고작 공주님의 자살이라니.

테레제가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오히려 더 얼얼했다.

생각지도 못한 스트레이트 펀치가 턱에 꽂힌 느낌이었다.

“그. 이번 일과 비슷한 일이 자주 발생하나요?”

“응?”

테레제는 나를 슬쩍 보더니 내가 이상하다는 듯, 내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가, 갑자기 이해했다는 듯 장난기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경 쓰이니?”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코넬리아 어쩌면 너도 언젠간 아이를 낳게 될지도 모르잖아.”

잠깐.

잠깐만.

대체 왜 거기까지 이야기가 흘러가는 거지.

“농담이야, 농담! 코넬리아는 나랑 평생 같이 살자. 나도 누구랑 결혼하긴 글러먹은 모양이고. 앞으로도 쭈욱 잘해줄 테니까 이렇게 평생 같이 살자. 어때?”

“아가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물론 불만은 없습니다만.”

“뭐야. 미적지근한 반응이네.”

“조금, 뭐라고 해야 좋으려나.”

테레제가 볼을 부풀렸다.

이야기가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도무지 종잡기 힘들었지만, 이거 대답 잘못했다가는 테레제가 삐져버린다는 건 잘 알았다.

“문득 생각해보니까, 시설 있을 적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오래오래 산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것 같아서요.”

“......아.”

어떠냐. 회심의 반격이다.

테레제는 으, 하고 짧게 신음소리를 흘리더니, 부풀린 볼 그대로 시선을 돌리고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해.”

“아녜요. 생각해보니까 아가씨랑 평생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 이외의 방법도 모르고.”

“......진짜 미안해.”

“정말 괜찮아요. 저를 더 무안하게 하진 말아주세요.”

이긴 것 같아서 기분은 좋은데, 분위기가 그다지 좋진 않네.

화제를 돌리는 편이 좋겠어­하고 생각하고 있자니 테레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여간에 아까 질문에 대답하자면,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야. 그래도 한 세기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구설수가 생긴다는 것 같으니, 그걸 생각해보면 그렇게 또 드문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아가씨의 말씀을 듣다 보면, 역시 상식 부족을 체감하게 되네요.”

“원래 조금 멍청한 편이 귀여우니까 괜찮아.”

“저 삐질 거 같은데요.”

“그래, 그래. 미안해.”

끼이익, 하고 엔진이 멈추는 소리가 났다.

운전석과 승객석을 나누는 벽의 쪽창문이 열리고, 정복 차림의 운전수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우로라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 장교였는데, 빳빳한 정복으로 덮었음에도 전혀 숨겨지지 않은 육감적이고 폭력적인 가슴과, 역으로 정복의 벨트로 세게 조여져 몹시 잘록한 허리의 대비가 굉장히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달콤한 미성을 남기고, 쪽창문이 닫혔다.

그리고 운전석의 문이 열리는 소리. 아우로라는 차의 뒤를 빙 돌아와 바깥에서 승객석의 문을 열고, 테레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은 여성의 에스코트였지만, 테레제는 말없이 운전수의 손을 받았다.

여성이기 이전에 군인이었기에.

다만 어딘가, 내 눈에는 평범한 군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편견이라고 반박해도 할 말은 없지만, 어딘가 군인이라기보다는, 글쎄.

그만 생각하자. 편견은 좋지 않다.

“이쪽으로.”

아우로라의 안내를 따라 잔디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여기저기 흙과 잔디로 덮어 언덕처럼 만든 반원형의 구조물이 굉장히 많았다.

생전에도 비슷한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무기고나 탄약고 같은 것이겠지.

병사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새 군 시설 내부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법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길 맞은편에서 한 배불뚝이 중년 남성이 아우로라와 비슷한 타입의 육감적인 여성 장교 둘을 좌우에 끼고서 걸어왔다.

“충성! 전쟁의 총희를 모셔왔습니다.”

“오오, 오오오! 잘했다, 아우로라.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그만 가서 쉬도록.”

아우로라는 말없이 거수경례를 한 번 더 남기고 사라졌다.

편견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편견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지금 저 배불뚝이의 좌우에 낀 여성들에 비하면 훨씬 군인 같아서 오히려 편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또 들었다.

그리고 전쟁의 총희.

언제나처럼, 테레제와 나는 정체를 감추기 위한 수도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오오! 안녕하시오! 나는 비델레이트라 하오! 만나서 반갑소! 정말 반갑소!”

“만나서 반갑습니다.”

테레제는 짧게 대답하며 비델레이트의 악수를 받았다.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는 것도 그렇고, 장교를 사병처럼 끼고 있는 것도 그렇고, 어딘가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 남자였다.

“식사는 하셨소?”

“예로부터 헤르게모스 공국은 밀레네케 강에서 잡히는 민물고기 요리로 유명했었지요? 저는 특산 요리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어서어서 맛보지 않고서야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기에, 참을성 없게도 공국에 도착하자마자 식사하고 말았답니다.”

“오오! 오오! 잘 아시는구려! 예로부터 밀레네케 강이야말로 헤르게모니아 땅의 젖줄이었소. 엘프 창녀 따위가 아니라.”

비델레이트는 쯧, 하고 혀를 탁 차더니, 좌우에 낀 여자들에게 그만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식사가 아직이었더라면 우리 전쟁의 총희께 밀레네케 강의 강파도치 간 요리를 대접하리라 생각 중이었는데. 참 아쉽게 되었소.”

“생선의 간이 참 담백하더라고요. 맛있었습니다.”

“어허, 어허. 이미 드셨소? 참 잘 드셨소! 하지만, 어디서 먹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부대 취사병만큼 잘하지는 못할 거요. 다음에도 인연이 닿는다면, 꼭, 꼭! 공복으로 방문해주시오?”

“네에. 인연이 닿는다면.”

당연하지만, 테레제는 얼굴을 가리고 찾아간 곳에선 결코 음식을 대접받은 적이 없었다.

이 배불뚝이 장군이 과연 테레제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이러는 건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자자. 일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지.”

비델레이트가 발을 멈추었다.

유난히도 큰 무기고였다.

그가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두꺼운 철문에 걸린 자물쇠를 열었다.

창고 안에는 오랜 세월 쓰이지 않은 무기가 한가득이었다.

그래도 나름 팔기 위해서 정비를 한 번 했는지, 먼지가 두껍게 쌓인 바닥에 군화가 오고 간 흔적이 바쁘게 남아 있었다.

“꽤 많네요.”

“가르나 G4 단기병총이 700정, G42 돌격소총이 242정, G7 경기관총이 32정, 보레가 74년형 88mm 박격포가 17문 등등, 뭐 잡다한 거 많고, 다 좋지만 제일 굉장한 건 바로 이거요.”

비델레이트가 팔을 넓게 벌렸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박격포 두 문이 서있었다.

단 두 문만으로 탄약고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녀석이었다.

“보레가 99년형 245mm 박격포 보레오가 카르칸! 이 강철의 거신이야말로 전쟁의 지배자요, 전선의 파괴자지!”

“확실히 귀한 물건이네요. 평온한 아르덴킬라이나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하하! 내가 내 주머니 속의 것보다 커다랗다 인정하는 녀석은 오직 이 녀석 카르칸 뿐이요!”

이 수퇘지 놈이 도대체 테레제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이 카르칸을 두 문 다 구매하는 사람에게 이 창고에 있는 나머지 무기들을 헐값에 전부 넘길 생각이오. 탄약과 포탄도 덤으로 쳐서 다 넘기지. 하지만 이 카르칸을 사지 않으려거든, 이 비델레이트는 아무것도 팔지 않겠소.”

수퇘지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이런 거대 무기는 솔직히 말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이미 생긴 것부터가 헤르게모스의 역대 군주들 중 누군가가 상술에 당해 비싸게 주고 샀지만, 쓸 데가 없어 창고에 방치되어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지 않나.

“좋아요. 창고에 있는 거, 전부 살게요.”

“진심이오?”

“쉬이 거짓을 말해서야 전쟁의 총애를 받을 수 있을까요?”

“허, 허허. 어허허. 좋소. 좋소! 아주 좋소! 다만, 운수비용은 우리 헤르게모스에서 부담할 수 없소. 알아두시길­”

테레제가 비델레이트를 지나쳐 카르칸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마치 마술처럼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법이지만.

“어, 어억!?”

“확실히 크긴 하네요. 그래도 이 정도라면.”

테레제가 다른 카르칸에도 손을 대었다.

그러다가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돌려 비델레이트에게 물었다.

“계산부터 할게요. 얼마일까요?”

“아, 아아. 그것이. 잠깐, 주판을 가져와야겠는데.”

“이미 다 계산해두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설마 무게라던가 여러 가지 이유를 트집 삼아 헤르게모스 운수업체를 이용하게 해서 마진을 뜯어낼 생각은 아니셨겠죠?”

“아, 아니오! 당연히 아니지! 으그긋. 그저 놀랐을 뿐이오. 놀랐을 뿐이오.......”

“어머. 잠시 장군을 의심할 뻔했네요.”

우리 아가씨 잘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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