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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34화 (34/100)

〈 34화 〉 결투 신청

* * *

파티가 끝난 이튿날. 테레제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등교했다.

비록 나와 글로리아, 그리고 유르덴 가문의 메이드들이 가득한 파티장이었으며, 어릴 적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테레제는 아직 낯선 사람을 굉장히 꺼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젯밤에 에드윈을 걷어차고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싱글이 된 테레제는 낯선 사람의 춤 신청을 거절할 수단도 방법도 없었다.

결국,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한 몸 상태로 춤 신청을 다 받아주었다.

어쩌면 에드윈과 완전히 선을 긋는다는 의미에서 꼭 필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냥 테레제가 미숙했던 것뿐인 것 같았다.

어느 선에서 거절하고, 어느 순간에 휴식을 취하고, 그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선을 긋는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그냥 다 받아준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힘들었으리라.

“여기 계셨네요.”

테레제가 수업을 듣는 동안, 나는 항상 그랬듯이 강의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젠 나름 사람들도 수업 듣는 주인을 위해 대기하는 메이드에 대해 적응한 모양이었다.

신기하게 보는 사람은 어린 신입생들 정도일까. 대부분은 소가 개를 보듯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지나치며 하는 말 들으니까 헥헥대며 주인을 기다리는 사냥개라는 것 같더라.

“찾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신가요?”

내게 말을 건 사람은 아일린을 대동한 세실리아였다.

이렇게, 나를 꼭 집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가끔 있기야 있었다.

대표적으로 에드윈의 기사인 오웨인.

저하께서 이걸 아가씨께 보내셨습니다­라며 제 주인님 몰래 찾아와서 뭔가를 건네곤 했었지.

그렇게 그가 가져다주는 물건은 보통 과자나 찻잎처럼 먹을 것들이었고, 나는 그런 물건들을 정말로 에드윈이 우리 주려고 보낸 물건이 아니라, 에드윈이 여러 이유로 오웨인에게 하사한 물건으로 추측했었다.

왜냐하면 유르덴 가문에서 이클리시아에 선물한 과자가 그대로 되돌아온 적이 있었거든.

자기 받을 바에야, 그냥 우리 줘서 약혼자 간의 소원함을 해소하려 했던 것 같은데, 한편으론 그 녀석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쓸데없는 오지랖이 둘 사이를 더욱 벌어지게 하는 데 일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그렇네. 하여간에.

“어제 일을 듣고, 꼭 유르덴 양을 만나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신가요.”

축하드립니다­라던가, 빈정대고 싶긴 하지만.

아일린 앞이라서 참았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주인님께서는 수업 중이셔서.”

“강인한 아이네요.”

비꼬는 건가.

참았더니 그렇게 시비를 걸어온다 그거지­하고 세실리아의 얼굴을 봤더니 감탄한 얼굴이었다.

꾸며낼 수 있을 만한 표정이 아니라서, 정말 진심으로 말한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진심이건 말건 듣는 사람에겐 비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

......아일린 덕분에 한 번 더 참았다.

“그럼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할게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수업이 끝날 무렵에 다시 찾아오셔도 늦진 않으실 겁니다.”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했지만, 갈 생각을 안 한다.

오히려 바로 내 옆에 딱 붙어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괴롭다. 그냥 소가 개 보듯 한 순간 딱 보고 지나치던 시선들이 2초 3초 길어지려니 괜히 더 신경 쓰이고 짜증났다.

복도가 넓어서 망정이지. 진짜, 이 여자가­

“좋은 검이네.”

아일린이 그런 말을 하며, 나와 세실리아 틈새에 끼어들었다.

세실리아는 아일린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가,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더니 군말 없이 한 발자국 크게 물러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벽을 기대고 섰다.

저런 눈치는 있으면서.......

“으, 응.”

“오래된 역사의 냄새가 나는걸. 분명 깊은 사연이 얽힌 검일 거야.”

“냄새라.”

“냄새라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들면, 보이지 않던 걸 볼 수 있게 된 거라고 이해해줘.”

“아니, 아니.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냐.”

지금 아레이유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명검이라 해도 나나 아일린의 손에서는 그냥 모양 그대로의 스틸레토로밖에 쓸 수 없지만.

“살짝 만져봐도 괜찮을까?”

“응?”

장난기 가득한 미소.

붕대가 여전히 눈동자 위를 칭칭 감고 있는 탓에 어떤 눈을 하고 있을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입가에 떠오른 미소만으로도 대충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대답해주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과자처럼 좋은 마음으로 양보해줄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라서.”

“어? 과자 그거 양보해준 거였었어?”

“응?”

“아, 뭐야아. 난 대체 지금 혼자서 몇 년 동안 철없는 짓이었었다고 후회하고 있던 거야?”

“후회하는 기색이나, 하다못해 미안하다는 기색이라도 띤 채로 말하는 게 어때?”

“지금 눈으로는 엄청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 네게 보여주지 못해서 정말 아쉽네.”

“비겁하게 그러기야?”

여전하네.

짧은 침묵.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빨리 너를 찾았어야만 했는데.

믿어줄 지도 모르겠고, 지금 와서 말해봐야 사족이나 다름없는 말이기에 하진 않겠지만, 나는 줄곧 나 사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니까.

“아, 맞아. 세실 덕분에 흉터는 지웠어.”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세실리아는 내 시선을 느끼더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예쁜 눈이라더라. 그치, 세실?”

“아, 으응. 설원을 닮은, 아름다운 눈이었어.”

“설원이라. 코넬리아는 기억하고 있으려나.”

“......밤하늘을 닮은 눈이었잖아.”

“아.”

지그시 마주하면, 반짝이는 눈빛이 마치 별빛이 떠오르는 듯하던 검은 눈동자.

짙은 까마귀 깃털색의 머리카락과 더불어, 활기찬 소녀에겐 그 무엇보다 어울리는 사랑스런 눈동자였었다.

“대단하네, 코넬리아. 그랬었어. 잊고 있었네, 나.”

“아니, 나야말로 미안해. 나는 그저.......”

“으응, 아냐. 나야말로 딱히 너를 시험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그. 조금 그렇네. 아하하.”

“그, 죄송해요. 아무래도 제 치료가 완벽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저는 그게, 아일린의 눈이 처음부터 하얀색이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어색한 분위기.

아일린은 쓰읍, 하고 숨을 한 번 고른 뒤에 이어 말했다.

“사실 이젠 내 얼굴이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나는 거울 보는 걸 싫어하는 아이였거든.”

“다들 그랬을걸. 약 탓에 매일 조금씩 변해가는데, 좋아하는 사람 별로 없었어.”

“그치만 1725번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어. 나는 나를 볼 시간에 남을 보려 했었으니까.”

아일린이 다시 손을 뻗었다.

길을 찾지 못하는 손이 나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었다.

형상을 손에 새기겠다는 듯, 천천히.

“세실이 말한 것도 있고, 코넬리아 네가 역시 1725번이었어.”

“......저번에는 믿지 못하더니.”

“딱 하나 명확하게 기억하던 것이 이렇게 생각지도 못할 만큼 부드럽게 바뀌어버렸는걸. 조금 거칠게, 얼굴 여기저기 흉터도 죽죽 그어진 멋진 남자가 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실망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게 되었어.”

“실망이라니. 조금 놀랐을 뿐이야. 대신에 이렇게 바뀐 걸 다시금 새겨보려 하고 있잖아. 혹시 삐지기라도 한 거야?”

그러면서 얼굴을 내게 가까이 했다.

마치 강아지처럼 내 머리카락에 코를 파묻기 직전까지 가져다대고서 킁, 킁, 하고 깊게 나의 체취를 받아들이려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말하려면 복잡해.”

“괜찮아.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종이 울렸다.

테레제는 입을 멈추고,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더 질끈 감았다.

많이 시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세실리아와 아일린으로부터 떨어져, 문 옆에 섰다.

아무리 세실리아가 테레제에게 용건이 있건 말건, 내가 세실리아나 아일린의 옆에 딱 붙어서 주인을 기다리는 건 테레제 보기에 그다지 보기에 좋지 않겠지.

그런데, 문 옆에 서는 순간 안쪽의 풍경이 슬쩍 보였다.

아무도 강의실에서 퇴장하려하지 않고, 두 소녀를 에워싼 채 구경하고 있었다.

“유르덴의 테레제!”

한쪽은 우리 아가씨.

다른 한쪽은 최근 자주 얼굴을 마주한 붉은 머리의 소녀 엘자 타레이아였으며, 테레제의 맞은 편에 서서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별로 좋진 않아. 나는 교수의 터부를 깨고 교실 내부로 뛰어들어갔다.

어쩌면 늦을, 지도.

“나, 타레이아의 엘자는 한 기사의 명예를 위해,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엘자는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을 벗어 테레제에게 내던졌다.

나는 거의 날 듯이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 팔을 뻗어서 테레제에게 날아드는 장갑을 대신 맞았다.

“......메이드?”

구경꾼들 중 누군가가 의문을 흘렸다.

물론 나도 이게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테레제가 바라는 행동이었다.

옛날부터 누가 결투를 신청할 것 같으면 대신 막아달라고 누누히 말했었다.

“한낱 메이드가 지금 무슨 짓입니까! 거기서 당장 비키세요!”

“아뇨, 코넬리아. 잘했어.”

“뭐? 설마, 당신. 메이드를 방패 삼아서 제 정당한 결투 신청을 무시할 생각입니까?!”

“네에. 타레이아 양. 저로서는 당신의 결투를 받아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런 무례한!”

“무례한 건 당신이네요. 하나, 당신은 스스로를 정당하다 말했으나, 저로서는 당신이 내세운 근거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망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하나, 당신은 타레이아 후작의 피를 잇는 유일한 후계자였지요. 만일 당신에게 불운한 일이 생긴다면, 유르덴 가문은 타레이아 가문에게 고개를 들 수 없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저는 당신이 기리고자 하는 그 ‘한 기사’에 대해서 정말로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저에게 신청하는 결투인데, 제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들이미는 것은 역시 무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 혓바닥이 길다 이거지.”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입 밖으로 꺼내면 타레이아의 언어적 명예에 관한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자기 할 말을 끝낸 테레제는 조용히 그럼, 하고 고개를 작게 숙인 뒤에 떠나갔다.

나는 곧바로 테레제의 뒤를 따랐다.

세실리아가 아가씨를 만나길 바랍니다­하고 말하려다가, 세실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테레제를 지나쳐 자기 절친인 엘자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저쪽도 고생한다고 해야할까.

업보 아니겠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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