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33화 (33/100)

〈 33화 〉 선언

* * *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났을까.

오래간만에, 그리고 몹시 갑작스럽게도 유르덴 본가에 돌아오게 되었다.

본가에 돌아오자마자 나와 테레제는 유르덴 저택에서 가장 커다란 방, 디트리히 유르덴, 즉 유르덴 공작의 집무실에 불려왔다.

유르덴 공작은 집무실 안쪽의 책상에 앉았고, 그의 좌우에는 글로리아와 듀오토가 서 있었다.

책상 앞에는 가신들과 함께 회의할 때나 쓰는 커다란 사각 탁자가 있었고, 그 텅 빈 커다란 탁자의 좌측에 테레제가 홀로 앉았다.

“편지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내가 잘못 읽었었나 싶었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물론 정확히 말해서 유르덴 공작에게 불려온 건 테레제 뿐이고, 나는 테레제의 우측 한 걸음 뒤쪽에서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지만.

과연 내가 들어가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테레제가 괜찮다고 했다.

오히려 테레제에게서 먼저 같이 들어와달라고 요청을 받았기에 들어온 거다.

나는 유르덴의 메이드가 아니라 테레제의 메이드였기에, 설령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끝까지 테레제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네가 죄송할 것은 없다.”

“아니요. 제가 에드윈 왕자의 마음을 붙잡아놓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아직도 그런 마음가짐을 놓지 못한 걸 죄송스럽다 여기거라.”

유르덴 공작이 한숨을 푸욱 내어쉬었다.

그리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주먹을 쥔 손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너는 그것의 정부??가 되려던 것이냐?”

“아닙니다.”

“혼인이란 서로가 서로를 붙잡는 것이다! 머나먼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종속된다니, 어리석기는. 비를 신하로 삼을 수는 있다. 허나 비를 신하로 대접하는 왕이 어디 있단 말이냐!”

테레제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유르덴 공작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말도 안 되는 일로 딸의 풀죽은 얼굴을 보는 것이 굉장히 분하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충분히 그것을 사랑했다. 네 의지로 선택한 혼인이 아니었음에도 충분히 그를 따랐다. 하지만, 그는 네게 충실하지 않았다. 내 딸의 마음이 전혀 보답받지 못한 것을 생각하니, 내 가슴이 다 아플 뿐이다.”

“하지만, 저는 제 일을 다하지 못.......”

“그만, 테레제. 가정의 일은 임무가 아니란다.”

하지만, 테레제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 테레제를 마주한 유르덴 공작은,

디트리히는 아직 철없는 딸을 보는 아버지의 얼굴로, 그러면서도 만면에 자책이 떠오른 지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아무래도 나도 네게 그리 충실하진 못했던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듀오토와 글로리아가 동시에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내가 오기 이전에 테레제의 훈육을 맡았던 둘이었다.

나도 입을 열진 않았지만, 눈치 보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라. 너희가 잘못한 건 없으니.”

“아버지.......”

“그리고 너는 학교로 돌아가거든 파티를 열도록 해라. 파티에 그 빌어먹을 왕자를 초대하고, 약혼을 파기하겠다고 네가 먼저 선언하도록 해라.”

“하지만, 그래서야 이클리시아의 체면을 정면으로 구기는 일이 됩니다.”

“에드먼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 자식이 뭐 어쩔 수 있을 것 같으냐? 맘에 안 들면 우리 유르덴과 전쟁이라도 한 번 하던가.”

“그, 그건.”

“애초에 그 자식의 자식놈이 우리 유르덴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지 않으냐. 그 자식놈이 세자가 아니게 되던가, 또는 우리를 고꾸라뜨리던가, 결국 선택해야 할 날이 오지 않겠느냐.”

/

그리고 그렇게 했다.

파티 초대장을 돌리고 일주일.

여러 교수와 학생들이 모인 파티장에서, 테레제는 가장 늦게 나타났다.

에드윈이 입은 푸른빛 정장과 전혀 매치 되지 않는, 검은색 바탕천에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드레스에, 초승달과 늑대 문장이 수놓아진 이클리시아의 케이프 숄 대신에, 두 자루 교차한 직검 위를 늑대가 그려진 방패가 덮는 형상의 문장이 수놓아진 유르덴 공작가의 케이프 숄을 걸치고서.

파티 주최자의 늦은 등장과 묘한 긴장감에 사람들이 갈라지고, 이목이 쏟아진다.

테레제는 그 사이를 말없이 걸어가, 단상 위에 섰다.

“좋은 날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테레제가 고개를 좌우로 살피며 에드윈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드물게도 혼자였다. 항상 따라다니던 세실리아는 어디에 두고 왔는지.

부디 이제 와서 세실리아를 멀리하고 있다는 스탠스를 보이는 것만으로 파국으로 치달은 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길 빌 뿐이다.

“이 좋은 날에 유감스러운 말을 해야만 한다니, 조금 아쉽네요.”

“테레제! 잠깐만 기다려­”

“아. 딱 저기에 계시네요. 제 약혼자이신 에드윈 왕자님.”

에드윈이 단상 위로 올라오려 했지만, 내가 막았다.

이런 자리까지 칼을 챙겨­오긴 했다만­올 수는 없었기에, 그냥 몸으로 막았다.

칼집에 넣은 칼을 보이며 물러서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래서 에드윈의 길을 막고서, 고개를 숙였다. 별로 숙이고 싶진 않았지만.

에드윈은 급한 얼굴로 나를 밀어내려 했지만, 밀릴 리가 없다.

뭐. 오래 버티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이기에, 당신과의 약혼을 파기하려 합니다.”

테레제도 할 수만 있다면, 에드윈에게 ‘성녀와 놀아난 당신과의 약혼을 파기하겠습니다’하고, 고자세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도 기왕 말할 거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테레제에게 제안했었고.

하지만 에드윈과 이클리시아 왕국은 어쨌건 간에, 메흐레니아 교단까지 자극하는 것은 역시나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 테레제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저자세로 나와도 알 사람은 다 알 테고. 메흐레니아 교단에서도 공격받는 게 에드윈 하나 뿐이라면 딱히 비호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세실리아를 건드리려 했다며 에드윈을 끊어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고.

“오래 저하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 비루한 몸으로는 앞으로 그 크신 은혜를 갚을 방도가 없을 것 같아 이렇게 물러나고자 하오니, 부디 이해해주시길 바라나이다.”

“기다려, 기다려! 테레제!!”

에드윈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테레제는 스커트의 양쪽을 들어 에드윈에게 인사를 했다.그리고 싸늘한 얼굴로 에드윈을 한 번 내려다보고, 오래 볼 가치도 없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려 당혹에 빠진 손님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를 밀어내려던 에드윈은 결국 움직임을 멈추고 테레제와 나를 노려보았다.

테레제는 얼얼한 얼굴을 한 손님들에게 외쳤다.

“남의 불행이야말로 자신의 꿀맛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은 쓰디쓴 음료가 잘 팔리겠네요. 제 달콤한 슬픔을 안주로 삼으려면, 결코 다디단 음료가 어울리진 않을 테니.”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박수까진 전혀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헨델 교수였다.

누구인지 모르겠다면, 세실리아가 폭발했던 사건 때에 테레제에게 시험 도우미를 부탁했었던 교수님이다.

여기에 초대될 만큼이나 테레제와 연이 가장 깊은 교수들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헨델 교수를 잘 아는 학생들을 다음으로, 여전히 얼떨떨한 손님들 사이로, 박수가 퍼져간다.

물론 박수를 치는 것은 절반 정도에, 절반 정도는 여전히 의문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에드윈의 얼굴을 새빨갛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감히, 테레제, 네가.”

에드윈은 테레제와 주변 사람들을 한 번 노려보더니, 이를 빠득 한 번 갈고 몸을 돌려 회장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오웨인이 한심하다는 듯 도망치는 제 주인을 보필한다.

그러니 여긴 왜 왔냐는 표정이었다, 만.

그 전에 그는 나와 테레제를 한 번, 시선만으로 목을 졸라 죽여버릴 기세로 노려보았었다.

“저 녀석이랑 엘자는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남의 원한을 사는 건 좋지 않다.

원한을 사버렸다면, 미안하지만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내게 원한을 가진 놈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해서, 저쪽이 내게 무슨 짓을 하기 이전에 먼저 철저히,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야만 했다.

결코 고개 들지 못하게.

아량이고 뭐고 다 쓸데 없다. 그걸 잊었다간 죽는다.

“역시 제국의 중심이라니까요. 모든 식재료가 이렇게나 싱싱해선, 아아, 맛있어라.”

한숨 돌리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더니, 여기저기 많이 파인 매혹적인 드레스 차림의 글로리아가 물고기 요리를 담은 접시를 한 손에 든 채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 파티를 도와주러 본가의 메이드들을 이끌고 제도에 잠시 출장을 나온 셈이다, 만.

“그렇게 놀고 계셔도 괜찮으신가요?”

“저는 고급인력이에요. 서빙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요. 파티 시작 전까지 할 지휘 다 했으면 이제 좀 쉬어도 될 거라고 생각해요.”

“......네.”

“왜 말을 줄인담?”

그렇게 말한 글로리아는 홀짝, 하고 다른 한 손에 든 화이트와인을 비웠다.

생선요리랑 같이 마시려고 받아온 거 아니었던 걸까.

애초에 다 춤추려고 하고 있고, 방금 싱글이 된 테레제에게도 댄스 신청이 오는 지금에 혼자 먹을 거, 마실 거나 챙기고 있는 게 과연 예의에 맞는 걸까 싶다마는.

“근데 메이드 양. 숙녀가 지금 두 손에 뭘 들고 있잖아요. 안쓰럽지 않아요?”

“아, 예에, 예.”

나는 글로리아에게서 접시를 받았다.

테레제의 옆에 있어야 한다지만, 일단은 시선에 닿는 곳에 있기만 해도 충분하리라.

그리고 어디까지 옮겨드릴까요­하고 말하려 했지만, 어디까지­까지 운을 띄운 입이 딱 벌어진 채 멈추고 말았다.

글로리아가 팔을 뻗어서 내 가슴을 움켜쥔 탓이었다.

“무슨 짓인가요.”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기분 나쁜데요.”

“의외로 정상적이네요. 비명을 질러보고 싶다던가?”

“그것보단 왜 이딴 짓을 하는 지 묻고 싶은데요.”

“야한 느낌이 든다던가?”

글로리아는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재빨리 놀려, 위에서 아래로 움켜쥐는 손아귀 형태를, 아래에서 위를 받쳐 움켜쥐는 형태로 바꾸어 슬쩍 쓰다듬었다.

히­이­익­변­태­

“그만 하면 안 될까요? 누가 봤다간 잡혀가셔요.”

“지금 코넬리아는 혼과 몸이 따로 놀아서 반응에 민감해졌을 터예요.”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돌려 말하지 말고 똑똑히 말씀해주시면 좋겠는데요.”

“제가 남자였었더라면 조금 다를까요?”

아.

조금 소름 돋긴 하네.

지금 이게 글로리아가 아니라 듀오토였다면 당장 주머니 속의 칼을 뽑아서 이 손목을 자르려 들었을 것이다.

근데 그건 여자 몸이 아니라 남자 몸이었더라도 똑같은 반응이지 않았을까.

“흐음.”

글로리아는 드디어 손을 놓았다.

“조금 더 관찰하긴 해야겠는데요, 뭔가. 혼이 바뀐 몸에 너무 쉽게 정착했어요. 테레제가 오래 조기교육을 한 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쉽게 정착? 잠깐만요.”

“제가 봐도 팔찌가 부서져서 변한 것 같긴 같지만, 그 이전에 여자 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게 치명타라고요. 이러면 되돌려놓았을 때, 오히려 어색할 걸요?”

아니, 잠깐만.

되돌려놓았을 때?

나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글로리아에게 물었다.

“되돌릴 수는 있나요?”

“제가 못할 게 뭐가 있겠나요?”

“그, 그러면­”

“으음. 400년 정도 걸리려나?”

아. 그러면 인간들은 늙어 죽던가요.

글로리아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농담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가능성은 있다고,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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