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이야기
* * *
서디오르시온에 출장을 다녀오고 다시 3주 정도가 흘렀다.
사실, 이래저래 바빴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커다란 상처가 이젠 거의 다 아물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나서야 시간의 흐름을 체감했다.
하여간에 3주 정도가 흘렀고, 노른데아셀에선 또 소문이 돌았다.
“성녀 후보님이 메이드를 들이셨다는 것 같더라고.”
“메이드? 그건 뭔가 조금 이상한걸.”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빨래방의 메이드들이 도란도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빨래방과 식당은 일과에 지친 메이드들의 휴식처이기도 했다...만.
아니, 이 동네 뭔가 좀 이상하다니까.
플라스틱은 아직도 개발되지 않았는데 세탁기는 개발되었고, 학교에는 몹시 당연하다는 듯이 동화를 먹는 코인 빨래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적응하기 힘들다.
아니, 아니! 오히려 편하니까 적응하긴 쉬웠지만!
“성녀 후보라면 메흐레니아 교단 사람이잖아. 부제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맞아, 맞아. 사실 나, 저번에 식당에서 성녀 후보님의 부제를 봤었거든. 꽤 참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세속에서 메이드를 들여온 걸까?”
“우리 도련님이 그러셨는데, 성녀 후보님이 치료하지 못한 아이가 있었대. 여태 딱 한 명.”
뭔가 싸하다.
그 한 명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녀들과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누가 검을 찬 메이드를 좋아하겠어서, 몇 발자국 멀찍이 떨어져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고 있었는데, 이래서야 귀를 조금 더 활짝 열 수밖에 없었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슬그머니 발을 움직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조오금은 부끄럽지만 정보 수집이 먼저다.
“결국 성녀 후보님이 그 아이를 받으셨대. 그 아이가 낫게 될 때까지 곁에 두실 모양이야.”
“그럼 그 아이가 새로 성녀 후보님 아래로 들어간 메이드라는 소리인가요?”
“몸이 좋지 않다는 거잖아. 메이드 일을 잘 하기는커녕 짐만 될 것 같은데.......”
“정말. 우리 일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긴 뭐야.
그냥 하녀잖아.
메이드라고 말하니 그나마 뭔가 조금 있어 보인다만.
“칼 찬 년에 이어 병신까지. 정말 가지가지 한다니까.”
“알리샤. 말이 험해. 들으면 어떻게 할 셈이야?”
“흥. 들으라고 하는 말이거든.”
역시 이 동네 조금 무섭단 말이지.
물론 이런 음습한 따돌림에 굴할 제가 아니랍니다.
따돌림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자는 도중에 뭔가 느낌이 싸해서 눈을 떴더니 구석 침대를 쓰던 1741번이 내 위에서 마운팅 자세로 작은 날붙이를 휘두르기 직전이었던 적도 있었지.
으음.
이건 따돌림이랑은 조금 다른가.
시설에선 가끔 아이들 사이에서 ‘솎아내기 작업’이라고 부르던 작업을 했었는데, 성적이 나쁜 아이들을 모아서 폐기처분하는 작업은 아니었고, 약물을 추가로 과용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다만 이 약이 꽤 센 탓에 굉장히 아팠다.
약이 맞지 않았는지, 아니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는지, 죽는 아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야말로 단순 처분이 아닐 뿐. 모두 아이들은 솎아지지 않도록 노력했었다.
여러모로 성적이 좋지 않던 1741번은 솎아내어질 위기였던 것 같다.
그래서 짧은 생각으로 솎아지기 전에 다음 대련 상대를 죽이자, 하고 결심했던 모양이다.
그게 나였고.
띠링띠링, 띠링.
세탁기 돌아가는 게 멈췄다.
나는 하얀 이불을 꺼내서 바구니에 담았다.
건조기에 돌리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바깥 날씨가 좋았다.
햇볕에 말리면 냄새가 난다. 따뜻한 냄새가.
......이 동네, 건조기까지 있다니까.
아직 세탁기와 건조기를 융합시키진 못한 것 같긴 한데.
“한 마디도 못하고 꼬리를 마는 것 좀 보라지.”
“아하하. 알리샤도 참.”
“얘, 마르티나. 알리샤가 어때서? 말 한 번 잘했네.”
칼 든 사람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저거.
나라면 무서워서 아무 말도 안 할 텐데.
야만적이지 않고 싶은 사람에게 자꾸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야말로 그 주인에게 어울리는 종자야.”
아, 그러셔.
나는 그 말을 뒤로, 빨래방에서 나왔다.
바깥은 한적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날씨는 굉장히 맑아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빨래방의 문고리에 손을 대었다.
“되새기는 색은 잿빛. 푸른 하늘보다도 더욱 짙푸르게 얼어붙어라.”
문고리에 서리가 서리더니, 천천히 퍼져나가 안쪽 장치를 얼렸다.
그런 뒤에 문고리를 돌려 한 번 열어보려 했다. 까득.
안 열리네.
뭐어. 이렇게 맑은 날인걸. 금방 녹을 거야.
“어? 어어? 뭐, 뭐야. 문이 안 열려!”
“응? 그게 무슨.......”
“무, 문이 고장났나? 꿈쩍도 안 하는데?”
빨랫줄로 향하는 동안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이, 신나라. 까르르.
부수면 기물파손이라서 혼날 거야. 참고 기다리는 게 좋겠지.
물론 저 아이들도 간단한 마법 정도는 사용할 줄 알 터.
간단한 촛불 마법으로도 문고리에다가 대고 있으면 얼마든지 녹일 수 있을 테지만, 저래서야 녹기 전까지 깨달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 마르티나인가 하는 아이한테는 조금 미안하네
“다녀왔습니다.”
이불을 빨랫줄에 널어두고 잽싸게 방으로 되돌아왔다.
테레제는 안경을 쓰고서 책을 읽고 있었다.
“별 일 없었지?”
“네? 앗. 아앗. 네. 없었어요.”
“......그래?”
뭔가 찔려서 대답이 늦어졌더니 테레제가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안경이란 죄악이라고 생각했는데, 테레제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안경 미소녀 최고야.
......물론 가끔 끼는 거니까 신선해서 좋은 거고, 만약 테레제가 안경을 계속 끼게 된다면야 다시 죄악으로 여기게 되겠지만.
“그냥, 그. 메이드들이랑 불화가 있었거든요.”
“그러니?”
“정말 별 일 아니었어요.”
“누굴 죽인 거라면 빨리 말해줘야 해. 그래야 빨리 묻을 수 있으니까.”
“네?”
이 아가씨는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야.
물론 조금만 머리에 열이 올라도 칼을 뽑으려 들긴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죽인 적 없다고.
적어도 테레제가 학교에 입학한 이래로는 아무도 죽인 적 없어....
“안 죽였어요.”
“다행이네. 어디 부러트리거나 잘랐다던가 그러지도 않았지?”
“......네.”
납치당했을 때, 사람 하나 곤죽으로 만든 적이 있기야 있었지.
이건 뭐어. 음. 정당방위? 그런 거니까.
“아가씨께선 아무래도 아가씨의 메이드를 믿지 못하시는 것 같네요.”
“물론 나는 코넬리아를 믿어. 왜 코넬리아는 주인님 섭섭하게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제가 아가씨 허락도 없이 누구 하나 묻어버리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설마 묻었어? 그 메이드들 말이야.”
이 꼬맹이가.
하지만 장난스레 웃고 있으니 마치 천사 같다. 봐주자.
“아가씨를 위해서라도 묻어버리고 올 걸 그랬네요. 다음부턴 기대해주세요.”
“참을성을 기르렴, 코넬리아.”
“네. 그리고 메이드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요.”
“소문? 뭘까. 말해보렴.”
“저를 베었던 그 친구가 성녀 후보의 메이드가 되어 이 학교에 들어왔다는 것 같더라고요.”
“......141번이라고 했었던가.”
“네.”
농담을 나누면서도 손에 책을 쥐고는 있었던 테레제가 결국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안경도 벗는다. 화사한 미소녀다.
내려놓은 것들을 책상에 가지런히 정돈하고서 나를 보았다.
“다시 한 번 싸우면 이길 수 있겠니?”
“만전이라면 반반일까요.”
“미묘한 승률이네.”
저번에는 얼굴을 보고 당황했던 게 컸다.
적이라고 인지하고 제대로 맞붙는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패배하진 않겠지.
“너를 위해서라도 며칠 정도 본가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네? 갑자기요?”
“너도 글로리아가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었니.”
“하, 하지만. 이건 조금 갑작스럽다고 할까.”
“나라면 결코 상처 입은 적이 회복하도록 버려두지 않아.”
그렇지.
적이니까.
하지만,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났다.
방 내부에는 소음 차단 결계를 쳐두었다.
기본적으로 방음이 잘 되는 방이라지만, 혹시 모를 귀에도 대비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 우리의 말이 새어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한 발자국 늦었나보네.”
“돌아가게 할까요?”
“돌아가지 않겠지. 들이렴.”
“......네.”
나는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서 천천히 나아가 방의 문을 열었다.
아니나다를까 성녀 후보 세실리아가 그 자리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더블린 양.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사실, 그다지 안녕하진 못했어요. 왜일까요?”
“......소문은 들었답니다. 괴한에게 습격받으셨다고.”
“으음. 그런 흉흉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오늘은 메이드 양이 저번에 해주셨던 조언대로 제가 직접 유르덴 양에게 인사를 하러 왔답니다.”
“코넬리아.”
“아하. 코넬리아라는 이름이구나.”
안쪽에서 나를 재촉하는 테레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옆으로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
세실리아가 지나가는 동안 계속 스커트의 양끝을 집어 올린 채로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가는 것은 세실리아 뿐이었다.
141번. 아일린은 지나가지 않았다. 세실리아 혼자였다.
그녀를 항상 따르는 에드윈이나 다른 소년들까지, 그 누구도 곁에 있지 않았다.
“사석에서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었죠? 세실리아 더블린이라고 합니다.”
“테레제 유르덴이에요.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네요.”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더블린 양은 바라시는 음료가 있으신가요?”
“커피 있나요?”
“그럼 나도 커피로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탕비실로 향한다.
원두를 적당히 그라인더에 갈아서 커피 프레스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값비싼 최고급 원두다. 보존마법이 걸려 있어서 산패되지도 않는다.
프레스로 내리는 게 제일이다.
빠르게 커피를 내려서 과자와 함께 돌아간다.
평소라면 10분에서 15분 정도 공들여서 내렸겠지만, 최소한의 공만 들였다.
세실리아는 됐고, 테레제는 아마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괜찮은걸.”
“하지만, 그때 많이 다치셨잖아요. 성녀 후보씩이나 되면서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이미 다 나았어.”
“차 나왔습니다.”
의외로 분위기가 좋네.
정말로 사과하려고 온 거려나?
“괜찮네요. 맛있다.”
“.......”
세실리아는 칭찬을 했지만, 테레제는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찌릿 노려봤다.
급하게 타서 조금 목에 걸리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성녀 중에는 미래를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난데없이, 세실리아가 그런 소리를 했다.
“미래라니.”
“저도 그거 비슷한 걸 봤거든요. 또렷이 기억나는 건 네 번. 다섯 번 정도려나.”
“.......”
“저랑 유르덴 양이 싸우는 미래였어요.”
“그건, 흥미롭네. 누가 이겼지?”
“제가 다섯의 네 번 정도 비율로 유르덴 양에게 살해당했어요.”
“꽤 노력했네.”
테레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받아쳤다.
나 역시도 칼자루로 손을 옮기려 했지만, 그 전에 세실리아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 손을 떼었다.
“그 미래에서 내가 어떻게 너를 죽였는지 물어보면, 실례가 될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으음. 저와 에드윈 왕자의 결혼식장에 용병을 보내 모조리 참살하고 내친김에 이클리시아 왕국까지 멸망시키고 유르덴킬라이나 왕국을 세우는 엔딩이었으려나요. 망국의 죄인이 되어 겨우 살아남은 에드윈 왕자를 감옥에 가두고, 그의 앞에서 포로로 붙잡힌 저를 정말 끔찍하게 살해하면서 왕자님께 이런 대사를 읊으시더라고요. ‘당신의 세계는 지금 저 아이와 함께 무너졌어. 이젠 나의 세계 안에서 나만 보면 돼. 나만 사랑하면 돼.’라고.”
“장난으로 할 만한 말은 아니네.”
“정말 너무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같은 사람인데. 그런 식으로 죽이다니.”
“......그래. 그럼 너는 나를 어떻게 죽였어?”
“저요? 제가 안 죽였어요. 여러 가지 죄로 재판정에 넘겨졌는데, 무죄방면이 되어 돌아오다가 마차와 함께 폭사하셨어요.”
폭사.
아무리 들어도 이쪽의 정체를 꿰어보고 있다는 말투다.
세실리아가 커피를 마신다.
“맛없는 이야기를 했더니 맛없게 느껴지네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사실 저는 유르덴 양이 무섭거든요. 유르덴 양이 세상을 무서워하는 것만큼이나 저는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유르덴 양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요. 돼지처럼 도살당하기보다는 사람답게 죽고 싶어요. 20%에 걸기엔, 저는 너무 겁쟁이거든요.”
“그럼 에드윈에게서 떨어져.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에드윈은 이클리시아를 위하고 있어요. 이젠 제 손을 벗어나 스스로 새까만 진흙 속을 파헤치려 하고 있어요.”
“네 탓이잖아?”
테레제가 드물게도 감정을 내비치며 그렇게 말했다.
세실리아는 스스로를 자조하며 말을 이었다.
“꿈을 보기 전의 저는 아무래도 꿈을 보고 난 이후의 저와 다른 것 같아서요.”
“요지를 말해.”
“지금 하시는 일을 그만두어 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는 유르덴 양의 친구가 되어서, 물심양면으로 유르덴 양이 하는 일을 도울게요.”
선전포고다.
아량이라도 베풀겠다는 듯, 항복하라고 말하고 있다.
“더블린 양. 그거 마시고 그만 돌아가지 않겠어?”
“......역시 이상한 소리 같죠?”
“검토해볼게.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