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22화 (22/100)

〈 22화 〉 약점

* * *

눈을 떴더니, 어딘가의 귀빈실이었다.

생전과 비교해도 최상등품에 해당하는 이불의 부드러움에 놀라고, 이어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허리와 엉덩이가 살짝 파묻힐 정도의 푹신함에 당황하고 만다.

학교 기숙사 한 켠의 침대나 유르덴 가문의 고용인 침대 따위와는 질이 다른 침대다.

“여긴, 어디....... 콜록.”

갈라지는 기침이 나왔다.

목이 쉬었다.

칼에 베인 뒤 강물에 절여지고, 살았다고 생각했더니 소독약으로 샤워를 했다.

그러고도 목이 쉬지 않는다면 초인이겠지.

물론 나는 초인이 맞지만.

여긴 대체 어디일까. 아무리 봐도 어디 병영에 있을 법한 방은 아닌데.

일단 방 안에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주변을 꼼꼼히 한 번 살펴보고, 간단한 수색 마법으로 다시 한 번 확인을 마친 다음에 품에 꼭 안고 있던 이불을 내렸다.

무진장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이라 도저히 놓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이불에 온기가 잔뜩 묻어있던 탓에 추워진 느낌까지 들었다.

......추워진 게 맞네.

거의 미라나 다름없다 싶을 만큼 붕대로 둘둘 감긴 상반신은 알몸이었다.

젖가슴은 압박붕대로 꽁꽁 동여매어진 채였는데, 141번에게 입었던 커다란 상처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군의관에게 감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미친 놈.

나는 붕대 위에 손을 올리고 마법을 사용했다.

“되새기는 색은 잿빛. 양초를 녹여 흠집을 덧칠하리.”

핏자국이 얼마 남지 않은 붕대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화상을 입었을 때보다는 쉽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이 있지 않나. 깔끔하게 잘린 손가락은 쉽게 붙는다던가.

반면 화상은 잘 안 낫는 상처로 유명한 편이고.

다른 상처에도 연이어서 마법을 발동한다.

다행히, 이쪽도 상태가 그렇게까지 나빠 보이진 않았다.

붕대를 풀어보진 않았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어쩌면 좋은 연고가 발려있을지도 모르지. 연금술로 만들어낸 연고는 여전히 듣지 않는다만, 마법을 담지 않은 약초 연고는 내가 아는 어떤 현대 의학의 약이나 연고보다도 효과가 좋아서 마법 같은 효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잘 들었다.

아무리 회복 마법을 병용했다지만, 전치 5주에서 6주 정도는 우습게 나올 커다란 화상이 겨우 1주하고 닷새 만에 나아버릴 정도였다.

대체 무슨 이론일까. 그냥 약초니까 효능이 있다는 것까지는 나름 납득할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현대 의학력을 초월해 내 눈에 있어선 거의 마법이나 다름없는 속도로 나아버리는 건 또 뭔데.

누가 또 마법이 살아 숨 쉬는 세계 아니랄까봐, 한없이 느슨하기 그지없다.

잘 모르겠지만, 분명 메테오가 마법 피해로 들어가는 그런 세계겠지.

......메테오를 맞아보고 싶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그 아이는 깨어났습니까?”

“윌리엄 왕자님? 죄송합니다! 신이 지금 들어가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기, 기다려주십시오! 저하!”

갑작스레 소란스럽다 싶더니, 바깥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윌리엄 왕자. 이클리시아의 둘째 왕자. 벌써부터 불길함을 느낀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서 몸을 감고 침대에 드러누우려 했다.

“악!?”

갑자기 급하게 움직여서 그런가.

나는 외마디 비명소리를 뱉으며 내 상처를 끌어안은 채 앞으로 쓰러지듯 굳어버렸다.

굳으면서 최대한 이불로 입을 막았다. 바깥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했다만.

그리고 문이 열렸다.

“우, 으윽.......”

“......아직 몸이 성치 않은 모양이네요.”

겨우 고개만 돌려서 문을 바라볼 수 있었다.

테레제와 에드윈보다 1살 더 어리지만, 덩치만 보면 이미 그들보다 더 성숙하게 자란 왕자가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늙은 시녀가 걱정된다는 눈으로 윌리엄 왕자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다가도 눈알을 굴려 나를 한 번 노려보고, 다시 눈알을 굴려 윌리엄 왕자를 걱정한다.

무시무시한 시선 회전이다.

그 꼴이 꽤 웃겨서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는 상황이고, 웃는다 한들 아파서 후회하겠지.

“나가주세요, 실디.”

“왕자님! 안 됩니다! 어떻게 저런 뿌리도 모를 천것과 단 둘이서 합방하려 하십니까?! 혹여 저 여자가 나쁜 뜻이라도 품었다간.......”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일 환자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인가요?”

“왕자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보호받으셔야 할 분이란 말입니다!”

오.

저 늙은 시녀분.

뭔가 나 학창 시절의 교감 선생님 목소리랑 똑같은 것 같아.

물론 이젠 그분의 목소리가 전혀 기억 안 나지만, 아마 저런 목소리지 않았을까?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제발 나가요, 실디.”

“왕자님!!”

“하아. 오늘따라 고집이 더 세시네요. 혼자가 아니기만 하면 되는 거죠?”

깊게 한숨을 뱉은 윌리엄이 혀까지 차고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그리고 그가 검을 휘두르자 허공이 갈라지고, 무엇인가가 기어나왔다.

슬라임 같은 것처럼 보였지만, 슬라임과는 확연히 달랐다. 뿜어내는 마력량이 달랐다.

땅을 기며, 천천히 형태를 갖추었다. 젊고 아리따운 처녀의 모습으로.

하지만, 어딘가 형태가 불안정한 느낌이 드는데.

“제 정령인 운디네에요. 실디도 본 적 있죠?”

“......으, 으으.”

“이제 정말로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바, 바깥에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나오셔야만 해요!”

늙은 시녀 실디는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어렵사리 방에서 나갔다.

문이 천천히 닫힌다. 문이 닫히자마자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운디네가 박살나 흩어지더니, 처음 기어나왔을 때처럼 슬라임 비슷한 동글동글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니.

그 모습마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갑작스레 팍, 하고 상부가 터지듯 부풀더니, 아무리 보아도 불온하게밖에 보이지 않는 촉수를 흐느적흐느적 흔들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그런 운디네의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정령들은 대개 소환자의 마음에 어울리는 모습을 한다고 하네요.”

“......네?”

“아뇨, 아뇨.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니었죠.”

윌리엄은 품속에서 작은 마석 덩어리 하나를 운디네에게 던져주었다.

운디네는 촉수를 재빨리 내뻗어 마석 덩어리를 붙들더니, 천천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운디네의 모습에 출처 모를 경각심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테레제의 명예에 흠이 가지 않도록 윌리엄에게 인사를 해야만 했다.

“이런 모습이라 부끄럽지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윌리엄 저하.”

“아, 아아. 알았으니까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 말아요. 내가 다 아파오네.”

“......무례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윌리엄은 한 번 웃더니, 내게 다가왔다.

그는 침대 모서리, 내 옆에 앉았다.

“저하?”

“과연 형님이 ‘테레제는 몰라도 그 메이드는 꽤 귀여운 편이야’라고 말씀하실 법하네요.”

“자, 잠깐­”

윌리엄이 내게 손이 뻗는다.

본능적으로 팔을 올리고 말았지만, 그 팔로 감히 윌리엄의 손을 쳐낼 수는 없었다.

윌리엄의 내부고발도 기분 나쁘기 그지없지만, 지금 상황이 더 답이 없다.

“그만 둬, 주세요, 저하. 누가 보기라도 하면.......”

“하는 말은 귀여운데 그 눈은 꼭 ‘헛짓거리 했다간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네요.”

“......윽.”

윌리엄이 자기 손으로 내 옆머리를 걷어내곤 내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댄다.

빌어먹게 소름 돋는다.

본래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칼도 뭣도 없다는 게 정말 다행이다.

“누가 당신을 습격했죠?”

“......?”

“혹시 눈에 붕대를 두른 검은 머리카락의 칼잡이 소녀인가요?”

“그걸, 어떻게.”

“아니면 1725번 당신을 위해서 그냥 141번이라고 말할까요?”

하지만, 남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하게 속삭여야 할 법한 물음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윌리엄을 보았다.

윌리엄은 내 반응은 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이거 불충해라. 지금 당장 확 근위병을 불러서 목을 베어버릴까.”

“누구냐고 물었어요. 대답해.”

“존댓말을 할 거면 하고, 하지 않을 거면 하지 마세요.”

윌리엄은 한숨을 뱉더니, 운디네를 자신 곁으로 불렀다.

조용히 이불을 쥐고 있던 나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이불을 목에 걸어서 꺾어버릴 생각이었는데, 기습이 통하지 않는 성격이다.

“누구긴요. 그 시설 실주인이죠. 당신이 풀어준 광견이 그렇게까지 죽이려드는 사람이고.”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이길 바라죠?”

“화내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제게 왜 밝힌 건가요.”

“잘 참네요. 역시 광견병에 걸린 들개와 좋은 환경에서 길러진 애완견은 느낌이 달라.”

다시 이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딱히 뭘 해보려고 해서 들어간 힘이 아니었다.

그냥 열받아서.

“기록에는 남자라고 되어있었고, 실제로도 남자 모습으로 세실리아를 기습했던 것 같은데, 꽤 무모한 행동이었어요, 그거.”

“내가 구해줬으니까 은혜로 알라. 그리고 갚아라. 그런 말을 할 셈이신가요?”

“네네네. 141번, 아니. 아일린이라는 이름이 생겼더라고요. 하여간 그 아이에게 있어선 이제 코넬리아 당신도 적이에요. 은인인데 적이라니. 세상만사 무상하죠?”

“그래서 죽이라고요?”

“돌려 말하는 걸 알아들을 정도의 지능은 있는데, 왜 돌려서 대답해주지 않는 건가요? 풍류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없나요?”

아무래도 141번, 아일린은 성녀의 편이 된 모양이었다.

성녀는 시설에 대해 캐고 있었고, 또 순회를 돌며 치료를 베풀고 있었다.

정황상으로는 얼마든지 맹인인 아일린이 세실리아와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테레제의 메이드지만 유르덴의 메이드가 아닌 나처럼, 세실리아의 호위지만 교회의 기사는 아닌, 그런 느낌일까.

그리고 역시 세실리아와 아일린에게 노려지고 있었던 이 어린 왕자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나를 목격했고, 이렇게 구해냈다.

아직은 헐거워서 딱 맞지 않는 피스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얼마든지 납득 가능한 정도다.

“숨긴 거 있으면 다 말해요.”

“왕자님께 못하는 말이 없네요? 알아서 알아내세요.”

“......윽.”

“이게 하려던 말의 전부에요. 내일 유르덴 가문으로 보내드릴게요.”

“네?”

윌리엄은 제 할 말만 다 하고서 방에서 나섰다.

이렇게 간단히?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만.

뒤늦게 윌리엄이 테레제의 약점을 쥔 셈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밀히 말하면 약점이 아니라, 자폭 스위치나 다름없겠지만.

“빌, 어먹을.”

가라.

가서 네 주인에게 한 배를 탄 사이라고 전해라.

내 탓에, 테레제는 자폭스위치를 쥔 미친놈과 같은 배에 강제로 타게 된 셈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