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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칼끝에는 나비가 머물렀다-19화 (19/100)

〈 19화 〉 개인적인 시간

* * *

“......돌겠네.”

뭔가 익숙하지 않아.

팔목이 너무 가벼운데다가, 시야도 예상보다 상당히 높아졌다.

곧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조금 심각한걸.

마지막으로 팔찌를 풀었던 게 도대체 언제였더라.

노크 소리.

나는 메이드복을 걸어놓은 옷장을 닫으며 말했다.

“누구십니까?”

“어라? 이 방이 아닌가?”

어린 소녀가 당황한 듯 목소리를 흘렸다.

누군가 하니, 이 여관 주인장의 딸이었다.

방을 빌린 내게 내 방을 안내해주겠다며 당차게 앞서나가던 모습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아직 10살도 되지 않아 보였었지만, 부모를 도와 여관의 일을 돕는 모습이 기특했지.

나는 닫은 옷장에 마법으로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문으로 다가가 활짝 열었다.

소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복도를 돌아나가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4호실이었을 텐데.......”

“저기. 얘야!”

“넹?”

큰 목소리로 부르니,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가느다란 팔로 커다란 수건을 들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여관 주인장이 목욕물을 데워드릴까요, 하고 물었었지.

“누구, 세요?”

“음. 그게.”

팔찌를 차고 들어와서 숙소를 빌린 뒤에, 숙소에서 팔찌를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니 여관소녀의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해야겠지, 만. 이제 뭐라고 변명을 하는 게 좋을까.

“이 방을 빌린 애의 오빠거든.”

“네? 우음. 확실히 닮은 것 같긴 하네요. 눈동자 색도 머리카락 색도 같고.”

“그렇지?”

본인이니까.

그나저나 이 아이는 언제 그걸 다 살펴본 거야.

“그치만 브리는 ‘순록머리 여관’에 들어온 모든 손님에 대해 기억해두는 걸요. 브리는 오빠가 여관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어요. 수상한 사람이에요.”

“오빠는 마법사거든.”

“마~법~사~아~?”

“자자. 이것 보련?”

쪼그려 앉아, 이 브리라는 이름의 여관소녀와 시선을 맞춘다.

그런 뒤, 주머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어 오른손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 사이에 끼우고서 그 모습을 브리에게 똑똑히 보인다.

입술을 삐쭉이는 브리는 여전히 내가 수상하다는 얼굴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은화에 집중했다.

“자. 마법, 사용한다?”

“흐으으음.”

나는 왼손의 손바닥을 펴서, 오른손의 은화를 가렸다.

그리고 은신 마법. 은화가 아니라 내게 건다.

마법 면역이라도, 내가 나 자신에게 사용하는 건 문제가 없다.

애초에 계약 마법이 내게 통하는 것도 이에 기반하니까.

“우, 우와아! 없어졌어! 유, 유령이다!”

“자. 꼬마 아가씨.”

“히에에에에엑!?”

그 사이 뒤로 돌아가서 브리의 뒷목에다가 은화를 넣었다.

금속이 차가웠는지 브리가 크게 놀랐다.

브리가 디른들 닮은 옷을 입고 있어서, 은화가 코르셋이 조여진 허리춤 언저리에서 멈춘 탓도 있으리라.

저거 꺼내는 것도 고생이겠네.

뭐어, 딱히 의도한 건 아니고.

“흐아아아.......”

“우, 울면 안 돼.”

“브, 브리는 안 울어요! 그냥 놀란 것뿐이에요.......”

그러면서 찔끔 흘린 눈물을 훔친다.

어린애가 어린애답게 귀엽네.

아닌가? 눈물을 참을 줄 아는 걸 보면 이것도 꽤 조숙한 편이려나.

여태 시설의 아이들이나 테레제 같은 어린애들만 보아왔으니 기준이 이상해질 것 같다.

“그럼 이제 믿어줄래?”

“다음부터는 꼭 앞문을 이용해주세요.”

믿어주겠다는 소리네.

은화까지 받았으니, 뭐.

브리는 품에 안고 있던 커다란 수건과 작은 물통, 그리고 오래 사용된 비누를 건네주었다.

이 세계, 보이는 것과 다르게 마법이란 게 있어서 비누가 그렇게 사치품까지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일개 여관에서 비누 이상 되는 것까지 내놓긴 힘든 모양이다.

욕탕에 샴푸나 린스 같은 위생용품이 금속제 용기이긴 해도 당연하다는 듯 펌프식 뚜껑까지 달려서 비치되어 있던 곳에서 살았었으니, 이런 갭이 가끔 괜히 눈에 걸렸다.

“그런데 목욕통은 누가 쓸 거예요? 오빠. 아니면 언니?”

“별로 상관 없지 않아? 교대로 쓰면­”

“식은 물을 다시 데우시려면 추가 요금 내셔야 해요.”

“알았어, 알았어.”

이 시대에선 장작이나 마도구를 써서 물을 데운다.

마도구의 경우,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일반인은 마석으로 마도구를 충전해야한다.

그러니 이 마석값, 아니면 장작값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침구가 더 필요하시지 않으시겠어요?”

“괜찮아. 꼭 붙어서 자면 이불 없이도 따뜻해.”

“아하.”

브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충분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오빠. 침대에선 마음껏 해도 상관없지만, 욕탕에선 금지에요! 방음도 전혀 안 되고, 잘못하면 목욕통이 부서지니까!”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브리야,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다니, 뭐를.......”

“아기 만들기요!”

“아기 만..?! 야! 아니, 남매가 왜 그런 걸 하는데?”

여관 주인장 딸이니까 아기 만들기에 대해 벌써 깨우쳐버렸다고 해도 이상하진...않다고 본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남매가 방을 빌린 설정인데 왜 그런 충고 같잖은 충고를 하는 건데.

실상은 남매도 아니고 본인이다만.

“남녀 혼성 손님이 같은 방을 쓰면서도 침구를 새로 하나 더 빌리지 않고 같은 이불을 덮으려 한다면, 그건 무조건 그날 밤에 아기 만들기를 하려는 거라고, 저번에 어떤 모험가 아저씨가 말해줬었어요!”

“아, 아니. 그건 피가 이어지지 않은 커플의 이야기고.”

“에이. 브리에겐 숨길 필요 없어요. 남들에게 보이기 싫으니까 마법을 써서 숨어들었잖아요! 브리는 알아요. 사실 이건 비밀인데, 저번에 어떤 남매 모험가가 아이 만들기를 하길래 다른 모험가 오빠에게 물어봤었거든요. 만약 브리랑 빌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가 브리를 이모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 아니면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 그러니까 금다? 금반? 음. 하여튼 그런 사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런 사랑은 남들에게 보이면 안 된대요. 오빠도 그런거죠?!”

“동심이란 뭘까.”

무심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조금 조심하는 게 좋겠다 싶어졌다.

팔찌를 끼는 장면이나 벗는 장면이 이 아이에게 목격되거나 했다간 자살하고 싶어지겠지.

“그래, 그래. 그런 거니까 남에게 알리지 말아주면 좋겠어.”

“역시 브리는 박식하죠?”

그러면서 내게 작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입 막음을 하고 싶다면 돈을 내놓으라는 소리일까.

이미 은화 하나 받았잖아.

이젠 다 됐다 싶어져서, 주머니에서 대동화 두 장을 꺼내서 브리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과자라도 사먹으렴.”

“감사합니다! 아빠가 사람은 똑똑하고 박식해야지 잘 살 수 있다고 그랬는데, 역시 아빠 말은 틀린 게 없어요!”

브리가 도도도 복도를 달려 1층으로 돌아간다.

이제 숙소 하나 잡았을 뿐인데, 세실리아에 대한 조사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브리에게서 떠맡은 목욕용구를 갖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그야말로 그려낸 듯한 판타지 속의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금 전, 여관에 입장할 때에도 이미 한 번 보았었지만, 계단을 따라 내려오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풍경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나무 술잔. 촛불과 화롯불에 흔들리는 그림자.

류트를 튕기며 노래하는 바드나, 대검을 등짝에 짊어진 채로 가녀린 사자 수인과 막상막하로 팔씨름하는 근육 덩어리 인간 전사. 만화고기를 뜯어먹는 엘프 궁수.

고기를 신나게 뜯고 있는 엘프는 또 어떨까 싶긴 하지만, 뭐.

“일부러 모험가가 많은 여관을 찾은 보람이 있었네.”

정보수집의 정석이라면 역시 여관이지.

퀘스트라면 여관 아저씨에게 받는 게 정석이고.

여담이지만, 학교 앞의 여관인데 왜 모험가 여관이 있는가 묻는다면야,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것뿐이라고밖에 말해줄 수가 없다.

간단한 마법이라면 기도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좀 더 강한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여러 가지 소재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과연 모든 마법사들이 제 발로 소재를 모으러 가겠냐고.

거기에 더해 이 동네 마법사들 극대다수가 학생이고 귀족이다.

돈으로 다 되는 줄 아는 부류들도 많다. 그러니 모험가가 많을 수밖에.

“거기, 형씨.”

“네?”

술판 옆을 지나 욕실로 가려는 참에, 카운터의 주인장이 말을 걸어왔다.

설마 브리 때처럼 누구냐고 시비를 걸 셈인가.

일이 쓸데없이 자꾸 귀찮아지는 느낌­

“브리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니, 그건.... 됐어요. 네.”

머리만 아프다.

처음부터 어디 뒷골목에 숨어서 팔찌 풀고 옷 갈아입고 들어올 걸 그랬다.

나 나름대로 신중을 기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거 몇 분 걸린다고. 정말 생각이 짧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어.

“식사는 어쩔 셈인가? 그 방에 포함된 식대는 1인분이야.”

“......밖에서 먹겠습니다.”

돈이 아까운 건 아니다. 두 명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니 문제다.

밥을 가져다달라고 하는 방법도 있기야 있지만, 괜한 불안요소를 사는 건 싫다.

“좋을 대로 하시게.”

“그냥 한 번 묻는 건데, 그 식대를 술값으로 바꿔도 괜찮을까요.”

“헛소리를.”

그럼 그렇겠지. 그다지 기대도 안 했다.

브리와 비교하면 굉장히 무뚝뚝하고 붙임성 적은 아저씨다.

맥주라도 마시면서 아저씨에게 정보를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이래선 곤란하겠네.

“3번 욕실이 비어있으니 거길 쓰면 된다네.”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하고 여관에서 나와 욕실로 향한다.

욕실이라곤 해도, 뒤뜰에 나무로 격벽을 쳐서 작은 방을 만들고 목욕통을 넣었을 뿐이지만.

다른 곳을 가보지 못해서 단정은 못한다만, 판타지 세계관 치고는 꽤 괜찮은 시설이 아닐까?

“가끔은 굉장히 답답하단 말이지.......”

시설에선 육성이 끝난 인원들부터 순차적으로 상식을 가르쳐, 결과적으로는 암살자로 완성할 예정이었던 것 같지만, 나는 중간에 탈출해서 이런 게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탈출한 이후에 받은 글로리아와 듀오토의 교육은 굉장히 편중되어있었다.

애초에 테레제를 섬기기 위한 교육 이외의 교양 및 상식 교육은 배제한 느낌이었다고 할까.

......어떻게든 되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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