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납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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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항상 24시간 내내 테레제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하나는 테레제가 수업에 들어갈 때.
대강당 수업이거나, 테레제와 친분이 있는 교수의 수업이라면야 강의실 뒤에서 대기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강의실 바깥 복도에서 대기한다.
다른 하나는 새벽, 식당에 아침 식사를 가지러 갈 때였다.
나는 테레제의 등교 시간보다 2시간가량 일찍 일어나, 새까만 새벽에 나선다.
그리고 우선 기숙사 옥상으로 향해 한 시간 정도 적당히 검을 휘두르다가 씻고 식당으로 향해 테레제와 나 자신을 위한 아침 식사를 받아 온다.
테레제는 완벽한 아가씨이지만, 무릇 학생들이 다 그렇듯이 침대와 이불을 사랑하고 아침에 약했기에, 열심히 깨워 아침을 먹이고 씻는 걸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가끔 돌아왔는데 테레제가 먼저 깨어나 있으면 일이 곤란해진다.
십중팔구는 악몽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버린 것이므로, 내가 없으니 이불 속에 숨어서 결계를 몇 중으로 펼쳐놓고선 훌쩍훌쩍 울고 있곤 했다.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깊은 잠에 드는 마도구를 방에 몇 개씩이나 설치해놓았는데도 그렇다.
......아, 그래. 됐어. 그만 고백할게.
테레제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딱히 침대와 이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마도구 탓에 매일 수면제를 먹고 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다.
두말할 것도 없다만, 그 마도구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 편한 몸이네.
“안녕하세요~.”
아침 식당은 조용하다.
별 일 없다면 점심이나 저녁마저도 하인을 시켜 방에서 먹는 귀족 자제분들이, 아침에 굳이 식당까지 와서 식사하려 하지는 않는다.
지금 시간에 식당에 있는 사람은 학교에서 일하는 청소부, 정원사 등과, 귀족이 아님에도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노력파 학생들, 그리고 주인이 일어나기 전에 식사하고 돌아가려는 하인들뿐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세실리아 더블린도 가끔 보였던 것 같다.
그 때 사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지만.
“안녕, 코넬리아. 좋은 아침이지?”
“네. 좋은 아침이에요, 톨디트 씨. 오늘 아침 메뉴는 뭔가요?”
“소시지 양배추 스튜, 브로콜리 감자 스프, 조개 스프 중에서 하나 고르렴.”
“그 중에서 하나라면, 무조건 양배추 스튜네요.”
건강해지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
조개 스프도 싫은 건 아닌데, 아무래도 육즙 흐르는 소시지가 더 좋지.
양배추도 달콤해서 좋아한다. 브로콜리 같은 걸 먹을 바에야 잡초를 뜯어 먹겠다.
아니, 뭐.
이 동네의 메이드란 보통 주인이 우선 식사하고 남은 것을 먹는다던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인의 취향에 따라 메뉴를 고르는 게 옳지 않냐, 싶지만.
테레제는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과자 같은 간식이라면 모를까, 식사 때에는 단 한 번도 뭘 먹고싶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맛있네라고 말한 음식은 기억하고 있으니, 그게 메뉴에 나오면 꼭 고를 뿐이다.
“토마토 계란 스프는 언제 나오나요?”
“응? 그거 말이지. 그다지 호응이 좋지 않아서 많이 나오진 않을 거야.”
“그런가요. 슬프네요.......”
“뭣하면 따로 만들어주리?”
“아뇨. 그러실 것까지야.”
테레제를 위한 하얀 밀빵을 받고 내 몫의 새까만 호밀빵도 두 덩이 받는다.
마지막으로 탄산수와 감자 샐러드도 받은 뒤에 식당을 나선다.
감개무량할 만큼 화려한 아침식사다.
“다음에 토마토 계란 스프 레시피라도 알려 주세요. 제가 만들 테니까요.”
“오냐. 토마토가 들어오면 꼭 다시 묻거라. 나는 아마 까먹을 테니.”
버터가 들어간 달달한 모닝빵에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을 넣어서 먹던 전세와 비교하면 하찮기 그지없지만, 시설에서는 맛이 없는, 아니, 정말로 식감 이외의 맛 자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오트밀 반죽을 매일매일매일 아침점심저녁 가리지 않고 먹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버텼나 싶을 정도로.
그러니 감개무량할 수밖에.
옛날 생각이 나서 덧붙이는 말인데, 그때 특식인가 먹었던 거 같은데.
누가 그랬었지. 힘든 세월을 지내고 나면 추억 보정이 들어가서 다시 찾게 된다고.
대체 무슨 헛소리인지. 설탕 치지 않은 꽈배기랑 오트밀은 죽어도 안 먹어.
“날씨 좋다아.......”
트레이를 밀며 식당에서 나올 때 쯤이면 보통 옅게 푸름이 남긴 해도 곧 해가 뜰 즈음이었다.
잎사귀에 맺힌 새벽이슬을 채취하러 나온 연구원들이 보일 즈음이다.
해가 뜨지 않았는데 날씨가 좋은지 좋지 않은지 어떻게 아냐고?
심호흡 한 번 하면 대충 감이 오잖아.
이렇게, 스읍
“읍!?”
심호흡 하려는 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았다.
뭐야, 할 새도 없이 코를 막았다. 젖은 헝겊. 연금약액의 코를 찌르도록 매운 냄새.
좋지 않은데.
좋지, 않은데.
그.
“기절했나.”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어서 옮기는 거 도와.”
“트레이는 어떻게 할까?”
“거기 버려둬. 아니, 아니다. 어디 수풀에라도 밀어트려 놔!”
결론부터 말하자면, 통하지 않았다.
질질 끌려가곤 있지만, 기절한 척하는 것뿐이다.
바늘로 에틸에테르나 클로로포름같은 비?마도적 마취제를 직접 몸에 투여했다면 또 모를까, 연금약액을 통한 마취 마법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물론 에틸에테르도 클로로포름도 손수건에 묻힌 정도로는 사람을 기절시키기 힘들다만.
그나저나 남의 밥을 뭘 멋대로 수풀에 던져버리라고 말하는 거야.
짜증나네, 이 자식들.
“뭔가, 착각인가? 기절하지 않은 것 같은.......”
“도리아노트 멧돼지도 단번에 기절시킬 수 있다고 했었어. 헛소리 말고 움직여.”
“그, 그렇겠지. 좋아.”
“혹시 모르니까 걔가 찬 검도 풀어서 나한테 줘.”
“어? 검? 아. 알았어.”
감이 나쁘진 않네. 기분 나빠.
나는 질질 끌려가다가, 어디 상자 같은 데에 던져지듯 넣어졌다.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고......, 문제는 아가씨인데.
적어도 기숙사 내부는 안전할 것이다.
이렇게 허술하게 메이드를 납치하는 꼬라지를 보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메이드라서 허술하게 작전 거는 게 아닌가 싶어서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 학원의 보안은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설령 보안이 뚫려 기숙사 문이 열린다 한들, 테레제는 경비원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역량이 되었다.
나를 실은 상자는 오래 옮겨지지 않았다.
학원에는 빈 건물이 꽤 많으니까, 그런 건물 중 하나의 지하실일까 싶었다.
멀리 끌려갈 것 같으면 죄다 부수고 나오려고 했더니, 다행이었다.
“별 것 아니구먼.”
“방심하지 마, 형제. 우리 일은 오르데냐의 도련님이 오실 때까지 끝나지 않아.”
아, 뭐야.
또 그 녀석이냐.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그나저나 언제 오려나. 빨리 끝내고 가고 싶은데.
가능하다면 테레제가 깨기 전에 돌아가고 싶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테레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주변에 내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해서 자기 몸에 상처를 내고 말거든.
“약속시간이 언제였었더라?”
“이제 10분 정도 남았나. 그런데 아마 지각할 거야. 귀족 놈들이란 항상 그렇지.”
“그, 그럼, 있잖아, 형님. 어차피 오르데냐의 도련님은 이 메이드의 신세를 망치려고 하는 거 아냐?”
“그렇겠지. 자기를 무시했다던가, 뭐라던가. 저기 영상기록마도구도 있네.”
“어차피 망칠 거, 우리가 먼저 조금 맛보면 안 될까?”
“너 그 애새끼 취향 좀 고쳐라, 인마.”
“아이, 형님. 애새끼 취향이라니. 피지 않는 꽃을 꺾는 취향이라고.”
멍청이가 우악스럽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프잖아, 인마.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다 죽여버리려는 걸 용케도 참았다.
“더 역겨우니까 포장하지 마라. 그리고 당장 손 떼.”
“아니, 왜!”
“그랬다가 트집잡혀서 돈 못 받을까 걱정되어서 그런다.”
“진짜 고지식하게 왜 그래?”
“꼭 하고 싶으면, 어차피 귀족집 도련님이야. 신세 망치는 법은 내가 더 잘 안다는 식으로 그 도련님을 네가 설득해.”
“오.”
오는 무슨 오야.
그런 사이 다른 납치범까지 와서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히고, 팔다리에 손수 속박마법을 걸었다.
동앗줄이나 노끈을 썼다면 귀찮아졌을 텐데, 마법만능주의란 이래서 곤란하다니까.
뭐.
그 허점을 찌르려고 실험을 계속한 것이겠지만.
“그나저나 검에 손때가 많이 묻어있길래 꽤 힘들 줄 알았더니, 너무 쉽게 잡혔는걸.”
“검을 아무리 단련해봐야 마음을 단련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거지, 형님.”
“하하. 말은 잘하네.”
덜컹. 지하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드디어 왔나, 하고 목소리를 죽였다.
“이봐, 렘볼, 렘킨. 일 처리는 잘 되었나?”
“아이, 물론입죠, 도련님.”
“그래.”
뚜벅, 뚜벅. 구두굽 소리.
보폭은 작고, 무게감도 작았다. 도련님 본인이다.
그리고 하인들의 발소리 여럿. 네 명이려나. 이쪽은 조금 덩치가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 오르데냐 가문의 소년이 하려던 짓을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돈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물론입죠.”
“그, 도련님. 저도 저걸 능욕하는 데 끼여도 되겠습니까?”
“음? 흐으음. 뭐. 다다익선인가.”
“좋았어!”
좋기는.
“이봐, 일어나!”
“풉큭!?”
누군가가 다짜고짜 물을 뿌렸다.
나는 눈을 뜨고 눈앞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마부나 청소부처럼 보이는 순박한 인상들 셋에, 폭력배 인상의 셋.
셋은 도련님의 억지에 끌려왔군.
그리고 중앙의 오르데냐 소년. 그는 마도 기록기를 손에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이야아, 오래간만이다, 메이드 양. 놀랐지? 놀랐지! 내게 해줄 말 있어?!”
“.......”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이니? 괜찮아, 괜찮아. 곧 엉엉 울게 해줄 테니까.”
오르데냐 가문의 소년은 입을 꾹 다물고, 마도구를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신나서 다가오는 두 남자. 하나는 이미 허리띠를 풀었고, 다른 하나는 채찍을 들었다.
한심하게.
“경고합니다. 다가오지 마세요.”
“무뚝뚝하게 왜 그래?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해주지 않으련?”
“하아.”
팔을 들었다. 마법진으로 묶여있을 팔이 그냥 들렸다.
이딴 걸로 누구를 구속하겠다고.
하지만, 다가오던 둘은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어어, 야, 렘킨! 뭔가 이상하다. 거기서 나와!”
“저는 경고했어요.”
두 팔을 다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를 무기처럼 휘둘렀다.
렘킨이라 불린 산적 얼굴의 청년이 박살난 의자와 함께 얼굴이 망가져 땅을 데구르르 굴렀다.
그리고 날카롭게 박살난 의자 다리를 휘둘러 채찍을 든 덩치의 두 눈을 베었다.
별 거 아닌 것들이.
아직 피 하나 묻지 않은 의자 다리를 땅에 던져 버렸다.
눈이 망가져 비명을 지르는 덩치는 발로 걷어차서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마도구를 활성화한 오르데냐 가문의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거 주세요.”
“히, 히익. 렘볼! 나를 지켜!”
“윽. 넌 도대체 뭐야?!”
뒤에 빠져있던 렘볼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칼을 휘두르지만 느리다. 살짝 피하고 발을 걸어서 넘어트린 뒤 얼굴을 걷어찼다.
으으윽, 하고 신음소리를 아직 내길래 한 번 더 걷어차서 침묵시킨다.
“그거 주세요.”
“으, 히, 히끅. 여기, 여기요.”
“참 잘했어요.”
그것을 받아서, 곧바로 오르데냐 가문의 소년의 얼굴을 한 번 마도구에 담는다.
그런 뒤에 정지. 테레제에게 가져다주자.
“이제 그만 비켜주실래요? 아침 밥 새로 받으러 가야하거든요.”
“자, 잠깐만!”
“또 뭐예요? 아, 맞아. 내 칼도 돌려줘요.”
“나, 나는 누가 시켜서 그런 거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고!!”
“그거야, 뭐. 재판장에서 이야기하시고요.”
상큼하게 웃어주자.
아직 테레제가 일어나지 않아서, 아직은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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