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운명의 날 2
* * *
검후 설지연과 나의 앞에 나타난 어둠의 존재. 그것은 어떠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분위기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여유롭다.’
천하제일인 검후 설지연과 마주한 이 어두운 형체에게서는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설지연을 믿지만 불안한 마음에 휩싸였다.
“누구냐고 물었다!”
“누구냐라....... 이제는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압도적 존재가 가진 절대자의 여유. 나는 이 알 수가 없는 존재의 기이한 말투에서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건 천마와 검후에게서 받았던 느낌과는 달랐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존재에게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니라 보이니 나의 검이 무정하다 원망치 마라.”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그전에 말이야~.”
“....?”
말끝을 흐린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잉.
기이한 존재의 손이 나를 향해 움직였다.
스르릉. 팅.
검후 설지연이 그녀의 애검 불퇴를 빠르게 뽑으며 갑작스런 공격을 막아주었다. 역시 든든한 그녀이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전력을 다하라는 경고다. 검후 설지연. 이 몸은 너의 진짜 실력이 궁금하다. 이건 가벼운 경고에 불과함을 잊지 마라.”
“감히 내 낭군을 공격했으니 각오해야 할 거다. 나 검후는 오늘 살계를 어기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
검후 설지연을 도발하기 위해 나를 공격했다면 성공이다. 분노한 검후의 검에서 하얀빛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우웅.
강기로 인하여 검 불퇴가 울부짖는다. 그녀는 이제 이 어두운 무언가와의 싸움에 전면으로 나섰다.
오만하게도 팔짱을 끼고 있는 존재.
“어서 와라!”
쉬잉. 쉬잉. 쉬잉.
검후의 강기로 휘감긴 검이 빠르게 접근하여 간결하게 휘둘러졌다. 그녀의 공격은 언제 봐도 깔끔하고 훌륭하다.
어두운 무언가는 손을 풀며 뒤로 물러나 검후 설지연의 공격을 피했다. 공기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이어지는 검후의 공격.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이 되면 손끝에서 자색의 강기가 나와 검을 막아낸다.
옆에서 지켜볼 때, 저 존재는 검후 설지연이 어떠한 공격을 사용하는지 분석하고 있다는 걸로 보이기도 했다.
“검후의 검법에는 빈틈이 없구나. 아주 좋아!”
상대의 말에도 조용한 검후 설지연. 그녀는 지금 집중하고 있다. 눈앞의 이 상대는 그녀가 이렇게 긴장해야 할 정도로 강한 존재라는 걸 의미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숨죽이며 둘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검후 설지연의 공격을 관찰하는 존재. 검후는 방법을 바꿨다. 신중하게 접근하려는지 공격보다 상대를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상대에 대한 분석이 끝났다면 가장 자신 있거나 효율적인 공격으로 일시에 제압하는 게 좋아. 하지만 상대가 어떤지 모를 때에는 그가 숨기고 있는 비기나 아껴둔 힘의 실체를 파악해야 해. 명심해. 압도적 승리도 좋지만 무인은 칼에 목숨을 거는 존재야. 결국 이기는 게 가장 중요해.
더없이 신중한 검후 설지연. 지금 그녀는 이 존재를 생사대적으로 간주하여 사력을 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이렇게 질질 끌면 내가 너무 재미가 없잖아!”
옆으로 내미는 손. 그의 손가락 다섯 곳에서 자색의 지공이 나오더니 나를 향하여 날아왔다.
기이한 각도에서 나온 지공. 그러나 유도탄이라도 되는지 나를 향해 궤적을 틀며 날아왔다.
“위험해 천아!”
지풍이 방향을 두 차례나 틀면서 나를 향하여 날아온다. 검후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차피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막아주는 건 무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는 건 포기하고 놈이 허락한 이 틈을 이용하여 승부를 보려함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비정한 선택이지만 나를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한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나는 그녀의 선택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나를 믿어. 어떻게든 내가 막아볼 게!”
마치 나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는 듯 정확하게 나의 주요 혈도 다섯 곳을 노리며 날아오는 자색 강기를 머금은 지풍. 나는 검을 사선으로 잡고서 이 다섯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다.
팅. 팅. 팅.
쑤욱. 쑤욱. 심장과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세 개의 지풍은 막았다. 그러나 어깨와 왼쪽 팔로 날아온 지풍은 막을 수 없었다.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갔다. 상당히 화끈하고 쓰라렸으나 이런 건 괜찮다. 저자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이니 이런 부상으로 막아낸 걸로도 충분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몰아붙여. 일단 이기고 생각하자.”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긴장감이 넘치는 팽팽한 흐름에서 고의로 틈을 보인 존재. 설지연은 그가 보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분노한 검후 설지연은 참으로 매서웠다.
쉬익 쉬익.
한번 잡은 기세를 절대 놓치지 않는 설지연. 그녀가 달리 검후가 아니며 괜히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유감없이 보였다.
주변을 돌면서 후퇴하던 어두운 존재.
서걱. 투욱. 결국 그의 검은 팔이 검후의 애검 불퇴에 의하여 잘려버렸다.
‘휴우. 다행이다.’
나는 안도했다. 팔이 잘리는 모습에 마음에 여유가 밀려와서다.
“크하하! 아주 재미있어.”
팔이 잘렸음에도 웃는 그. 그러고 보니 피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사르르. 쑤욱. 쑤욱.
잘린 어두운 팔이 공기 중에 비산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팔이 잘렸던 곳에는 하얗고 가녀린 여인의 것으로 보이는 팔이 생겨났다.
온몸이 검은데 팔 하나만 사람의 모습을 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경험이 많은 검후 설지연은 차분하게 계속 공격을 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강기를 두른 검후 설지연의 검이 놈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를 순식간에 잘라버렸다.
‘이 찝찝한 기분은 뭐지?’
남아 있던 사지와 얼굴을 베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 팔의 재생을 보았기에 마음이 불안했다.
“맙소사!”
나의 불안이 현실이 되었음을 알리듯. 그의 잘린 팔과 다리 그리고 얼굴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고 있었다.
가녀린 팔이 나왔고, 늘씬한 각선미의 다리가 나왔다.
팔과 다리만 따로 모아놓고 본다면 여인의 신체가 분명했다.
그리고 드디어 얼굴이 나왔다.
“이..이럴 수가!”
지금 나와 설지연 앞에 나타난 얼굴은 놀랍게도 검후 설지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는 도대체 뭐야?”
“나? 잘 들어라! 이제는 내가 검후 설지연이다. 이번 생은 계집으로 살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궁금함을 가지지 마라. 설지연. 너는 그저 무정검을 나에게 보여주고 사랑하는 너의 낭군과 함께 죽으면 그만이다. 내가 검후 설지연을 사상 최강의 무인으로 만들어 살아가마. 아~. 사상 최악은 덤이야.”
이제 얼굴이 생긴 존재. 그는 놀랍게도 설지연의 목소리와 똑같은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말을 하는 과정에서 검은색의 몸통까지 여자의 몸으로 변하는 존재. 나신의 이 존재는 복제한 대상이 검후 설지연이라 그런지 아름다웠다. 그러나 소름 끼치게 무섭다.
덜덜덜.
나는 몸이 떨렸다. 무언가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에게 죽음을 당하는지.... 나를 죽이는 존재가 누구인지...
마지막으로 내가 걱정한 검후의 폭주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의 원흉은 눈앞에 있는 이 가짜 검후가 되려는 존재의 소행이었다.
‘너였구나. 검후 설지연의 명성을 더럽힌 존재가.’
나는 검후 설지연과 천마 천미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녀들은 정말로 순수하게 나를 대했는데 나는 어떻게 내가 죽을지 염려했던 시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존재로 인한 것인데, 더 따듯하고 더 사심 없이 대하지 못했음이 후회가 되었다.
‘오늘의 위기에서 살아난다면 더 잘하자!’
특히 미안한 검후 설지연. 나는 그녀에 관하여 너무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 지연이는 그럴 여자가 아니었어.’
“나를 대신하겠다고? 그 오만함을 무너트려주마.”
검후 설지연이 하늘 높이 검을 들어 올렸다.
천마 천미영을 상대로 펼쳤던 무정삼검이다.
그런데 차이가 있었다. 지금의 무영삼검은 어제 보았던 무정삼검보다 훨씬 더 격정적이고 강맹했다.
‘천마가 살기를 죽였듯 검후도 어느 정도 전력을 숨긴 거구나!’
부상이 없는 대결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둘 모두 최강의 힘으로 싸우지 않았음이 납득이 되기는 했다.
“그래! 나는 이런 걸 원했다고. 크하핫!”
남성스러운 말투로 웃는 가짜 검후로 변한 존재.
‘소설에서 이따금씩 남성스럽게 말한 이유가 다 있었구나!’
하늘에서 내려온 신녀로 보이는 검후 설지연이 무정검의 모든 것을 단 세 개의 검에 담아 날렸다.
“나도 간다. 이것이 하늘을 죽이기 위해 만든 역천신혈공???血?이다.”
해가 지고 있던 주변이 밝아졌다. 저 가짜 검후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어둠을 다 빨아들인 탓이다. 그리고 잠시 후 더욱 어두워졌다. 저것의 몸에서 끝없는 어둠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깊은 심연의 어두운 구체를 들고서 검후 설지연을 향해 날아가는 가짜 검후.
검후의 검과 어둠의 힘이 부딪힌다.
펑. 펑. 펑.
세 번의 충돌이 일어났다.
퍽. 드드드득.
검후 설지연이 뒤로 날아가며 수십 걸음이나 물러났다.
울컥. 그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천강성의 기운이라는 걸 가졌다는 검후 설지연이 이렇게 피를 토했다. 도대체 저 가짜 검후의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호오 놀랍구나! 이거 조금만 더 강했다면 나의 본체를 공격할 수도 있었겠는데?”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나를 베기 전까지 내 앞에서 웃음을 보이는 우를 범하지 마라.”
검후 사부가 다시 검을 들었다.
조금 전과 다르게 차분하게 검이 흔들렸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모든 기들이 그녀의 검과 함께 움직인다.
‘이..이건 무정일검? 사부가 무공을 완성한 거야?’
혹시 사황마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발! 힘을 내자. 설지연!’
나는 그녀의 공격을 지켜보며 지다화 제갈상아에게 받은 진천폭렬환을 삼켰다. 부상을 당한 짐짝. 그것이 현재 나의 위치이다. 이런 치열한 대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너무도 화가 났고, 이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써야 함을 느꼈다.
나의 몸으로 상상도 하기 어려운 미증유의 힘이 생겨났다.
‘비록 제한이 있지만 무적에 가까운 힘을 느끼게 한다더니 사실이구나.’
나는 천뢰비협 설태천에게 받았던 비도를 움켜잡았다. 지금의 나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비도천하를 순수한 기의 힘으로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설령 실수하거나 제대로 날리지 못해도 상관은 없다. 나는 검후 설지연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야 한다.
만반의 준비를 다한 나는 둘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조금 전 세 개로 나눠졌던 검후 설지연의 검이 이제는 하나가 되어 날아간다. 이 검은 특별하지 않았으나 그 무엇보다 특별했다.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없앤다는 무정의 멸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정검無??의 최후인 멸살??을 보는구나.’
“너는 참으로 놀랍구나. 계집! 검후라는 이름이 너보다 잘 어울리는 이는 없을 거다. 이것은 본좌가 만든 천멸??. 너의 최후에 가장 커다란 영광이 될 것이다.”
조금 전 극도의 깊은 어둠의 구체가 검후 설지연을 공격했다면, 지금은 다르다. 투명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저기에 당하면 소멸된다.
‘검후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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