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운명의 날
* * *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나와 검후 설지연은 산을 내려왔다.
당장 이대로 길을 떠날까 고민도 했으나 얼마 전 제자가 된 사매인 황금화 북리연화가 신경이 쓰였다.
‘연화야 무공은 좀 천천히 배워. 넌 충분히 강하잖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후 설지연은 자신이 새롭게 얻은 제자에게 편지를 남겼다.
[연화야. 이 사부는 대사형인 위지천과 함께 먼 길을 떠나기로 했단다. 따로 연락을 할 터이니 너는 그동안 자유롭게 지내도록 하여라. 힘든 수련 전 잠깐의 휴식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검후 설지연.]
“이렇게 하면 되겠지?”
“괜찮은 거 같아요. 사부.”
찌릿. 나를 노려보는 검후 설지연.
“요랑 사부는 빼고.”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검후 설지연.
우리는 이곳을 떠나기 전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이후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났다.
이른 시간에 조용히 맹을 빠져나온 검후와 나.
재회필오. 어제부터 계속해서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네 글자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저 다섯 번을 채우지 못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을까?’
내가 아는 천마 천미영, 그리고 내가 느낀 천마 천미영은 결코 비겁하지 않다. 그녀가 정정당당하지 않은 행동을 통하여 무언가를 꾸밀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분명 천마가 나를 해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 같은데 저 다섯 번의 만남을 달성하지 못한 게 계속 나의 마음에 커다란 응어리처럼 남는다.
‘아 맞다. 월하명호가 있었지!’
“천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우린 이제 먼 길을 가는데 잠깐만 여기서 나를 기다려주지 주지 않을래?”
“왜?”
“아무래도 미영이가 신경이 쓰여.... 떠나기 전에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거 같아.”
“천마의 성격이라면 이미 떠나고 없지 않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만날 수 있을 거 같은 장소가 있어. 잠깐만 들렀다가 올 게.”
“처..천아. 혹시 천마가 너를 납치하는 거 아니야?”
나는 검후 설지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기억해. 설지연! 우린 이미 부부야. 어떤 경우에도 나는 오늘 반드시 너의 앞에 나타날 거야.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이 강호를 잠시라도 떠난다는 거야. 오로지 우리 둘만을 위해서 말이야. 여기 너의 손에는 내가 준 반지도 있잖아. 설마! 나를 못 믿어?”
“나 무조건 믿는다?!”
“응 믿어! 설령 미영이를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대로 보내는 건 아닌 거 같아서 그래. 내가 정말로 미안해.”
“쳇. 이렇게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그냥은 못 보내.”
말을 끝낸 검후 설지연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뭐 어떻게 하라는 건데?”
“흥! 바보가 아니면 모를 수가 없는 거 아니야?”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나는 괜한 말을 한 것이다.
조금씩 설지연을 향하여 다가갔다.
둑 둑 둑. 나의 심장이 빨라진다.
흐음. 흐음. 나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자 검후 설지연의 심장도 요동치는지 심장의 박동이 빨려졌다.
나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하려고 입술을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그녀가 눈을 뜨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스쳤다. 그리고는 설지연의 혀가 나의 입으로 들어왔다.
추룹. 수웁. 생전 처음 경험하는 키스. 달콤하고 감미로우며..... 결론은 그저 좋다.
그렇게 나와 그녀의 시간이 흘러갔다.
쪼옵. 드디어 떨어진 나와 그녀의 입술.
“내..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넌 갑갑할 정도로 너무 느려!”
“미..미안. 다음엔 속도를 올리도록 할 게.”
“그럼 저녁에 기대해도 되는 거야?”
“저녁?”
“응! 우리는 부부잖아.”
“괜찮겠어? 나는 밤이면 좀 다른데!”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나..나 검후야. 그런 걸 무서워하지 않아. 오..오히려 기대한다고!”
쪼옥. 나는 조금 전 하지 못했던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춘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다녀올 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너 돌아오지 않으면 나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그녀의 마지막 말은 분명한 사실로 여겨졌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돌아올 거야. 너를 두고 안 가.’
*****
월하명호月下??
정주의 주변에 위치한 여러 호수 중 가장 유명한 호수이다. 빼어난 경치와 풍경을 지닌 이곳은 달빛에 비친 호수를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와 평생을 함께 하길 빌면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 연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이다.
나는 지금 그곳을 향해가고 있다.
어린 시절 그녀와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늘 집에서만 놀던 우리는 어느 날 밖으로 길을 떠난 적이 있다.
천아. 거기 꼭 가야 해!
왜?
거기서 우리가 함께 하자고 소원을 빌어야 한단 말이야.
혼자 가서 빌면 안 되는 거야?
야! 나 이제 너 조수 안 한다?
미..미안 미영아. 가자. 내가 앞장을 설 게.
너 어딘 줄은 알아?
아...니.
치이. 나만 따라와! 내가 다 알아봤어. 앞으로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틀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틀었다가 계속 직진하면 된다고 했어.
그렇구나. 엄청 가까운 곳에 있는 호수네.
그럼! 어서 가자.
나와 천미영은 그날 길을 잃고 헤매다 운이 좋게도 마음씨 좋은 무림맹 무사를 만나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에게는 어떠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막연한 생각만 있을 뿐이다.
월하명호에 가면 그녀 천미영을 만날 수 있다.
천복자가 알려준 재회필오가 아니라도 나는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 적어도 이렇게 그녀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을지 여부는 당연히 모른다. 아마도 없을 확률이 더 높을 거다. 그렇지만 나는 어쩌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검후에게 말하고 달려왔다.
검후 설지연에게 진심으로 미안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내 심장이 이렇게 하라고 시키고 있다.
나는 경공을 펼치며 서둘러 월하명호에 도착했다. 일부의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호수를 한 바퀴 삥 돌면서 천미영을 찾으려 했다.
내가 그렇게 움직이려고 할 때.
“처..천아!”
들렸다. 나의 뒤에서 천마 천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미영아. 내 예상처럼 너도 여기 왔구나.”
“너. 너는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검후와 함께 있는 거 아니야?”
떨리는 천마 천미영. 무수한 죽음의 관문을 뚫고 온 그녀인데... 나를 보자 심하게 떨고 있다.
“너를 이대로 보낼 수 없어서 찾아왔어. 여기로 오면 떠나기 전에 너를 볼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그렇구나. 나는 너와 함께 여기 오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오기 너무 싫었는데... 그래도 여기로 와봤어. 나도 너처럼 여기로 와야만 너를 볼 수 있을 거 같았거든. 사랑해. 천아.”
타다닥. 수웁.
천마 천미영이 달려와 나에게 안겼다. 그녀는 내기를 운용하는지 나의 몸을 천근추의 수법으로 무겁게 짓눌렀고 나는 결국 뒤로 부드럽게 넘어졌다.
사람들도 많은데 그녀는 내 위로 올라왔다.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나에게로 고개를 숙이더니 그렇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쪼옥~.
몽롱하고 기쁘다. 그런데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무언가가 나의 몸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조금 섬뜩한 느낌을 주지만 결코 싫지는 않은 그런 무언가가 나의 몸으로 들어오는 기분이다.
짝짝짝.
와아아. 여자가 최고야!
저 남자 너무 부러운데?
천마 천미영이 나에게 입을 맞추는 걸 목격한 연인들 중 남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잠시에 불과했다.
찌릿.
검마 한비연이 눈에 힘을 주자 그녀의 강력한 기운에 주눅이 든 남자들은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옆으로 지나갔다.
키스를 하고 난 이후 나에게 기대어 누운 천마 천미영.
“천아. 그 아줌마 밑에서 조금만 참아. 내가 반드시 너를 되찾으러 갈 거야.”
“저~. 미영아.”
“응?”
“나 사부와 잠깐이라도 강호를 떠나기로 했어.”
“그렇구나. 설마 나를 피해서 도망가는 건 아니지?”
“그건 절대로 아니야. 그랬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천마 천미영.
“그 검후의 모진 수모를 각오하고 여기까지 나를 보러 와줘서 너무 기뻐.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천이가 어디에 어떻게 있어도 항상 너를 느낄 수 있고 찾아갈 수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쪼옥. 내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놓는 천미영.
그녀의 입술이 주는 강한 짜릿함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지려는 찰나 천미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게 있어. 너 이제 가! 계속 이렇게 함께 있으면 난 비무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될 거야.”
나에게 등을 보이는 천마 천미영.
나는 그녀의 등을 보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지금 그녀와 나의 운명이다.
‘그래도 뭔가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야.’
나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이지만 억지로 힘을 주어 월하명호를 떠났다.
‘우리 반드시 꼭 다시 만나자. 미영아.’
*****
망부석.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여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걸 현실로 목격했다.
검후 설지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는지 내가 떠나간 그 상태 그대로 있었다.
“나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최. 최대한 빨리 갔다 온 거야. 얼마 걸리지도 않았잖아.”
“흠. 흠.”
갑자기 코로 냄새를 맡는 검후 설지연.
“둘이 껴안았지?”
“....어.”
“둘이 입을 맞췄어?”
“....”
내 본능이 강하게 경고를 한다. 이건 답하면 곤란하다.
“그..그건 너의 자유에 맡길 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기서 다 알 수가 있거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뭐라도 말하며 위기를 모면하고 싶었다.
“이~ 이~. 했네. 했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검후 설지연. 솔직히 무서웠다.
“지..진정하라고! 이제부터 우리 둘만의 시간이잖아.”
“흥! 나만 바라보는 착한 남자라고 믿었는데. 히잉. 벌써 얼굴값을 하는 거잖아.”
토라진 검후 설지연.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나의 얼굴이 있는 곳으로 가져왔다.
“저리 치워! 다른 여자가 사용한 입술이잖아.”
“그전에 니가 먼저 사용했잖아. 한 번 더 사용해서 흔적을 지우면 너도 좋지 않아?”
“뭐어?”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이 나쁜 놈!”
나는 결국 검후 설지연과 다시 키스를 했다.
뭐든 시작만 어렵다고 하더니 한 번 키스를 하니 계속해서 기회가 생긴다. 누구나 날 때부터 바람둥이는 아니었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천마를 만나고 돌아와 다시 만난 검후 설지연.
나는 사부였던 그녀와 함께 그녀와 나를 모르는 곳을 찾아가 즐겁게 지내려고 한다. 무공도 배우며 행복하게 지내다 소설이 많이 바뀌었다 싶을 때 돌아오면 되는 거다.
*****
나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검후와 함께 이동을 했다. 어느덧 해가 지려고 한다. 나와 그녀는 무림인이다. 노숙을 하는 것에 불편함은 적다. 거기다 나는 노숙을 위해 몇 가지를 미리 준비하기도 했다.
‘이것이 초야를 맞이하는 나의 철저한 준비지!’
이렇게 산길을 통하여 사람들의 시야를 피해 멀리 사라지면 이제 행복한 미래만 남는 거다.
‘강호로 와 무공도 얻고 예쁜 아내도 얻었으니 나는 참 행복한 남자야.’
결과적으로 천마 천미영도 다시 만나 다섯 번을 채웠다. 비록 당장은 천마와 함께 하지 못함이 아쉽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녀를 다시 만날 거라는 확신이 있다.
“흥~ 흥~ 흥~”
“나랑 떠나는 게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콧노래를 부르는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검후 설지연.
나는 이 순간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때였다.
“부부나 연인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함께 죽는 게 가장 커다란 행복이지!”
기이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나와 검후 설지연의 앞에 사람의 형상을 한 어두운 무언가가 나타났다.
“너는 누구지?”
검후 설지연이 잔뜩 긴장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