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다가오는 운명 7
* * *
검후 설지연. 그녀가 내 앞에 있다. 언제나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사부가 돌아온 것이다.
“사형! 저도 왔어요. 이제는 정식 사매랍니다.”
그리고 황금화 북리연화도 있었다.
그녀는 내가 무아의 상태에 빠져있을 동안 검후 사부와 이야기를 잘 이끌어 내었나 보다.
살짝 굳어진 표정의 검후 사부.
“크음. 그..그게 그렇게 되었어. 천아. 너랑 상의를 했어야 하는데 미안.”
“저만 믿으면 된다고 했잖아요. 사형.”
검후 사부는 황금상단이 보유한 보은전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보타신니의 보은전은 특히나 그녀가 회수하고 싶었을 거라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아직까진 소설의 내용과 달라진 건 없어.’
예상했던 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음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변화가 없는 시간의 흐름이다.
‘중요한 건 사부가 지금의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내가 사는 거야. 이것만 바꾸면 되니까 다른 건 너무 의식하진 말자!’
“천아. 사부가 너에게 말도 하지 않고 사매를 받아들여서 화가 난 거야?”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자 사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아닙니다. 사부! 연화를 사매로 받아들이는 건 저도 기쁩니다. 무엇보다 제자가 어찌 사부가 하는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겠습니까!”
“연...화?”
내가 편하게 북리연화의 이름을 부르자 사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이리도 가까운 걸로 보이냐는 그런 느낌이다.
어쩌다 몇 차례 만남을 가졌을 뿐이라고 답을 하려고 할 때였다.
“사부님! 이제야 말씀드리는 건데 위지 사형은 저라면 무조건 다 좋다고 할 분이에요. 맞죠? 사형! 저보고 사매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정식 사매가 되어서 왔어요.”
도도한 분위기를 가진 북리연화답지 않게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그런 그녀와 다르게 갸우뚱하던 사부의 표정이 이제는 확실하게 굳어졌다.
“...”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최선으로 여겨져서다.
*****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무아의 상태에서 다양한 무공을 익혔다. 시간이 상당히 흘렀을 거라고 여겼는데 정작 눈을 뜨고 난 이후에 알게 된 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는 거였다.
황금화 북리연화가 합류하여 이제는 세 명이 된 우리 사제는 나란히 앉아서 점심을 먹으려 했다.
“너는 사형이 음식을 차리는데 가만히 있을 거야?!”
“저의 실수! 바로 도울게요. 사부.”
사부가 북리연화에게 눈치를 주자 연화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아..아니다. 일단 쉬어라. 첫날부터 밥이나 시키는 사부가 될 수는 없지.”
“사형이 혼자 하는 건 사매인 제가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사부. 제가 옆에서 사형을 열심히 도울 게요.”
“아니야. 사매. 쉬고 있어. 사부의 말처럼 오늘은 첫날이잖아.”
“....네. 근데 저 아쉬워요. 같이 만들면 재미있는데.”
그녀에게 뭐라도 시키려다 멈추게 된 검후 사부는 북리연화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우리가 먹을 식사를 간단하게 차렸다.
“사형. 저 저녁에 출발해서 황금상단에 다녀올 거에요. 오늘 생긴 사매가 며칠 없다고 너무 슬퍼하진 마세요.”
황금상단에 다녀올 거라는 사매. 검후 사부와는 미리 이야기가 된 모양이다.
“연화가 황금상단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
“저는 금방 다녀와요. 돌아오면 멋진 사형이 무공을 잘 가르쳐 줘요.”
“연화야! 사형이 왜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하니?”
“보통 사부가 굵직한 걸 알려주면 자잘한 것들은 대사형 가르쳐 주고는 하잖아요. 저는 그런 방식이 아~주 좋다고 봐요!”
“으음. 가능하면 하루는 쉬게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거 같구나.”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부?”
북리연화가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짧게라도 너에게 본 검후가 우리 남해 보타암의 무공을 가르쳐줘야 옳은 거 같구나. 연화야.”
“아~. 감사해요. 사부.”
북리연화는 빠르게 검후 사부의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즐거워 보였다.
“축하해. 사매. 내가 아는 사부는 무공을 가르치실 때 제자를 엄청 배려하여주시는 고마운 분이야. 넌 정말로 운이 좋은 거야. 내 사부라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사부는 세상에 오직 검후 사부 한 분만이야.”
“그럼! 나처럼 제자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부는 없어.”
검후 사부는 나의 말에 즐거운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나고 사부가 북리연화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히는 건 타인을 배려하는 협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비정함도 무공의 일부이지. 그러니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 사부.”
“기백이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지금부터 한 시진 동안 쉬지 않고 이 자세를 펼쳐 봐. 최소 천 번은 할 수 있어야 성의를 보였다 할 수 있어.”
사부는 무정칠십이검 중 다리를 들었다 내리며 공중으로 솟구치며 빙글빙글 도는 투로를 연화에게 보여주었다.
‘저건 두세 번만 해도 검을 던지고 싶은 투로인데, 저걸 천 번?’
너무도 진지한 사부의 모습. 검후 설지연이 집중하면 세상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그녀만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지금 검후전은 공기마저 그녀가 지배하는 느낌이다.
이 분위기에 짓눌린 황금화 북리연화는 조용히 무정칠십이검의 투로 하나를 따라 움직였다.
오른쪽 다리의 무릎이 가슴까지 올라왔다. 앞으로 다리를 째면서 검을 뻗는 북리연화. 그 상태에서 이제 회전하며 솟구쳐 오르면 된다.
헉. 헉.
몇 차례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힘든 수련이다. 처음에는 기대심 가득하던 북리연화의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사부의 표정은 무척 엄중했다.
“너의 사형은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후 무정칠십이검의 투로를 정확하게 체득하는데 오일밖에 걸리지 않았어. 연화야. 이런 자세로 임하면 같은 동문이라 할 수 있겠어?!”
사매 북리연화를 향한 사부의 다그침.
나를 올려쳐주는 사부의 말은 감사하지만 솔직히 부끄러웠다.
‘내가 투로를 짧은 시간에 배운 건 맞아도 사부가 몸이 기억하게 해 주었잖아요.’
“저는 절대 부끄럽지 않은 사매가 될 거에요!”
갑자기 눈에서 불을 뿜으며 집중하는 북리연화. 그녀가 이를 꽉 깨물고 진지하게 같은 자세를 흐트러짐 없이 반복한다. 사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북리연화는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더 집요했다. 시간이 흐르고 기어이 천 번을 채워냈다. 땀이 비오 듯 흐르는 그녀.
헉. 헉. 거친 숨을 내쉬고 있지만 눈빛은 살아있었고, 자신이 할 수 있음을 사부에게 증명했다.
“마음에 들어.”
짧은 한 마디. 사부의 진심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흠칫. 바로 다음으로 넘어간다는 말에 북리연화의 눈빛이 잠깐 무너졌다. 하지만 사매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다음으로 나아가는 사부.
그렇게 사매에 대한 사부의 교육은 한층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무아의 상태에 머물렀기에 쉬는 게 좋다는 사부의 권유로 가만히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부 고마워요!’
나는 뛰어난 자질을 지닌 북리연화의 모습을 보면서 사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첫째인 내가 사매들보다 못하면 권위가 서지 않음을 고려하여 사부가 나를 쉽고 빠르게 가르쳐 준 것으로 느껴져서다.
‘이제 진짜 문제를 고민해야 할 시간이야!’
혼인. 아까부터 내 머리에 가득한 유일한 주제다.
나를 만나기 위해 죽음의 관문에서 성장한 천마 천미영이 가장 중요하게 물었던 질문이다. 거기다 천뢰비협 설태천 또한 같은 말을 했다.
‘사부가 설마! 그 농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단 말이야?’
남자는 대부분이 다 그렇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와는 농담이라도 결혼하자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건 무의식과 의식 모두가 나서서 행동하는 방어기제였다. 내가 쉽게 농을 말한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사부가 좋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를 찾아봐도 그녀와 견줄 수 있는 여자는..... 좀 무섭긴 하지만 천마 정도?!...
나는 고민에 빠졌다.
모든 정황이 사부가 진실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나 역시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내가 다르다고 부정하면서도 너무 소설이 준 이미지에 갇혀 있었어!’
나는 검후 설지연을 처음 만났던 날부터 지금까지를 떠올려보았다. 여기서 소설의 그 느낌을 빼면.
아무리 봐도..... 그녀는 나에게..... 진실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저 여인은 결코 나쁜 자가 될 수 없다. 자칫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녀는 협을 알고 바름이 무엇인지 안다. 거기다 자신의 의지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단련했다.
‘이제부턴 사부를 믿자. 그리고 마음도 확인하자.’
정황이 모든 걸 사실이라 말하고 있어도, 사부의 마음을 직접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천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너무 깊은 고민에 빠져 사부와 사매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음도 몰랐다. 나는 사부의 말에 고민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사부가 이렇게 무사히 돌아와서 기뻤어요.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이 절로 떠오르기에 하나씩 다시 그려 봤어요.”
“너도 참~. 사매도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난 어떻게 하니!”
“그래요. 사형. 제가 괜히 사부에게 죄송하잖아요.”
“....?”
“....?”
나와 사부 둘 모두 그녀가 왜 죄송한지 궁금했다.
“사형은 사부 밑에서 그렇게 구르며 수련하고도 이렇게 아름답게 말하는데, 저는 조금 전에 속으로 욕하며 무공을 배웠단 말이에요.”
“....”
“너 그런 마음으로 배웠니?”
“하. 하하. 농담이에요. 사부. 제가 설마 그랬을까요. 사형이 얼마나 열심히 배웠을지 존경하며 정진했어요.”
연화는 식은땀을 흘리며 나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형은 그렇게 저를 사매로 두고 싶었어요? 사부가 자상하여 쉽게 무공을 가르쳐주니 검후님의 제자가 되는 건 행운이라 했잖아요. 저 그 행운을 생각하면 억울하지만 사형이라 참는 거에요. 이거 엄연히 사기인 거 필히 기억하고 저에게 따로 보상하세요.]
*****
북리연화가 황금상단으로 잠깐 떠난다.
사매는 잠깐 떠났다가 돌아온다고 했으나 이상하게 우리의 인연은 시간이 제법 흘러야만 다시 이어질 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서 너무 우울하고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건가?’
땀이 피처럼 붉어 한혈마라 불리는 멋지고 우수한 말 네 마리가 이끄는 사두마차를 타고 떠나가는 북리연화. 그녀는 나와 사부에게 금방 다시 만나자며 힘차게 손을 흔들고 떠나간다.
‘내가 살아서 꼭 다시 만나자!’
연화를 다시 만난다는 건 내가 살아남은 걸 의미한다. 다음을 기약하며 나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둑. 둑. 둑.
다시 돌아온 검후전. 사매가 떠나고 나와 사부만 남았다. 이상하게 몸이 떨린다. 아마도 그 혼인에 대한 것에 기인한 감정이 분명할 터.
“사부는 혹시 소수신녀를 알아요?”
“너 소수신녀를 알아?”
사부는 내가 소수신녀를 아는 게 무척 기쁜 듯 보였다.
“그럼요. 사부 이전 최고의 여중제일인이라 들었어요. 그리고....”
“그리고 뭐?”
사부의 눈이 커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대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서..성격이 드셌다고 하더라고요. 사부와는 다른 거 같아요.”
괜히 부끄러워 제자와 결혼했다는 걸 차마 말하지 못했다. 나의 대답에 실망한 듯 보이는 검후 사부.
“천아. 난 소수신녀를 존경해. 최근에는 그분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던 적이 있어.”
“아. 그렇군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사부가 그분의 삶을 따르고 싶은 거에요? 제가 아는 건 제자와 결혼했다는 거뿐이에요.”
“너는 참 짓궂은 남자야. 알면서 그런 거야?! 난 몰라아잉~.”
사부는 몹시 부끄러운지 빠르게 검후전으로 들어갔다. 결코 싫지 않은 눈빛을 하고서.
‘그 하오문도에게 고맙네. 좋은 정보를 줘서.’
나는 그 의뢰를 사부가 한 것 같았으나 구태여 중요하지 않은 거라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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