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다가오는 운명 6
* * *
자색의 평범한 무복을 입은 노인. 세월의 흔적일까? 자연스럽게 풍기는 그의 위압과 분위기가 공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위지천.”
나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소리이다.
무림맹의 안쪽에 위치한 검후전을 이리도 당당하게 들어오는 강호의 명숙이 과연 누가 있을까 떠올렸다. 없다. 나는 이 자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반갑습니다. 말학후배 위지천이 어르신을 뵙습니다.”
나를 찾아왔으니 최대한 반듯하고 바르게 인사를 했다. 이제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길 기다릴 따름이다.
“강호는 무정하나 비도는 더 무정하다. 너는 이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쿵.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지금 이 노강호인이 한 말은 ‘여인천하 영웅지로’에서 상당히 자주 나오는 대사이기 때문이다.
‘설마! 무영비객?’
중원 최고의 신비인 무영비객. 그가 상대의 목숨을 끊기 전 이렇게 말한다.
강호는 무정하나 비도는 더 무정한 법이지.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겠구나?!”
나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만약 이 노인이 무영비객이 분명하다면 그는 비도를 날리겠다 선언한 것이다.
‘이 자는 무영비객일까? 아니면 그의 스승일까?’
무영비객은 젊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가 이 자가 무영비객이 아니라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기에 무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이 노인이 반로환동을 하여 무영비객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후배의 부족한 식견으로는 어르신께서 저에게 천뢰를 날리려 한다고 봅니다.”
“너는 나에 관하여 연이에게 들은 적이 있구나. 그렇다면 너의 잘못을 스스로 알 터. 비도의 무정함을 원망하지 말거라.”
‘여..연이? 설지연 사부를 말하는 거야?!’
나는 그가 비도무정을 말하자 다급해졌다. 지금 이대로 있으면 매우 위험하다.
“이 후배는 부족합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 어르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 사연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너는 참으로 뻔뻔하구나!”
그가 손을 위로 들었다. 그러자 손에서 강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뇌..뇌정신공! 망했다.’
치지직. 치지직.
하늘을 향하게 든 노인의 손에서 황금색의 뇌기가 퍼져 나왔다. 뇌기의 최고봉이라는 뇌정신공을 운용하고 있다는 걸 의미함이다. 검후 사부를 잘 아는 이 노인의 정체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지금 그가 무영비객의 독문절학으로 유명한 천뢰비도술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손으로 뇌기를 만들어 비도에 담아 던지는 천고의 절학 천뢰비도술.
‘하필이면 대상이 나야?!!’
“위지천 너는 나의 질녀와 혼인을 약속하였다. 그럼에도 생활이 반듯하지 않더구나. 이 비도는 너의 그 방탕함을 벌하는 비도가 될 터. 기대하여라.”
지이잉. 높게 들린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강기가 뇌기를 머금은 비도의 형상으로 변했다.
‘나를 혼내려는 모양인데 어쩌지?’
비도 없이 뇌기로 만든 강기만 던진다는 건 죽일 의시가 없다는 걸 뜻한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저건 고문이라고!’
뇌기는 고문에 용이한 기운이다. 저렇게 기운만 날린다는 건 나에게 따끔한 고통을 주겠다는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받아라! 아직도 잘못을 알지 못하는 너에게 안기는 일침의 비도다.”
치지직.
쉬이이잉.
빛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비도. 그것은 나의 어깨에 꼽혔다. 나는 혼원대공이 한빙진기를 흡수하고 있어 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건 내가 대비하고 피할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찌릿찌릿.
“으아악!”
나의 온몸을 타고 뇌기가 흘렀다. 너무도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정신 차려라! 너는 장부다움을 보여라!”
나를 깨우는 노인의 말. 그러고 보니 끔찍했던 고통은 금방 사라졌고 몸도 멀쩡했다. 지금 상태만 보면 나는 그저 짜릿한 뇌기를 경험했을 뿐이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강력한 짜릿함을.
그때였다.
‘네..네 몸이 왜 이러지?!’
나의 몸에 들어온 뇌기가 혼원대공을 자극한 것 일까? 한빙진기의 흡수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갑자기 나의 몸을 타고 혼원대공과 한방진기 그리고 뇌기가 뒤섞이며 난동을 부렸다.
“감히! 나를 상대로 기세를 발산한다?! 뇌기에 당하고도 누그러들지 않다니... 너는 기개가 있는 놈이구나. 좋다! 다시 제대로 하겠다.”
‘아..아닙니다. 말로 하자고요!’
이건 진기의 폭주이니 오해라 말하고 싶은데 지금은 입을 열 수가 없는 상황이라 답답했다.
다시 하늘을 향해 손을 든 노인. 나는 문득 십대고수 중 활동을 거의 하지 않기에 이제는 빼야 한다는 말들이 오가는 비도를 쓰는 한 고수가 떠올랐다.
그는 바로 천뢰비협 설태천. 지금 내 앞에 있는 노인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연이와 혼인을 약속하고도, 다른 여인들과 어울리며 헤프게 웃음을 보인 벌이다.”
‘근데 아까부터 계속 사부와 혼인을 약속했다고 하지? 이런 말들은 사부가 아니면 설 대협이 들었을 리 없잖아!’
내가 의문에 빠졌을 때.
치지직.
강력한 뇌기를 담은 강기의 비도가 또 날아왔다. 진기가 폭주하고 있던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강인한 내공을 기반으로 칠성풍운보를 펼쳐 이것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가 비도가 두 개로 나눠졌다. 동시에 날아온 두 개의 비도에 그저 감탄사만 나왔고, 나의 양쪽 어깨에는 두 개의 비도가 박혔다.
슈웅. 슈융.
쑤욱. 쑤욱.
오른쪽과 왼쪽을 오가는 극렬한 뇌기.
‘크아악! 으아악!’
감히 단언하여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었던 모든 고통 중 이것이 최고다.
그런데.... 몸이란 참 신기하다.
혼원대공의 보호를 받는 상황에서 뇌기가 침투하니 한빙진기의 차가움이 정신을 유지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강력한 고통을 느끼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서 굳건하게 서있었다.
“호오! 바람둥이 치고 의지가 상당하구나. 하지만 나에게는 날려야 할 비도가 아직 많다. 이번에는 오룡비. 단단히 각오하여라.”
오룡비五??
하나의 비도에서 다섯 마리의 용이 날아온다는 것으로 유명한 비도술이다. 고작 하나의 비도에 불과하나 다섯 기운으로 나눠져 상대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제거하는 천뢰비도술의 비기 중 하나이다.
“이..이건 그럴 의도가 아니라....”
내가 해명하려 할 때 천뢰비협 설태천이 다시 강기로 만든 비도를 날렸다.
비도무정??無?.
비도가 무정한 건 날리는 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시전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짐에 기인한다. 비도를 날리는 자는 던지기 전에 모든 걸 결정해야 하며 날리는 순간에는 모든 정을 끊어야 한다.
천뢰비협 설태천의 손을 떠난 오룡비의 비기가 담긴 비도는 이제 회수할 수 없다.
황금색의 용 하나가 나에게 날아온다는 착각이 들던 순간. 그것들이 다섯 마리의 용으로 갈라지더니 다섯 방향에서 서로 다른 기운을 만들며 빙글빙글 회전했다.
퍽. 퍽. 퍽. 퍽. 퍽.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사지와 얼굴을 연결하는 다섯 부위에 정확하게 적중한 오룡비. 나는 조금 전에 겪었단 고통이 이것과 비교하면 장난에 불과했음을 대번에 깨달았다.
옷이 검게 타버릴 정도로 강력한 뇌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진기의 폭주 덕에 비틀거리며 서있었다.
“이..이제 끝난 겁니까?”
이렇게까지 했으면 끝났을 거라 생각하고 물었다.
“원래는 비도 하나만 날리려 했거늘 너의 기개를 보고 생각이 변했다.”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물으려 할 때 조금 전에 들어온 뇌기가 맹위를 떨치며 겨우 진정되어 가던 진기의 폭주를 다시 가속화시켰다. 나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기운들을 다스려야 하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기를 다스리며 천뢰비협 설태천의 행동을 지켜보는 나.
‘느낌이 이상한데?’
천뢰비협 설태천은 지금까지 뇌기가 섞인 강기의 비도만 날렸을 뿐이다. 진짜 비도는 날리지 않았다. 이것은 나를 죽이려는 의사가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제 마지막이다. 즐겁게 받아들여라.”
설태천이 자신의 겉옷을 옆으로 펼쳤다. 그러자 그의 옷 안쪽에 매달리듯 달려있는 36개의 비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비도천하를 시전하려는 거야?’
“너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아라! 이것이 바로 비도천하???下다.”
쉬이익. 부우웅.
설태천이 팔로 옷을 펄럭이자 36개의 비도가 모두 공중에 떠올랐다. 눈마저 황금의 뇌기를 방출하는 그. 전력으로 뇌정신공을 끌어올린 상황이 분명했다.
그 말은 천뢰비도술의 궁극의 비기인 비도천하를 날리겠다는 거다.
무림 최고의 고수 중 하나인 무영비객. 그가 사용하는 최후의 절초가 지금 나를 향하여 날아오려는 거다.
천뢰비협의 몸에서 나온 뇌기가 서른여섯의 비도로 옮겨간다. 천뢰를 품은 서른여섯 개의 비도가 그의 손을 떠나면 오로지 죽음만 남는다.
‘이건 도저히 막을 수 없어! 여기서 내가 죽을 운명인가?’
말이 나오지는 않으나 움직일 수는 있다. 나는 고민이 생겼다 지금 지다화 제갈상아가 준 진천폭렬환을 먹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이걸 먹으면 희망이 생긴다. 그렇지만 고수 중에 고수인 천뢰비협이 나에게 정말로 비도천하를 날릴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래! 승부다.’
나는 이상하게도 천뢰비협이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내 감에 목숨을 걸어 보자!’
“삼제도 정면에서 받지 않는 비도천하 앞에서 홀로 오연하게 서 있다니... 참으로 가상하구나! 너의 그 웅심을 높게 사 전력을 다하여 날리겠다.”
‘에이~ 설마?! 진짜로 날리진 않겠지?’
내가 의심을 품고 있을 때였다. 천뢰비협 설태천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잉. 쉬잉 쉬잉.
강력한 뇌기를 머금은 서른여섯 개의 비도가 하나씩 그의 손을 거쳐 하늘 높게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차이를 두고 날렸으나 같은 높이에서 동시에 멈춰선 비도들. 그것들은 엄청난 속도와 함께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받아라! 이것이 비도 설가의 오백년 한이 서린 비도천하다.”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치지직....
나를 향해 벼락이 몰려오고 있다.
거대한 태풍을 정면에서 맞이하여도 이것보다는 덜 무서울 그런 강한 벼락의 소용돌이가 나를 휘감아 오는 것이다.
‘하아~. 망했다. 잘못된 판단이야. 상아야 미안하다. 너가 준 구명의 기회를 내가 스스로 버렸어. 사부 그리고 미영아! 참으로 보고 싶다!’
나를 노리고 날아오는 비도를 마주하니 삶이 이렇게 끝나게 됨을 느끼게 된다.
이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지금의 이 공격은 사부나 천마가 와도 대신 막아줄 수 없다. 그만큼 가까운 곳에서 펼쳐진 천고의 절학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여인들만 만나다 오해로 남자에게 죽는 운명이구나!’
최후를 받아들이니 살짝 웃음기도 생겼다. 짧은 순간 온갖 상념을 다 떠올렸던 나의 몸으로 비도들이 날아와서 박힌다.
슝. 슝. 슝.....
쑤욱. 쑤욱. 쑤욱......
신체의 주요 혈도 서른여섯 곳을 동시에 공격받으니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몸도 느끼는 거다. 이건 표현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라고.
치지직. 치지직.
‘....???’
나의 몸에 서른여섯 개의 비도가 박혔을 때 그대로 시야가 사라졌다.
나는 어둠에 잠겼다. 그런데. 또렷한 의식이 있다.
‘죽으면 원래 이렇게 되는 거야?’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비도를 던진 천뢰비협 설태천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너는 질녀인 연이를 울리지 말거라. 그런 일이 생기면 이 천뢰비협이 다시 강호로 나올 거다. 상처가 많은 아이니 잘 보듬어 주기 바란다. 이 서른여섯 개의 비도는 연이에게 주고 싶었으나 그 아이는 이미 나를 능가하는 고수. 너희 둘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너에게 주고 가마. 비도천하를 완성하면 검후의 옆에 당당하게 서도 부끄럽지 않은 남편이 될 터. 너는 이제 비도 설가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자꾸나.]
천뢰비협 설태천의 말 이후 나에게로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뇌기와 그것을 사용하는 기술에 관한 것이다.
‘이건 뇌정신공과 뇌기잖아!’
천뢰비도술을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신공이 바로 뇌기를 몸에 품는 뇌정신공이다. 그것의 구결과 그걸 사용할 뇌기가 나의 몸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다음으로 비도를 만드는 법과 비도를 날리는 법이 머리로 들어왔다. 이것은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신비인 무영비객의 천뢰비도술이다.
가장 빠른 비도 일섬.
비도를 두 개로 나누는 쌍비.
다섯 개의 용을 날린다는 오룡비.
그리고 서른여섯 개의 비도로 천하를 평정한다는 비도천하까지. 모두 나의 머리로 들어왔다.
나는 그렇게 천뢰비도술을 이해하여 나갔다.
무의식의 흐름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이제 더 이상 관념의 시간을 가질 수 없었기에 눈을 떴다.
“천아. 깨어났구나! 의숙이 좀 과격한 분이긴 해도 누구보다 따뜻한 분이란 걸 너도 느꼈어?!”
내 앞에는 태양보다 더 빛나는 여인 검후 설지연이 있었다.
“사부! 돌아왔어요?”
“응! 너를 위해 내가 이렇게 왔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