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다가오는 운명 5
* * *
나를 바라보는 천미영의 뜨거운 눈빛. 그리고 그보다 더 뜨거운 그녀의 마음이 나에게로 전해진다. 천마 천미영은 진심으로 진실만을 듣길 원한다.
“알겠어. 미영아.”
나는 그녀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아! 나는 어릴 때부터 특이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어. 본능과는 다른데 비슷하기도 한 거라 설명하기 어려운 건데 그냥 감이라 부를게. 이 감이 나에게 느낌을 주는 때가 있어.”
“...”
“지금도 내 감이 너에 대해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어. 위지천은 내가 서문미영이 아닌 천마 천미영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게 맞아?”
두둥. 내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천미영이 짐작하고 있을 거라는 걸 전혀 생각한 적 없었다. 진심으로 놀랐다.
“맞아! 나는 처음 너를 보았던 날 천마라는 걸 알았어. 내 소꿉친구가 천마였구나를 느낀 거지.”
검마 한비연의 광명안이 더욱 밝게 빛이 났다.
“진실입니다. 천마!”
‘이런 건 구태여 전음으로 답해도 되잖아!’
검마 한비연을 상대로 이렇게 말하기가 좀 그렇고 이상하게도 묘하게 이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탓에 저런 부분은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렇구나. 솔직하게 말해줘서 정말로 고마워. 너에게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걸 물어보기 전에 나의 이야기를 먼저 할 게. 내가 질문만 하는 건 아니잖아!”
천미영은 내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이런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너의 이야기?”
“응. 나의 인생!”
“나는 꼭 듣고 싶어!”
정보가 많아지면 그걸 활용하는 방안도 늘게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천미영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도 물론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상대가 이렇게 진심으로 다가오면 나 역시 진심으로 다가가야만 한다. 그녀가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을 귀로 듣고 가슴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하겠다.
“아버지를 미워하셨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나는 신교의 교주 자리를 담당하는 천가의 핏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자랐어. 그저 조용히 숨어서 지내던 내 삶에 옆집으로 이사 온 넌 태양보다 더 빛나는 존재였어. 나는 그냥 천이가 좋았어. 너와 함께 있는 것이 그저 막연하게 좋았어. 내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너도 그럴 거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생각했어. 물론 너도 그렇냐고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어. 혹시 아니라고 말할까 겁이 나고 두려웠거든.”
나는 그녀를 응시하며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신교로 복귀하는 걸 택했어. 나는 신교가 정말로 싫었어. 신교에는 위지천이 없으니까. 거긴 나에게 어떠한 의미조차 없는 곳이었어. 매일 돌려보내라고 울고 있는 나에게 누가 그러더라. 천마가 되면 여길 나갈 수 있다고. 그래서 천이가 없는 세상에서 사느니 천마가 되는 길을 택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렇게 아비규환의 지옥보다 더 끔찍한 천마오관을 버틸 수 있었어. 여길 나가면 내 앞에 너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너의 앞에 왔어.”
자존심이 워낙 중요하여 목숨을 버리는 경우도 많은 존재가 바로 천마다. 그런 당대의 천마인 천미영이 나에게 이렇게 절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저 진실이니까 담백하게 말하는 것뿐이다.
“나에게 오기 위해 그런 험난한 여정을 달려왔다니... 너에게 그저 고마워! 나라는 사람이 너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진실입니다. 천마.”
검마 한비연의 진실이라는 말은 천마 천미영의 솔직한 고백에 울컥한 나의 정신을 돌아오게 만드는 신묘한 힘이 있었다.
“나는 너를 다시 만나고 느꼈어. 천아! 너는 내가 이렇게 할 가치가 있는 남자 정도가 아니야! 너는 나에게 운명의 끌림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 유일한 남자야!”
“미영아. 고마워!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진실이라는 말을 대체하는 검마 한비연. 그녀는 자신만의 분위기를 타는 흐름이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궁금하고 알고 싶은 걸 하나씩 말할 게. 천아!”
“뭐든 다 이야기해. 미영아!”
“너는 나를 다시 만났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어?”
“떨렸어. 뭐라 표현할 수는 없는데, 떨렸어. 너의 말처럼 운명이 나를 떨리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그런 기분을 느꼈어.”
“진실입니다. 천마.”
“너..너도 나와 같았구나!”
천미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자 나의 기분도 덩달아서 좋아졌다.
“너는 검후 설지연과 사제지간 이상의 사이야?”
“미영아. 군사부일체라고 하잖아. 사부와 나는 그만큼 가까워. 너가 말하는 사제지간 이상의 기준이 어떤 걸 말하고자 하는지 솔직히 모르겠어. 사부는 나에게 가족이야. 이것 이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진실입니다.”
“너는 사부와 혼인을 이야기했다고 했어. 이건 정말 농담이 맞아?”
“당연하지. 사부는 나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 분이야.”
“진실입니다. 천마!”
‘뭐야? 이 부분이 중요했어?’
유독 방금 질문에 대하여 검마 한비연이 강조하듯 힘을 주며 답했다.
‘검후 사부가 어떤 모습을 미래에 보이는지 안다면 이런 질문은 할 필요도 없을 텐데. 미영이는 이런 걸 의식하고 있었구나!’
“너는 정도제일인의 제자이고, 나는 마도의 하늘이야. 우리 둘 사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나는 정과 마에 대한 구분을 하던 삶을 살아온 자가 아니었다. 천마가 나와 가까운 존재로 지내는 건 적어도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우리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가 대화로 잘 해결이 가능한지 여부일 뿐이었다.
“진실입니다.”
“아~. 그렇구나. 너는 참 따뜻하고 진솔했구나. 천아. 나 지금 좀 많이 감동이야!”
천마 천미영의 표정이 계속해서 밝아지고 있다.
“마..마지막으로 물을 게. 너는 어릴 때 나와 했던 약속을 지킬 마음이 있어?”
약속이란 소중한 거다. 나는 당연히 지킬 마음이 있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으나 당연히 지킨다.
“그거야 너무 당연한 거지. 너는 왜 질문이 빤한 것만 하냐!”
마지막인데 너무 쉬운 질문이라 빠르게 답했다. 이래야 그녀와의 친밀도가 올라간다는 의중도 분명 있었다.
“진실이 확실합니다. 천마!”
“그..그랬구나. 그랬어! 내가 너에 대한 오해의 마음이 조금 생겨서 혼자 불필요한 걱정을 했던 거야!”
천마 천미영이 갑자기 몸을 뒤로 돌렸다. 나에게 등을 보이는 그녀. 천하의 천마가 나로 인하여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닌가 싶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은 천마 천미영이 다시 몸을 돌리더니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나의 팔을 잡으며 팔짱을 꼈다.
천미영만 보느라 의식하지 못했는데 검마 한비연은 어느새 안대를 다시 착용하고 있었다.
‘거짓말 탐지기 광명안은 너무도 무서웠어.’
“우리 어릴 때 서로 여보랑 남편이라고 부른 거 알지? 남편!”
“그..그랬나?”
“그게 끝?”
“여..여보?
“다들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나만 질문을 했으니까 천이 너도 나에게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나는 너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지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천마 천미영이 나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이걸 물어도 되는지 고민이 되었으나 물어보기로 했다.
“미영아. 너 나를 죽일 거야?”
“뭐어? 내가 왜? 너를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일을 내가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그런 걸 생각조차 하기 싫어!”
“휴우. 그렇구나! 다행이다.”
“천아. 너 왜 그렇게 끔찍한 질문을 한 거야?”
왜 이런 질문을 하냐고 묻는 천마 천미영의 기세에 나는 당황했다.
“그..그러니까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를 믿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자는 걸 말하고 싶었어.”
와락. 천미영이 자신의 발꿈치를 들며 나의 목을 잡아당겨서 끌어안았다.
“좋아. 너무 좋아! 우리 항상 서로를 믿자! 믿어! 언제나 변하지 말고 꼭 믿어!”
그녀의 품이 주는 따뜻함과 그녀가 하는 진실의 말. 이 모두가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나도 그녀를 꼭 껴안았다.
‘내가 적어도 천마에게 죽는 건 아니구나!’
나는 천미영과 함께 점심과 저녁을 먹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그녀와 헤어져 무림맹으로 복귀하고 있는 중이다.
[위지 공자님. 잠깐 옆으로 오세요.]
검마 한비연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녀가 있는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자. 한비연이 안대를 벗고 있었다.
‘아니 왜 안대를 벗고 있는 거야. 무섭잖아!’
투명하여 더 신비롭고 아름다운 눈 하나가 유독 빛이 나는 검마 한비연. 저렇게 아름다운데 무섭게 다가오는 눈이다.
“잘 들어요. 위지 공자. 저의 광명은 제가 거짓을 말할 경우 붉은색의 빛이 나와요. 제가 사소한 거짓도 할 수가 없게 된 탓에 여인임에도 안대를 차고 있는 거에요.”
“그렇군요.”
“못 믿으시는 거 같은데 보여드리죠. 위지천 공자는 못 생겼어요. 아주 쓰레기 같은 추남이에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눈이 붉은빛으로 변했다.
“이제 아시겠죠? 제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여인인지!”
“....아. 네.”
“잘 들어요. 오늘 천마께서 하신 말에는 단 하나의 거짓도 없어요. 그분의 진심을 꼭 알아주었으면 해요.”
검마 한비연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알려주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검마 한비연.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보자기로 싼 무언가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이게 무엇인지?”
“제가 만든 거에요. 위지 공자께 잘 어울릴 거에요. 지금 확인을 해보세요.”
“일단 고맙습니다.”
무언가를 준다고 하니 고맙다는 말부터 하기로 했다.
“거짓이군요.”
“죄..죄송해요. 고맙단 말은 일단 해야 한다고 배워서요.”
“이번엔 진실이군요. 저는 이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호호.”
‘긴장 안 하겠냐?!’
보자기를 풀자 천미영이 나에게 주었던 것처럼 자수가 놓인 외투가 하나 있었다. 검을 든 악마로 보이는 무언가와 검을 든 용이 서로 안고 있는 이상한 자수.
‘이거 설마 검마와 검룡이 가깝다는 아니겠지?’
“이걸 왜 저에게?”
“천마께서 제가 만든 것을 위지 공자님께 주라고 했어요.”
“미영이가요?”
“네. 분명 천마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럴 리가 없을 거 같은데?’
나는 의심스러웠으나 검마의 한비연의 눈은 하얀빛이다. 이상하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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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있었으나 굉장히 숨 가쁘고 피곤했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
나는 밤이 되어서야 검후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이곳이 집과 다름이 없어서 들어오는 순간 마음이 포근했다.
그런데.... 이 포근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억! 누..누구신지?”
나는 검후전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남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