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다가오는 운명 4
* * *
넓고 어두운 공동.
그곳의 가장 높은 곳에는 커다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뚝. 뚝. 뚝.
높은 천장에서 한 방울씩 검은색의 액체가 의자 위로 떨어졌다. 액체는 신기하게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차츰 쌓여가며 점점 뭉쳐져 가는 중이다. 그렇게 모이고 모인 검은 액체는 놀랍게도, 이제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갖춰가기 시작하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액체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의자 위. 그것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두운 형상은 분명 사람처럼 보였다.
구체화된 입은 없으나 그것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돌아왔다.”
사람과 비슷한 형체를 갖춘 무언가를 통하여 나온 기괴한 음성. 섬뜩함이 어두운 동굴을 가득 채웠다.
나지막하게 주변으로 소리가 퍼져나가자 밖에 있던 누군가가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중년의 남자. 그는 어두운 형체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돌아오셨군요. 주군.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의 부활을 위해 고생했다. 만악.”
“아닙니다. 혈악의 희생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어두운 존재.
“그럴 거라 짐작은 했다.”
“저희가 부족하여 죄송합니다. 주군.”
만악이라 불린 자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부족하여 금마의 벽에 갇혔다.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다.”
“...”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피로 씻는 것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만악! 주군의 위대한 대업을 항상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악은 크게 감동이라도 한 듯 격앙된 모습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준비는 되었느냐?”
“물론입니다. 주군.”
“그래. 누구냐?”
“검후 설지연. 현 천하제일인입니다.”
“후후. 계집이 천하제일이라?! 세상이 너와 혈악으로 인하여 아주 재미있어졌구나.”
“죄송합니다. 이게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주군.”
“나 역시 이렇게 해서라도 탈출하려 했었다. 그러니 너를 탓하려 함이 아니다.”
“더 이상 늠름한 주군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니.... 원통합니다.”
*****
사부가 사황마제 패무강을 이겼다는 소식이 중원을 강타하고 있다. 드디어 커다란 산을 넘은 검후 사부는 무림맹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승리할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결과가 나와야 마음이 편해지는 건 가까운 이에 대한 걱정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이제 얼마 후면 사부가 돌아올 거고 나는 어떻게 죽음의 위기를 맞이할까?’
나의 착각일지도 모르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기에 구명의 해답은 여전히 찾기가 어렵다. 당장은 천복자에게 들은 다섯 번의 만남을 반드시 이루자는 것 이게 중요할 따름이다.
‘분명한 건 여자에게 죽을 팔자로 느껴진다는 거야!’
이 세상에 와 알게 된 자들 중 남자는 거의 없다. 작은 친분이라도 있는 건 개방의 용걸개 소천광이 유일하다.
‘설마 나와 연관이 있는 여인들 중 누군가를 연모하는 남자가 오해로 나를 죽이는 건 아니겠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다양한 상상으로 나의 머리가 가득 찼다.
“오빠! 아까부터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는 거에요? 옆에서 보고 있기가 참으로 힘들어요.”
“어..언제 왔어? 상아야.”
“온지는 제법 됐어요.”
“그렇구나.”
현재 나는 한방진기를 혼원대공으로 흡수하는 단계라 일시적으로 내공을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옆을 바라보지 않으니 지다화 제강상아가 왔음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제가 왜 지다화라는 별호가 생겼는지 아세요?”
“똑똑해서 그런 거 아니야?”
“흐흐. 오빠가 그렇게 말을 하니 유독 기분이 좋아요. 제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조금 있어요. 그런 연유로 다른 이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작은 도움을 준 때도 있답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가 아니라 저와 함께 고민을 하자고요! 오빠는 늘 보면 꼭 여자를 갑갑하게 만들어요. 그거 나쁜 거니까 필히 고치세요!”
제갈상아가 고민을 함께 이야기하자고 했다. 나는 그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한다.
“고마워 상아야. 너는 지혜로우니까 신기한 묘수가 너에게서 나오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는 해.”
“그..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저는 오빠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아요.”
“실망은 무슨! 이렇게 도와주려는 마음만으로 난 이미 감동이야!”
“어서 이야기해보세요. 오빠의 한숨을 지켜보느라 저 힘들었어요.”
어떠한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이렇게 나서는 제갈상아의 마음씨가 너무 고마웠다.
“살벌한 자들 여럿이 여기저기에서 나를 죽이려는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들은 강한가요?”
“응. 엄청 강해. 세상에서 최고를 다투는 자들이야!”
“후우. 죄송해요. 오빠. 그럼 죽어야 해요. 그건 방법이 없어요.”
퍽. 물리적 무언가가 없었음에도 한 대를 맞은 느낌이다. 대단한 조언을 기대했던 건 아닐지라도 죽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오빠 잘 들어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이 있어요.”
“...?”
“운명은 정해진 걸로 보여도 실상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자와 변하려 하지 않는 자에게 그 운명은 정해진 거랍니다. 그러니 살아나갈 방법을 보지 마세요. 그 어떤 자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들이닥쳐도 피하지 말고 정면에서 싸우세요. 운명이란 부딪히며 이겨야만 새로운 운명이 만들어져요.”
퍽. 이번에도 한 대를 맞은 기분이다. 제갈상아의 말은 옳았다. 나는 이 운명이라는 놈을 비틀고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를 찾아올 이 미래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은 했던 적이 없는 거다.
“실체를 모르는 적만큼 무서운 건 없어요. 하지만 실체를 알면 방법이 생겨요. 아무리 상대가 강하고 대단해도, 반드시 방법은 있을 거에요. 그러니 스스로를 믿어요.”
“고마워 상아야!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어. 넌 역시 지다화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뭐에요~! 거기서 갑자기 훅 들어오면 저보고 어쩌라는 거에요.”
제갈상아는 나의 말에 기분이 좋은지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돌려 나의 뜨거운 시선을 회피했다. 그녀의 목마저 붉어진 것을 보니 부끄러운 모양이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제갈상아는 보이는 것과 달리 칭찬에 약한 여자이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듯 보이는 제갈상아.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그렇게 해야 할거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그녀의 주먹 아래로 손바닥을 펼쳐서 내밀었다.
“...?”
이게 맞는지 고민이 생기려 할 때, 제갈상아가 주먹을 풀며 나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아주 작은 금빛의 구슬로 보이는 환이었다.
“이상하게 오빠에게 뭐라도 하나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주고 싶은 게 저에게 있네요.”
“이건 뭐야?”
“진천폭렬환이에요. 이걸 복용하면 한 시진 동안 무적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부작용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단! 두 번째 복용인 경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환이에요.”
“대..대단한 거잖아?!”
“이건 제가 생색을 내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이제는 사라진 환이라 세상에 딱 하나 존재하는 거 명심하세요.”
“고..고맙기는 한데 이렇게 귀중한 것을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조금 전 오빠와 이야기할 때 느꼈어요. 이 진천폭렬환은 오빠를 위해 제가 잠시 가지고 있었던 거에요.”
“...”
너무 대단한 물건이라 여전히 받아도 되는지 고민이다.
지다화 제갈상아는 이런 나의 마음을 안다는 듯 자신의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더니 펼쳐진 내 손바닥을 닫았다.
“이미 제 손을 떠나서 제 것이 아니에요. 오빠! 이 진천폭렬환이 있으면 어떠한 위기도 한 번은 넘길 수 있을 거에요. 그러니 어떤 위험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밀고나가는 이 제갈상아가 믿는 남자다움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그리고 뭐?”
갑자기 검후전 밖으로 떠나가는 지다화 제갈상아. 그녀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검후전을 나갔다.
“...... 절대로 죽지 말고 언제나 저의 곁에 있어주세요.”
나는 지다화 제갈상아의 마음에 감동했다.
‘상아는 정말 착했구나!’
기질이 강하긴 해도 마음씨가 착하고 통이 큰 여인이라는 걸 느꼈다.
‘내가 이 위기를 넘기면 잘해줄게!’
휘이이이잉. 바람이 분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매서운 눈빛이 있음을.
‘위지천! 너는 도대체 뭐하는 남자이냐! 여인들에게 얻기만 하는 남자라니! 제비와 다를 바가 전혀 없지 않느냐! 나의 인내에 한계가 느껴지는구나!’
숨어서 위지천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남자의 몸에서 강력한 뇌기가 내뿜어져 나왔다.
지지직. 지지직. 지지지직.
‘여기 있다가 무슨 일이 발생할 줄 모르겠어!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그래도 화가 나면 그때 이놈을 혼내자!’
남자는 조용히 검후전을 떠나갔다. 그는 자신이 오랜만에 누군가를 크게 혼을 내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
오늘은 나의 소꿉친구 천마 천미영을 세 번째 만나는 날이다.
나는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조용한 산장을 찾았다.
“미영아. 나 왔어!”
나는 살짝 부끄러운 감도 있으나 그녀가 수를 놓아준 쌍용애(두 용의 사랑이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를 입고 여기를 찾았다.
싸늘하다. 무언가 느낌이 이상하다. 내 몸이 떨리며 지금 긴장해야 하는 순간이라 경고한다.
“천아. 안으로 들어와!”
평소라면 밖에 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이할 미영인데 들어오라고 말한다. 쌀쌀한 느낌의 어투는 아니라 안심이 되지만 그래도 불안함이 사라지진 않는다.
끼이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대전의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의자에 천미영이 앉아 있고, 그 옆에 검마 한비연이 서있었다.
“잘 지냈어?! 너가 준 이 옷 너무 멋지지 않아?! 제대로 마음에 들어!”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밝게 만들기 위해 미소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꺼냈다.
“후우. 천아. 나도 솔직하게 말을 할 테니까 너도 솔직하게 말을 해줘. 그렇게 할 수 있어?”
위엄과 살기가 아닌 간절함.
한숨을 내쉬며 말을 하는 천미영의 눈빛은 간절함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두려움마저 담겨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진실을 원하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래! 상대가 천마라 하여 피하지 말자!’
나는 전날 제갈상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겠다 마음먹었다.
“알았어. 미영아! 너의 말에 반드시 솔직하게 답을 할 게!”
“고마워. 천아! 이건 확실히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혹시라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
“...?”
나는 조금 전의 다짐이 살짝 흐트러질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나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마 천미영이 옆에 서있는 검마 한비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신호를 받은 검마 한비연이 안대를 벗었다.
그러자 안대에 숨어 있던 투명할 정도로 맑은 그녀의 눈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분명 같은 눈인데 한쪽에서만 빛이 나오는 상황. 나는 놀라움을 느껴 잠시 멍해졌다.
“이 눈은 광명안이라는 거야. 저 광명의 눈은 진실을 밝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부디 거짓으로 나를 속이지 말아 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