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다가오는 운명 3
* * *
“누구~게?”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뒤에서 은밀하게 접근하여 살포시 나의 눈을 가린 천마 천미영. 그녀의 손은 세상을 벨 것처럼 강인하나 나에게는 포근하고 따뜻했다.
‘이건 어린 시절처럼 편하게 놀자는 거잖아!’
나는 소설의 기억으로 인하여 특정한 인물들을 대할 때에는 선입견이 조금씩 있다. 천하의 천마가 정말로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면 나를 찾을 리 없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로 했다.
“으음. 검후 사부님?”
스윽. 손이 내려갔다. 아닌 데가 나와야 하는데 그대로 내려간 손이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는 천마 천미영이 있었다. 내 친구 미영이는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하얗다. 그래서 시리도록 무서운 느낌을 풍기는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장난이야. 장난! 내가 설마 미영이 너를 모르겠어?”
“...”
“넌 화가 난 모습도 참 예쁘구나. 나 좀 충격이야! 이런 예쁜 모습을 보고 싶어서라도 계속 놀리고 싶어지는데?”
“......진...짜?”
“그럼! 나 눈이 상당히 높은데 넌 항상 나를 놀라게 해!”
“그...러면 특별히 봐줄게. 단! 다시는 이런 장난을 치지 마. 나 하나도 재미없어!”
“알았어. 어서 가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천미영의 어깨를 잡으며 앞으로 이끌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돌탑들이 길게 늘어지는 돌담길이다.
‘출발도 하기 전에 땀으로 샤워를 했잖아. 근데 이 기분은 뭘까?’
나는 사부를 처음 만났을 때 굉장히 떨렸다. 그리고 천마를 처음 보았을 때 역시 굉장히 떨렸다.
누구라도 이 떨림은 두려움에 기인하였다고 여길 것이다. 이들은 세계관 최강자들이고, 사람의 목숨쯤이야 가볍게 처리할 수도 있는 여인들이니 이런 생각은 분명 타당하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최근 이 생각이 달라졌다. 이유는 검후 설지연 사부 때문이다. 사부를 만났을 때의 떨림에는 분명 즐거움도 있었다. 이렇게 떨어져 있어 보니 그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진다.
‘이런 마음이 연모의 감정이라는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아닌 거 같잖아!’
얼마 전 나는 검후 사부를 여자로 좋아하고 있지 않나 싶어서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천미영을 만나고 생각이 틀어졌다. 나는 천미영에게서도 사부와 똑같은 마음을 느낀다. 이러니 머리에 혼선이 올 수밖에 없다. 이 여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사부를 볼 때처럼 떨리고 긴장하게 된다.
이 특별한 두 여인에게서 느끼는 감정에서,
마지막 보스니, 마도의 하늘이니 같은 색안경을 제외하면,
그저 특별히 아름다운 여인을 호감으로 바라보는 순수한 남자의 마음만 남을 뿐이다.
‘난 바람둥이 거나 이상한 놈이 분명해!’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바람이나 양다리는 나쁜 거라고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은 탓일까? 내가 그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양다리의 마음은 아니겠지?
“천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너랑 이 길을 걸으니까 참 좋다고 생각했어!”
“나도 그런데. 너 여기는 몇 번째야?”
“...어. 두 번째일 걸?!”
“그렇구나. 누구와 왔는데?”
“사부랑 왔어!”
“...”
“그게 궁금했어?”
“여기 돌담길에 돌을 쌓으며 백년회로를 빌면 오래도록 잘 산다고 하는 길이야. 연인들만 오는 길이라고! 근데 사부랑 여기에 오는 사람도 있네?!”
“그런가? 나는 사부가 여기로 향하자고 하기에 그냥 발길이 닿아서 온 건 줄 알았어. 하하.”
“그렇구나. 너도 돌탑에 돌을 올렸어?”
“어! 당연하지!”
“어디야?”
나는 이상하게 천미영이 그 돌탑을 무너트리지 않을까 싶었다.
‘나와 사부만 쌓는 것도 아닌데 혹시라도 무너트리게 할 순 없지!’
“미안! 기억이 나질 않네.”
“나는 알 것 같은데... 저거 아니야?”
천미영이 손으로 정확하게 가리켰다.
‘사부가 강기로 찍어 눌러서 박아버린 탓에 대번에 티가 나는구나!’
절대 무너지지 않게 돌탑을 만든다며 사부가 돌탑을 붙여버리듯 내공으로 눌렀다. 이곳에 있는 많은 돌들 중 저 탑 하나만 그러니 천마 천미영이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다.
“아~ 저기가 맞는 거 같다. 너도 올려!”
나는 생각을 선회하여 저곳에 천미영도 돌을 올리도록 유도했다.
“나. 나도?”
“여기에 오는 이유가 돌을 쌓으려는 거잖아. 너도 절대 떨어지지 않게 돌을 올려! 그럼 얼마나 좋아!”
“그래 맞아! 저기에 올리면 내가 더 위에 올리는 거잖아. 그런 뜻 맞지?”
“그...렇..지?!”
“너의 마음을 알겠어!”
천미영은 돌을 하나 들더니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검후 사부의 돌 위에 자신의 돌을 올렸다.
스스스슥. 돌이 천마의 강기에 의하여 결합되며 박혔다. 사부가 이미 아래의 돌들 전부를 결합한 상태. 이제 이 돌탑은 태풍이 휘몰아쳐도 무너질 리 없을 테다.
*****
“자 이거 입어! 만나면 바로 주려고 했는데 너가 장난을 치는 탓에 이제야 주잖아!”
천마 천미영이 나에게 두 마리의 용이 뒤엉켜 키스를 하는 문양이 멋지게 새겨진 옷을 건넸다.
‘용 두 마리인데 왜 이렇게 외설적인 기분이 들지?’
긴 몸통을 가진 용이 서로 뒤엉켜 키스를 하자 주변에서 비바람과 벼락이 치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이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다르게 접근해야 하나 싶어 넌지시 물었다.
“이거 둘이 싸우는 거 아니지?”
“서로 입술을 박으며 싸우는 건 없어! 두 마리의 용은 서로를 사랑하는 거야!”
“그렇구나. 아주 격정적이야!”
굉장히 잘 만들었는데 하필이면 왜 이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입어 봐! 어제 하루 종일 이거 만들었거든. 이제 보람을 느낄 시간이야!”
살짝 부끄러웠으나 어제 하루 종일 만들었다는 말에 바로 입어야 함을 깨달았다.
‘본 천마의 시간이 너에게 우습더냐? 이러고 나를 팰 수도 있어!’
나는 외투를 벗고 천미영이 준 옷을 입었다.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천미영이 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한동안 이것만 입어. 자 약속!”
“그래! 넝마가 될 때까지 입을 게.”
힘 있는 나의 대답에 미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꼬르륵.
날이 발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만났으나 어느덧 해가 가운데에 왔다.
‘사부도 그렇고 천마도 그렇고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니까 금방 배가 고프네.’
나는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허기를 느꼈다.
“미영아. 저기로 가서 밥 먹자!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게 있어.”
“나를 위해?”
“당연하지! 깜짝 놀랄 거야!”
“나. 나 기대한다?”
“엄청 해! 실망하지 않을 거야!”
나는 자신이 있었다. 들뜬 표정을 숨기지 않는 천미영.
나는 그녀를 향해 오늘 준비한 비장의 한 수를 공개했다.
“잘 봐! 이게 바로 소풍의 꽃이라는 김밥이야!”
“김...밥?”
“응!”
나는 천미영과 먹기 위해 온갖 종류의 다양한 김밥을 만들었다.
‘치즈 김밥을 못 만든 것이 아쉽지만 일단은 어쩔 수 없어!’
김과 밥 속에 형형색색의 요리 재료들이 어우러져 있는 걸 본 천미영은 크게 감동한 표정이다.
“이..이걸 오로지... 오직... 나만을 위해서 만든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자 아~ 해! 내가 넣어 줄 게.”
“아~.”
나는 김밥을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김밥을 먹는 천미영.
‘사부나 천마나 내가 주는 밥을 먹을 때가 제일 아름답구나!’
식사를 하고 있을 때면 세상을 뒤흔드는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두 여인이 지닌 매력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세상을 챙기는 나의 따뜻한 마음이기도 하지!’
나는 이 세상이 나에게 큰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오늘도 이렇게나 열심히 세상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니 말이다.
“내가 먹는 게 그렇게 좋아? 왜 그렇게 감동한 표정이야?”
“어 좋지! 어릴 때에 하던 소꿉놀이에는 음식이 없는데 이번엔 음식이 있잖아.”
“너. 다 기억하는구나!”
“당연하지.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한 추억은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거야!”
나의 멋진 말에 천미영이 제대로 감동한 모습이다. 무언가 한 마디 하려는 것 같은 그녀.
나는 그대로 김밥을 내밀었다.
‘미영아. 분위기 좋으니까 그냥 계속 먹어!’
나도 배가 고프기에 재주껏 챙겨 먹으며 그녀와 즐거운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고 시원한 그늘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옆에 함께 누운 천마 천미영.
“날 좋다!”
“응. 우리 앞날처럼 화창한 거 같아.”
“그렇지!”
“천아! 나는 사부가 없어서 몰라!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너에게 사부는 어떤 의미야?”
“사부의 의미라....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없네. 이거 잘못된 건가?”
“지금이라도 해 봐. 그리고 나에게 알려줘!”
“으음. 나에게 엄청 잘해주시지. 무공도 쉽게 가르쳐 주고.”
“그런 건 내가 더 잘해줄 수 있는 거네. 다른 건 없어?”
“으음. 유달리 편한 때가 있고 개방적이지. 우리 사제는 남들이 들으면 놀랄 농담도 주고받거든!”
나는 편안한 분위기에 취하여 다양한 이야기들이 술술 나왔다.
“농담? 어떤 거?”
“우리는 결혼하자고 서로 농담으로 이야기도 해.”
“노..농담으로 그런 이야기를 해?”
“어. 장난이었는데 서로 ‘농담이었다.’ 이 한 마디를 못해서 아직도 장난을 치고 있어. 그만큼 가까운 사제지간이라는 거지. 예전에 농담으로 한 말을 상대가 인정하지 않아서 결혼하고 무덤까지 갔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는데 이러다 나도 그렇게 될지 몰라!”
검후 설지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나의 눈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 위에 사부의 얼굴이 생겨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그렇단 말이지?! 정말 농담이 맞아?”
“그렇지!”
천하의 검후 사부가 나와 진심으로 결혼할 리가 없으니 나는 농담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너는 검후가 남성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야!’
갑자기 소설에 나온 성격으로 변했다고 하기에는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남성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사부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근원적인 생각에는 아직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는 소설의 임팩트가 너무 크지!’
*****
옥면검룡 위지천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조금 전에 헤어진 천마 천미영.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검마!”
스으윽. 조용히 검마가 천마의 옆으로 나타났다.
“너는 어떻게 보았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검후와 천이가 단순한 사제로 느껴졌느냐?”
“각별하다는 건 확실히 느꼈습니다.”
“이~. 감히 내가 먼저 좋아하고 내가 먼저 찜을 했는데!!! 중간에 끼어든 야비한 년이 있단 말이냐?!”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건 아무리 확신이 들어도 명확해야 합니다. 오해로 인하여 평생 후회하는 자들도 부지기수인 것이 남녀의 감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천마.
“그렇지. 너의 말은 일리가 있다.”
“제가 달리 전문가가 아닙니다.”
“검마! 본 천마는 결정했다.”
“...?”
“광명의 힘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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