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다가오는 운명 2
* * *
나와 북리연화는 서로 마주보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가 양팔을 앞으로 내밀었고, 나 역시 앞으로 팔을 내밀었다.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을 마주하며 깍지를 낀 상태가 되었다.
“이제부터 엄청 추울 거에요. 사형!”
“남자가 추위에 떨 수는 없지. 바로 가자!”
나는 미루는 걸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다. 언제 한빙진기와 같은 극음의 진기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기에 당장 받으려고 한다.
뜨거운 손을 가진 북리연화인데 그녀의 손을 타고 강력한 냉기가 나의 몸으로 흘러들어 왔다. 나는 몸이 내부에서 먼저 얼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있는 생물을 급속으로 냉동하면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너무 추워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혼미해져 갔다.
[사형! 집중하고 어서 혼원대공을 운용하세요.]
황금화 북리연화의 일침.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부가 가르쳐 준 혼원대공의 진기 운용을 이용하여 영약을 흡수하며 얻은 나의 내공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혼원대공이 몸을 타고 돌아가기 시작하자 나의 머리부터 발까지 모조리 얼어버리려 하던 한빙진기의 이동에 변화가 생겼다. 북리연화와 마주 잡은 팔과 단전으로 향하는 신체에 한정하여 몸이 얼어갔다. 하지만 나의 단전은 얼어붙지 않고 굳건하여 한빙진기의 차가움을 혼원대공의 부드러움으로 포용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양대 신공의 하나구나!’
이곳 세상의 사기 무공 중 하나라는 혼원대공. 그 놀라운 명성에 걸맞게 북해빙궁의 전설인 빙백신공의 한빙진기도 무난하게 흡수하여 나갔다.
누군가와 싸우며 그 과정에서 상대의 진기를 흡수함이 가능한 무공. 혼원대공.
이것은 자신의 내공을 나에게 전이하는 격체전공이 아니기에 북리연화는 한방진기를 운용한 것에 따른 피로감만 느낄 뿐이다.
극음의 기운이 계속 내 몸에 들어오던 중 혼원대공이 차츰 그 힘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충분히 포용했다는 의미이다.
[연화야. 고생했어. 이제 충분하니까 이쯤 하자!]
[네. 사형.]
나는 얼마 전 전음을 사용하는 법을 무림맹의 무고로 가 책으로 배웠다. 목으로 진기를 모아서 속으로 말하면 그 파장의 떨림으로 상대에게 말을 보내는 것이 전음. 탈태환골에 성공하여 내공이 넉넉한 나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북리연화와 마주 잡은 손을 놓은 후 혼원대공을 운용했다. 극음의 기운을 날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땀을 뻘뻘 흘린 북리연화는 내 주변에 서서 나를 호위하듯 지켜주었다.
참으로 감사한 사매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한빙진기가 몸에 흡수되었다.
나는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 순간 어지러움을 느낀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빠르게 다가와 부드럽게 나를 바치며 껴안은 황금화 북리연화.
자세가 좀 이상했다. 남자인 내가 여자인 연화를 이렇게 받아준다면 모를까, 덩치가 훨씬 좋은 남자인 내가 가녀린 연화의 팔에 안긴 꼴이라니.
“고..고마워.”
나는 일어서려 했으나 북리연화가 다른 팔을 내밀어 나를 살포시 눌렀다.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품에 안긴 상태가 된 것이다.
“많이 지쳐 보이는데 조금 쉬세요. 사형. 한빙진기가 어떤 무공인데 지치는 건 당연해요.”
“그렇기는 한데. 자..자세가...”
“남자가 뭐 이런 걸로 부끄러워해요!”
“부..부끄럽긴 누가 부끄럽다고 그래! 그럼 좀 쉴 게.”
이상하게 연화의 앞에서 부끄럽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다 검후 사부와 천마 친구 때문이야!’
검후 설지연과 천마 천미영. 이들 두 여인의 기운에 내가 계속하여 적응하고 있으나 아직은 부족함이 있다. 과함이 지나칠 정도로 넘치는 살기와 강맹의 극에 이른 기개, 천하를 상대로 내뿜을 위압마저 가진 여인들이라 항상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연화는 다르다. 도도한 여인이지만 나에게는 친절하며 상인이라 그런지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도 있다.
그래서일까? 다른 때보다 부끄럽다는 말은 하기 싫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보여요. 혼원대공 때문인가요?”
“아마도 그럴 거야. 내가 아직 경지가 부족해서 흡수를 하면 힘의 공백이 발생하거든. 당분간은 내공을 사용할 수 없어!”
“아~. 어쩐지 이상하더라.”
“뭐가 이상해?”
“사형이 갑자기 유약한 서생으로 보이더라고요.”
“대장부인 남아가 유약하게 보이다니!!! 꼴불견이겠다. 맞지?”
“아~니요. 제가 이렇게 품에 끼고 매일 보호하고 싶은데요.”
“너는 참 좋은 사매야. 아직 진짜 사매는 아니지만 말이야.”
“후후. 사형이 정말로 좋은 사형이죠! 근데 저는... 오빠가 꼭 사형이 아니라도 돼요.”
“그래? 사형이 아니면 뭐가 좋은데?”
“....”
황금화 북리연화는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답을 하지 않았다.
휘이이잉. 바람이 분다.
나와 황금화 북리연화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를 관찰하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밖으로 떠나갔다.
‘위지천! 넌 지금 경고의 단계다. 계속 이런 모습을 나에게 보여 실망을 안긴다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다.’
분노를 억제하기 위하여 밖으로 떠나는 그.
지지직. 지지직.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기운.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느껴졌다.
*****
‘나는 아주 참한 부인이 될 거야!’
천마 천미영은 신교의 일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신교는 척박한 땅에 위치하고 있지만 삶의 질이 척박한 것은 아니다. 주변 일대의 무수한 문파들이 신교에 잘 보이려고 조공을 한다. 특히 세외의 문파들에게는 신처럼 군림하는 것이 바로 천마신교.
그렇기에 중원일통을 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렇게 원통하고 억울할 일은 없다.
‘그저 지들 욕심이지 뭐. 난 거기에 관심도 없어!’
애초에 천마 자체가 목적이라 천마오관에 도전한 것이 아닌 천미영. 그녀는 좋은 아내가 될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이건 나라서 가능한 거야!’
그녀는 지금 수를 놓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수를 놓는 그녀. 최고의 경지에 오른 여인답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경우는 없었다.
빠른 속도로 수를 놓고 있음에도 정확하고 차분한 그녀.
누가 봐도 그녀가 정성을 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하면 이제 천이는 내가 주는 옷만 입고 다닐 수 있는 거야!’
내일 자신이 수를 놓은 문양의 옷을 입힐 생각에 너무도 즐거워진 천미영. 그녀는 이렇게 오늘 하루를 보내려 하고 있었다.
끼이익.
검마 한비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천마! 저 돌아왔습니다.”
“더 놀다가 오지 그랬느냐?”
천미영은 위지천에게 내일 주기 위하여 수를 놓느라 여념이 없어 오늘 하루를 오롯이 여기에 투자했다. 무료했던 검마 한비연은 무림맹 일대를 관찰한다고 말하고 나갔다가 방금 돌아왔다.
“놀다니요! 저는 엄연히 천마의 명을 받고 이곳 일대에 위험한 것들이 있는지 살피러 간 겁니다.”
“너의 몸에서 당과의 냄새가 나고 꼬치를 먹은 향도 느껴진다. 이건 어떻게 된 거지?”
“억울합니다. 천마! 이건 엄연히 다른 사안입니다. 관찰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어쩔 수 없이 했던 행동이라는 겁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천마 천미영.
“너는 참 운이 좋아! 호법사자라는 위치와 광명의 힘을 품은 존재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죽었거든.”
“저야 말로 억울합니다. 제가 광명의 힘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혹시 광명의 힘이 준 부작용으로 인하여 검마가 저렇게 모자란 순간이 생기나?’
천마 천미영은 문득 궁금해졌으나 알아볼 방도는 없었다.
“좋다. 그렇게 관찰한 결과나 이야기하여라.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말한다면 너의 노력을 인정하겠다. 허나 그렇지 못할 경우. 너는 이제 하루 종일 방에만 있어야 한다.”
‘빨리 꼬리를 내리고 나가라!’
천마 천미영은 이렇게 말하면 검마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답을 하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짓는 검마 한비연.
“너의 표정을 보니 어쩌다 얻어걸린 게 있나 보구나.”
“얻어 걸린 게 아니라 저의 실력으로...”
“갈! 시끄럽다. 본론만 말하여라.”
“맹으로 들어가는 천뢰를 날리는 자를 보았습니다.”
“천뢰라면... 천뢰비협을 말하는 것이냐?”
“맞습니다. 중원 최고의 대협 혹은 대형이라 불리는 천뢰비협?雪?? 설태천을 보았습니다.”
“맹주를 해야 한다던 자가 아니냐? 너는 그와 싸운 적이 있느냐?”
“아쉽게도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길 자신은 있느냐?”
“그게... 백중세입니다. 그와 싸우려면 저도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천마 천미영.
“검후 설지연과 같은 설씨인데 혹시 혈연의 관계가 있느냐?”
“아닙니다. 그냥 성만 같을 뿐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무슨 연유가 있느냐?”
천마 천미영은 위지천의 사부인 검후 설지연과 관련한 일에 부쩍 관심이 생겼다. 설씨라는 이유로 계속하여 물어보는 그녀.
“거기까진 제가 모릅니다.”
“으음. 무슨 일로 그가 맹에 온 것이냐?”
“공명심이 전혀 없는 자라 무림맹에 거의 오지 않는 자입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본 천마와 어떠한 접점도 없을 자로 보이는구나. 천뢰비협에 관한 신경은 끄도록 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번뜩.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 천마 천미영.
“천뢰비협이라면 뇌기를 사용하는 자가 맞느냐?”
“맞습니다. 그의 천뢰비도술은 하늘에서 벼락의 기운을 받아 던진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고는 합니다.”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벼락이 치는 멋진 모습이 빠진 거였어!”
“예에?”
“너도 와서 보아라. 본 천마의 아름다운 작품을 말이다.”
천마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검마 한비연. 그녀는 앞으로 다가와 가공할 속도로 수를 놓고 있는 천마 천미영의 손을 응시하였다.
“오오. 두 마리 용이 서로 엉켜 하나가 되어 사랑을 하다니! 세상에 없던 놀라운 작품입니다.”
짝짝짝.
검마 한비연은 진심에서 나오는 박수를 천미영에게 보냈다.
“여기에 뇌기마저 더하면 아주 그럴싸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자고로 용하면 풍운의 조화 아닙니까? 두 용이 만나니 자연도 난리가 날 정도로 환장하고 좋아한다는 겁니다.”
“너는 생각보다 작품을 보는 눈이 있구나. 검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천마의 수를 놓는 실력을 보니 저도 이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너는 필요가 없다.”
천마의 필요가 없다는 말에 토라진 검마. 그녀는 입을 앞으로 살짝 내밀며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너는 남자가 없지 않느냐? 이런 걸 만들어도 줄 사람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으음. 주고 싶은 사람은 있습니다.”
“그래? 그럼 너도 만들어서 주거라. 천마의 명이다.”
“이 검마 한비연 천마의 명을 반드시 받들겠습니다.”
평소보다 과하게 반응하는 검마의 모습에 천미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광명의 힘만 아니면 어디 먼 곳으로 보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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