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다가오는 운명
* * *
무림맹의 뒤쪽에 위치한 인적이 드문 야산의 중턱.
사람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곳이라 무척이나 한산했다.
서로 다른 반대편에서 올라온 두 여인. 그녀들은 비슷하게 상대의 존재를 확인했다.
두 여인의 입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똑같은 반응이 나왔다.
“흥!”
“흥!”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는 두 사람. 그들은 조금 떨어진 상태로 자리에 머물렀다.
시간이 흘러가자. 둘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 시간에 오는 꼴을 못 봤어!”
지다화 제갈상아는 작게 투덜거렸다.
“충분히 늦게 온다고 온 건데 당했잖아.”
황금화 북리연화도 혼잣말을 하며 불러놓고 늦게 오는 이를 원망했다.
그러다 서로를 바라보게 된 두 사람. 자신들에게 비기를 아무렇지 않게 가르쳐 주던 자를 씹으며 무수한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흥!”
“흥!”
서로를 상대로 결국 눈을 마주하지 않고 있을 때. 그들이 기다리던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천복자였다.
“너희는 어릴 때 그렇게 친하더니 나이가 들어서 싸우는구나? 클클.”
“제가 그렇게 웃지 말라고 했죠?”
“상아야 이젠 노인이 웃는 것도 뭐라 하는 거냐?”
“아무튼 그렇게 웃지는 마요. 가뜩이나 못 생긴 얼굴인데 보기 흉하니까 제발 좀 그렇게 웃지 마요. 사부.”
지다화 제갈상아가 몰아붙이며 천복자에게 따졌다.
“무림맹과 상극이라 이곳에 노출되면 될수록 단명할 팔자라고 하더니 무슨 일로 목숨을 걸고 여기로 온 거에요? 영감님.”
“내가 몇 가지 가르쳐 줄 때에는 그렇게 사부라고 따르던 귀여운 연화가 이제는 세월처럼 많이 변했구나. 이 천복자는 너무 슬프단다.”
“우리는 사승으로 묶인 게 아니라 그저 잔재주 몇 개만 가르쳐 주는 거라고 말한 분이 누군데 그래요!”
“클클. 그렇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긴 하지! 잘 들어라. 요년들아!”
천복자는 장난기를 버리고 지다화와 황금화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옥면검룡 위지천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살아남길 바란다면 너희는 그와 만나는 시간을 줄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목숨에도 영향을 주는 중대한 일이니 필히 명심하여라.”
위지천에게 위험이 생겼다고 말하자 두 여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치이. 낙이 하나 사라졌잖아.”
“알겠어요.”
“그리고! 너희가 지닌 가장 중요한 걸 그에 하나씩 주어라.”
“구체적으로 말을 해줘요. 사부!”
“그와 만날 때 주고 싶은 게 생긴다면 아마도 그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나라고 다 아는 건 아니지 않으냐.”
“그러니까 제 몸과 마음을 주라는 거죠? 영감님.”
“저도 그래야 하는 거에요? 이거보다 더 주고 싶은 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차는 천복자.
“이래서 얼굴만 보는 계집들은 안 된다고 하는 거야.”
“뭐래! 사부가 못 생긴 걸 그렇게 포장하면 곤란하죠.”
“맞아요. 영감님은 그냥 못 생겨서 인기가 없는 거에요. 성격도 궁금증만 유발하는 갑갑함으로 가득 찼기도 하고요.”
새삼 이들과 말을 섞으면 피곤해진다는 걸 상기한 천복자. 그는 자식처럼 아끼는 두 여자를 오랜만에 만났으나 재회의 기쁨을 여기서 멈추기로 결심했다.
“명심해라! 천문과 천금의 운명은 기다림이다. 아직 너희가 원하는 시기는 오지 않으니 그걸 기억하여라. 이 영감은 죽기 싫어서 정주를 떠난다.”
몸을 돌려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천복자.
“사부! 현현??의 맥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현현은패를 위지천에 주었다. 알아서 잘들 해 보거라.”
지다화 제갈상아의 물음에 응답한 천복자. 그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때가 많았던 천복자라 두 여인은 그가 떠난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위지 공자께서 위험에 처할 수 있어 당분간 사저와의 충돌은 피하도록 할게요. 항상 느끼지만 언니는 가진 재주보다 운이 좋아요.”
“상아야. 운도 실력이야. 무엇보다 운이 좋은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흥!”
“흥!”
둘은 다시 헤어져 산을 내려오며 고민했다.
‘무엇을 줘야 하는 거지? 마음은 이미 줬는데?!’
한편. 정주를 빠져나간 천복자는 멀어진 무림맹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여기로 오고 싶지 않구나!’
자신의 운명과 상극의 기운을 가진 무림맹. 천복자는 무림맹과 멀어질수록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그가 정주성의 정문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갓을 쓴 남자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익숙한 남자. 천복자는 익히 잘 아는 남자를 발견하자 빠르게 그에게 접근했다.
“제가 오늘 귀인을 만날 팔자라 하더니 여기서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대협.”
“오오. 천복자를 여기서 만나게 되는군요.”
남자는 갓을 벗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맹으로 가시는 듯 보입니다.”
“허허. 질녀가 혼인을 한다고 하기에 어떤 놈을 골랐는지 이 두 눈으로 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부디 좋은 남자를 골랐기를 바랍니다.”
“저는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바람기가 없고 자기 여자에게만 최선을 다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혹시 주변에 여자가 많은 남자면 어찌할 생각입니까?”
“질녀 모르게 죽이던지 협박을 하던지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허허허.”
“항상 느끼지만 대협은 무서운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십니다.”
“남자가 각오를 했다면 물러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다음에는 무림맹 주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또 뵙기를 바랍니다.”
“그럽시다. 천복자!”
무림맹을 향해 들어가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천복자.
“천뢰가 수호성을 찾아 맹을 방문하니 정주에 벼락이 치겠구나. 이런 화 정도는 복으로 만들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
새벽에 일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검을 휘두르며 몸을 단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무공을 익힐 때가 아니야.’
검을 휘두르며 마음을 차분하게 하려고 했는데 그게 어려운 나.
‘검후 사부와 천마 친구. 이들을 어떻게 엮어야 잘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객잔에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며 이틀 후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만날 수도 있었으나 시간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고, 천미영도 이를 받아들였다.
나는 천마의 친구라고 무림맹에 찍혀 죽을 수도 있고, 반대로 천마에게 찍혀서 죽을 수도 있다.
‘내가 외줄을 아주 잘 타야만 하는구나!’
나는 잔기술을 동원하는 것보다 전력으로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재료부터 다지고 넉넉하게 만들어 놓자.’
내일은 천미영과 주변 일대를 구경하기로 했다. 우리는 장원에서만 놀았기에 밖으로 돌아다닌 적이 없다. 이번 기회에 둘이 함께 주변을 거닐며 좋은 추억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했고, 음식은 당연히 빠질 수가 없었다.
내가 다양한 요리를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사형! 향이 너무 좋아요.”
“연화가 왔구나.”
경공이 뛰어나 항상 소리도 없이 나타나는 황금 북리연화.
“쳇! 왔구나. 이게 끝이에요?! 제가 최근 뜸했잖아요. 이렇게 오랜만에 보면 사형이 다정하게 불러줘야 하는데... 이런 기본도 몰라요?”
“이틀이 오랜만은....”
“매일 보다가 이틀 만에 보면 그게 오랜만이에요!”
북리연화의 말을 들으니 사부를 보지 못한 게 엄청 긴 시간으로 다가왔다.
‘조만간에 보겠지.’
재료를 다듬고 집중하느라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사형은 꼭 할 말이 없으면 여자들 속이 타라고 가만히 있더라. 이런 모습은 순 나쁜 남자들만 보이는 거 알아요?”
“그렇구나.”
나는 나쁜 남자가 여자에게 먹히니까 여자가 잘해주라는 말을 하면 바람직한 현상이라던 글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뭘 잘하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당장은 북리연화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 이 귀여운 북리 사매가 나를 죽일 리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사형은 무슨 고민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냉기가 부족해.”
“내...냉기요?”
충격을 받은 듯 보이는 황금화 북리연화.
‘냉기가 부족하다는 말에 왜 저렇게 놀라지?’
의도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면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지 않고 도도한 모습을 보이는 여인이 북리연화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와 다르다. 분명 많이 놀란 모습이다.
“왜 그렇게 놀라?”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사형. 냉기와 음식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저에게 알려줘요.”
“급속으로 얼릴 수 있거나 시원하게 만들면 더 맛이 있는 요리가 있지!”
“그래요?”
“응. 살얼음 같은 육수가 있으면 맛이 제대로인 냉면 같은 요리가 있다고!”
“아아. 저 먹고 싶어요. 사형!”
“어허!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 사부가 먼저야. 새로운 요리는 독점한다고 선언하셨거든. 다른 여자들에게 먼저 해주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엄포도 놓고 가셨다고!”
“그..래.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황금화 북리연화.
나는 긴장했다. 북리연화의 저런 표정은 자신감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사부의 엄포를 무력화시킬 방도가 있어 보여 나를 움찔하게 만든다.
“왜. 왜 그래?”
주변을 살핀 북리연화가 나에게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음으로 말해도 되는데 구태여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실 잘 모르겠다.
“사형은 혼원대공을 배웠나요?”
“여..연화야. 너 어떻게 혼원대공을 알아?”
“히히. 잘 들어요. 도성의 유물을 가장 먼저 찾아 헤맨 집단이 저희 황금상단이에요. 저희가 소재를 찾았을 땐 그것이 운명처럼 검후께 흘러갔어요. 그때부터 아버지가 검후께 관심을 보였어요.”
오늘도 황금상단의 치밀함에 놀랐다.
‘연화는 처음부터 제자가 되는 계획이 있었나?!’
검후를 상대로 도성의 물건을 가져오려는 시도보다는 그녀의 제자가 되어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준비를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잘 봐요. 사형.”
지지직. 지지직.
황금화 북리연화의 손에서 하얀색의 기운이 나왔다. 보기만 해도 서늘함을 주는 차가운 기운이었다.
“이..이게 뭐야?”
“이건 사라진 북해빙궁의 무공인 빙백신공의 한빙진기에요.”
“한빙진기?”
“맞아요. 이게 있으면 무엇이든 원하는 형태로 얼릴 수 있어요!”
‘뭐야! 냉장고가 필요 없잖아!’
“사매. 그 말은?”
“제가 이 한빙진기를 드릴 테니 사형은 혼원대공으로 이 기운을 흡수하세요.”
“아아. 그럼 나는 차가운 요리를 더 맛있게 할 수 있지. 고마워 연화야!”
나도 모르게 북리연화의 손을 덮썩 잡았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북리연화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옆으로 돌렸으나 결코 손을 빼지는 않았다.
“사형!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어?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요?”
“좋은 사형과 사매?”
“흥! 그딴 걸로는 어림도 없어요.”
“그렇구나.... 그래도 가여운 이 사형에게 한빙진기를 조금만 주면 곤란할까?”
“냉면을 저에게 가장 먼저 주세요. 물론 저번에 말한 불고기인가 하는 것도 포함이에요.”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평생 사용이 가능한 냉장고 같은 무공과 사부의 당부.
어떤 걸 택해야 좋을지 고르는 게 어렵다.
‘그래! 혼이 나더라도 이게 있으면 평생 써먹을 수 있잖아. 나의 화채와 냉면 그리고 팥빙수까지 먹어보면 사부도 잘했다고 칭찬을 하실 거야! 남자라면 융통성이 있어야지!’
“연화야! 이 사형이 한빙진기는 아주 잘 쓰도록 할 게.”
“고작 식사 대접 한 번에 줄 기운은 아니지만 이번엔 특별히 예외에요.”
“넌 역시 상가의 딸답게 배포가 크구나. 나야 고맙지!”
“그거야 당연하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