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천마가 왔다. 2
* * *
“천마! 다시 생각하셔야 합니다.”
“시끄럽다. 조금 전 확실히 깨달았다. 본 천마는 위지천을 만난다. 오로지 이것 하나만 생각할 뿐이다.”
위지천의 집에서 그의 하인이던 종노인이 나와 검마와 이야기하던 걸 지켜본 천마 천미영은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위지천을 만날 시간을 미룰 수 없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여부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먼저 다가가 그를 만난다. 천미영에게는 오로지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연애는 밀고 당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잠깐의 인내면 남녀의 위치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습니다.”
“갈!”
천마 천미영의 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오며 검마 한비연의 몸을 휘감아 옥죄였다.
“이...이것은?!”
“그렇다. 마도의 진정한 하늘을 상징하는 천마기다. 이 또한 내가 가졌느니라.”
“천미영님은 지...진정한 천마 중의 천마셨군요. 이런 중요한 사실을 왜 저희 십마에게 알리지 않은 겁니까?”
“그러면 너희들이 중원일통을 명분으로 나의 중원행을 반대할 것이 아니냐!”
“그...렇..기는 하지요.”
“잘 들어라. 본 천마가 위지천을 만남에 있어 어떠한 샘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천마다. 그와 나. 우리 둘 사이에는 어떠한 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검마 너는 필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호법사자의 충정을 생각하여 특별히 이번에만 넘어가겠다.”
“알겠습니다. 천마!”
검마 한비연은 천마기를 지닌 천마 천미영에게 진심으로 감복했다. 그리고 느꼈다. 천마 천미영의 위지천을 향한 마음은 어떤 명분과 이유로도 막을 수 없음을.
“당장 무림맹으로 가 그를 만나도록 하자!”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검마 한비연은 저 멀리 보이는 무림맹의 본단을 향해 먼저 나아갔다.
“검마! 너는 검에 있어 최고라 자부하는 무인. 그런데 어찌하여 검후라는 말에 그리도 크게 놀란 것이냐?”
천미영은 조금 전 검후라는 말을 듣고 놀라던 한비연의 모습에 크게 의아함을 느꼈기에 이것을 물었다.
“그..그러니까 말입니다.”
“천마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다. 호법사자는 솔직하게 답하여라.”
“하아. 십마의 수좌인 제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천마에게도 자기 할 말은 반드시 하며 거짓이 없어 오히려 문제를 만드는 이가 바로 검마 한비연이다. 그런 검마가 부끄러운 이야기라고 말하는 건 천마 천미영에게도 놀랍게 다가왔다.
“검후는 제가 어렵게 얻은 중원비무행을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도록 만든 장본인입니다.”
“너의 말은 검후가 두려워 비무행을 중단했다는 것이냐? 그러고도 신교의 무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냐?”
“십마의 수장이자 당시 신교 최고의 고수인 저의 위치를 고려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합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있다 하여 제가 검후가 무서워 비무행을 종료한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호오. 참으로 신기하구나. 너는 겁이 없는 무인이 아니더냐?! 헌데 어째서 싸우기도 전에 검후와의 대결을 피하게 되었지? 강자를 보면 피가 들끓는 참 무인이 바로 너이지 않느냐?”
과거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검마 한비연. 그녀의 한쪽 눈이 아련해지고 있었다.
“당시 저는 분명 검후보다 강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싸우면 결국 지게 될 거라는 본능의 경고를 느꼈습니다.”
“본능의 경고? 무인의 감을 말하는 것이냐?”
“그런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도 처음 느낀 기이한 현상이라 신교에 복귀 후 마뇌 유설아에게 물어본 적도 있습니다. 마뇌가 말하길 검후는 어쩌면 천강의 기운을 받는 여인일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천강의 기운? 그게 무엇이지?”
“가장 강한 자로 태어난 숙명을 지닌 이가 천강성이라 합니다.”
“감히! 본 천마를 두고 가장 강한 자를 운운하는 것이냐?”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천마!”
“내가 고정할 수 있겠느냐? 당장 검후와 승부를 치러 천강성을 무너뜨리겠다.”
“이렇게 급하게 행동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천마께서는 천살의 기운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니 천강의 기운을 가진 검후라 하여도 천마 앞에서 최강의 무인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천살의 기운을 가졌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천마기는 천살의 기운을 가진 자에게만 반응하는 시천마가 남긴 신교 최강의 힘입니다. 하늘도 죽인다는 천살의 기운을 가진 천마이시니 검후가 아무리 위대한 무인이라 하여도 천마를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흥미로운 소리구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라는 천강성과 그 무엇도 죽인다는 천살성의 대결이라니.... 본 천마는 검후와의 만남이 참으로 기다려지는구나! 가자 무림맹으로.”
*****
‘오늘은 이상하게 허전하고 심심하네.’
매일 지겹도록 찾아오는 지다화 제갈상아와 최근에 들어 지다화를 능가하는 횟수로 찾아오는 황금화 북리연화. 무슨 일인지 오늘은 두 여인이 검후전을 찾지 않았다.
‘편해서 좋기는 한데, 무슨 일이 있나?’
나는 늘 오던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팅팅팅. 팅팅팅팅.
검후전의 밖에서 쇠를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건 나를 부르는 소리잖아!’
얼마 전 서문미영의 편지를 받은 후 검후전으로 나를 찾는 사람이 있거나 전달해야 할 말이 있을 경우 밖에서 쇠를 두드려 소리를 내어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다.
내공이 생기고 기감이 생겼기에 가능했던 부탁이다.
나는 진의 생문을 이용하여 밖으로 나갔다. 무림맹의 무사 하나가 나를 반긴다.
“혹시 안에 계시지 않으면 어쩌나 했습니다. 위지 공자님!”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게 하여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하는 일이 통보를 하는 겁니다.”
나는 통보라는 말에 누가 나를 찾아왔다는 걸 느꼈다.
“누가 저를 찾아왔습니까?”
“서문미영이라는 낭자가 위지 공자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인데 감사합니다!”
천복자가 말했던 내가 살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재회필오?會必五. 그가 말한 다시 만나는 인연이 서문미영이 아닐까 한다. 미영이가 아니라면 저런 조건을 충족할 사람 자체가 없기에 크게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
언제쯤 올까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녀가 이렇게 빨리 나를 찾아왔다. 나는 기쁘게 그녀를 만나려고 한다.
‘지금 만나러 간다. 서문미영!’
*****
일수독룡 당지독.
오대 세가의 하나인 사천 당가의 소가주로 태어난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준수하다 평가를 받는 용모와 뛰어난 무에 대한 재능, 거기에 더하여 학문 또한 우수했다.
혈족에 대한 개념과 가족 내에서도 서열의 위계가 확실한 당가의 특성에 의하여 당지독은 점점 오만해졌다. 그런 그의 오만함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무림맹.
그는 자신과 비슷한 신분을 지닌 다른 후기지수들 속에 있으며 불만이 조금씩 쌓여만 갔다.
‘내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싫다!’
일수독룡 당지독은 최근 무램맹 후기지수들의 중심에 선 옥면검룡 위지천이 특히 싫었다.
‘그저 얼굴만 기생오라비처럼 반반한 놈일 뿐이잖아!’
일수독룡 당지독은 한번쯤 호감을 지녔던 지다화 제갈상아와 황금화 북리연화, 거기다 무공만 안다는 도광 팽수련마저 위지천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었다.
‘언젠가 나와 따로 만나는 날이 온다면 내 앞에서 벌벌 떨도록 만들어주마!’
후기지수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옥면검룡 위지천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여 용봉회관을 잘 찾지 않는 일수독룡 당지독은 맹의 정문을 통과하다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새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 평범한 무복을 입고 있는 여인일 뿐인데.....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이 여인은 참으로 고왔다.
‘검후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또 있을 줄이야!’
그는 넋이 나간 상태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이 하나 더 서있었다. 그녀는 눈이 하나뿐인지 안대를 차고 있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었다.
그 안대를 낀 여인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흐흐. 나는 니가 아니라 니 옆에 있던 여인에게 관심이 있는 거다. 넌 저 여자를 나에게 소개해주기만 하면 된다.’
당지독은 아리따운 두 여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올수록 인상을 더 심하게 쓰는 안대를 쓴 여인.
그녀가 당지독의 앞에 멈춰 서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눈 깔고. 꺼져라!”
“....?”
일수독룡 당지독은 독과 암기를 다루는 사천 당가의 소가주. 그는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에게 당황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독과 암기를 다루는 자의 정신이 흐트러질 경우 자신과 주변인에게 커다란 피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생을 교육받고 자랐음에도 순간 멍해져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당지독.
‘혹 일부러 저러는 것일까?’
어쩌면 이 여인은 험한 강호를 돌아다니기 위해 고의로 안대를 착용하는 그런 여인이 아닐까 싶었다.
‘아름다운 여인은 나 같이 듬직하고 멋진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 옳지! 나의 관용을 보여주자!’
“낭자! 저는 일수독룡 당지독이라 합니다.”
“꺼지라고! 말귀 못 알아들어? 내가 칼로 귀를 좀 뚫어 줘?”
“허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 일수독룡 당지독. 그는 이 철부지 여인을 어찌 혼낼까 고민에 빠졌다. 그때. 그가 눈여겨보았던 아리따운 여인이 다가왔다.
자신에 시선도 주지 않고 다가온 그 여인이 안대를 찬 여인에게 말했다.
“뭐 하고 있어! 이딴 새끼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천 공자를 만나는 자리라 조용히 보내려고 했는데 저 새끼가 말귀를 도통 알아먹지를 못합니다.”
“그럼 죽이...”
천마 천미영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였다.
“미영아! 서문미영!”
천마 천미영을 부르는 소리. 그녀가 그토록 간곡하게 기다렸던 목소리였다.
덜덜덜. 천마오관을 통과하며 죽음의 위기를 숱하게 넘겼던 천미영.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심하게 떠는 잃은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나타나면 그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됨을 깨달았다.
‘이 천마가 고작 이 목소리만으로도 이렇게 떨리는데.... 그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무엇을 하고 있건...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이냐!’
천미영은 드디어 만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을 향하여 반갑게 손을 흔들며 힘차게 달려오는 남자 하나가 보였다.
‘이..이럴 수가! 어릴 때 내 기억은 틀렸어! 난 천이의 매력을 반도 보질 못했던 거야! 미안하다. 위지천! 내가 너를 얕잡아보고 있었던 거야!’
천미영은 떨리는 몸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향해 달렸다.
자신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얼핏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미는 듯도 보이는 그를 힘차게 껴안은 천마 천미영.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상태가 되었다.
“보고 싶었다. 위지천!”
“나도 보고 싶었어. 미영아!”
‘너는 나를 살릴 인연이라고 했어!’
중원 최고의 점성술 대가라는 천복자가 말한 위지천을 살릴 자라 말했던 여인이 나타난 순간이다.
천미영은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기에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검마 한비연.
‘천마는 안목도 천마구나! 근데 나와 남자를 보는 눈이 비슷하잖아! 나를 첫눈에 반하게 하는 자는 살면서 처음이야! 흐으응.’
검마 한비연은 자신의 주군인 천마의 첫사랑 위지천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런 그녀와 반대로 분노가 점점 커져가는 자도 있었다. 그는 바로 일수독룡 당지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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