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천마가 오고 있다. 4
* * *
“이것이 나의 이야기이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말한 천마 천미영은 아련한 추억에 잠겨 있었다.
“이 검마 한비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남녀상열지사의 서적을 공부한 어쩌면 무공보다 더 강할지 모르는 이론 연애의 전문가. 그런 제가 어린 시절 천마의 남자 다루는 모습을 봤을 때...”
꿀꺽. 목숨을 걸고 도전했던 천마오관의 시절보다 더 긴장하여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킨 천마 천미영. 그녀는 검마 한비연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천마는 언제나 천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천미영님은 어릴 때부터 남자를 다를 줄 아는 여자였습니다. 저는 감탄했습니다. 무공도 연애도 모두 천마라는 이름에 걸맞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검마 한비연의 입에서 마음에 드는 답이 나오자 기분이 좋아진 천마 천미영.
“천마는 하늘이 내리는 존재. 내가 천마인 이유가 다 있느니라!”
짝짝짝.
“과연....천마! 인정합니다.”
“검마! 너의 연애 내공은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 같구나. 검과 연애 지식에서 정점에 오른 유일한 여자야.”
“제가 뭐든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 아닙니까? 연애를 공부하기 위해 실제 연애는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으음. 본 천마는 너의 눈이 지나치게 높아 그런 줄 알았느니라!”
“제가 원하는 남자의 조건은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호오. 그래? 어디 이야기하여 보거라. 너의 그 남자를 보는 기준 말이다.”
“정말로 별거 없습니다. 제가 첫눈에 반할 외모. 다정다감한 성격, 세련된 말투, 거기에 저와 비견될 무공 겨우 이 네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으음. 그렇군.”
‘넌 평생 혼자 살 팔자가 맞구나. 검마!’
천마 천미영은 혼자인 사람들은 다 각자의 이유가 있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
“우와. 위지 공자는 검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검의 천재에요. 저는 그저 감탄만 나와요.”
지다화 제갈상아는 위지천이 연무장에서 검을 단련하는 모습을 보며 찬사를 보냈다.
“언제 오셨습니까?”
“그게 뭐 중요한가요?!”
사부가 없는 검후전을 자유롭게 오가는 제갈상아. 그녀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가장 잘 활용하는 여인이다.
지금도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무단으로 검후전에 침입한 걸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만들고 있다.
‘밤에는 오지 않는 게 다행이라 느껴질 정도야!’
지다화 제갈상아는 검후전의 진을 파해하고 들어온 이후 수시로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왜 이곳에 왔냐고 물으면 편의를 봐주니, 뭐가 필요하니 등등 다양한 말을 하는 그녀라 나는 이제 그녀에게 방문의 목적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을 접었다.
“일이 있으면 밤에 찾아와도 되죠?”
“예에?”
“헤헤. 농담에요. 농담! 저는 위지 공자님의 검을 보면서 많은 걸 느껴 이렇게 찾아올 뿐이랍니다.”
‘제갈 낭자와 있으면 내가 진짜 검의 재능이 쩌는 놈 같다니까!’
“오늘 수련은 끝난 거 같은데 위지 공자는 저와 함께 나가요. 저에게 약속을 지킬 기회를 주세요.”
“약속이요?”
“전에 맹의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잖아요. 정주에 있는 유명한 객잔에서 대접도 하고 싶어요.”
사람의 소개야 특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명 객잔은 다르다. 어떤 음식이 나오는지 보고 괜찮으면 내가 아는 것과 응용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다.
‘사부가 오기 전에 다양한 레시피를 고안하는 것도 괜찮겠어!’
나는 평소보다 더 맛있게 내가 만든 요리를 먹는 검후 설지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해주는 보람이 있겠는데?!’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캬아악! 됐어!”
앙증맞은 포즈로 두 손을 모으며 좋아하는 지다화 제갈상아.
‘무공을 익힌 여자들은 내가 이해할 영역이 아니야.’
“저어~ 위지 공자님?! 우리가 서로를 안지도 좀 되었는데 말을 좀 편하게 해요.”
“네?”
“오빠라고 부를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깜빡거리는 제갈상아의 귀여운 모습. 나보다 한 살 어리니 내가 오빠인 건 사실이다.
‘사부가 이런 걸로 뭐라 하진 않겠지? 그냥 가깝게 지내는 거니까.’
“그럴까? 상아야!”
“네 오빠!”
‘말을 놓으면 대화를 하기 좀 편하겠지?!’
나는 지다화 제갈상아와 말을 놓기로 한 후에 검후전의 밖으로 나갔다.
용봉회관
부드럽고 유려한 필체로 쓰인 현판을 자랑하는 용봉회관의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무림맹에서 후기지수들의 친목을 위해 만든 곳이야. 오빠.”
나는 아차 싶었다. 후기지수를 소개한다고 할 때 여기부터 떠올렸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괜히 시비를 거는 놈이 나오는 거 아니야?’
무협 소설은 빤한 때가 많다. 특히 후기지수들이 모이면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아무래도 여긴 위험해. 내 목적인 객잔으로 가자!’
“상아야. 객잔으로 가자!”
“다른 사람들 소개는?”
“그런 건 천천히 해도 돼. 지금은 너랑 객잔에 가고 싶어.”
“뭐야?! 나랑 둘만 있고 싶은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받아줄게. 특~~별히 천 오빠라서 말이야.”
제갈상아가 이상하게 말을 했으나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저기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여기를 빠르게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방향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기로 한 나와 제갈상아.
“가장 가까운 진미객잔부터 가자. 원래 객잔은 하나씩 다니면서 비교하고 분석하는 게 최고야!”
나는 오랜만에 남이 만든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에 즐거워졌다.
그런데...
“멈춰. 제갈상아!”
제갈상아와 잘 아는 듯 다정함이 느껴지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여인 치고는 풍채가 좋은 내 또래의 여인과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가 나와 제갈상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다란 도를 지닌 체구가 좋은 남자와 여자. 거기다 둘은 외모가 상당히 닮았다.
나는 남매로 보이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팽가의 팽수련과 팽수호 같은데?’
팽수련은 도에 미쳐 도광이라는 명문가의 딸과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얻은 여인으로 지다화 제갈상아의 둘도 없는 친구다. 소설에서 표현하길 털털하고 계산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는 자신과 반대 기질을 가진 제갈상아와 유독 친하다.
팽수호는 팽수련의 동생으로 누나와 성격이 같아 우직하게 무공만 익히는 하북 팽가의 소가주로 글에서 특별한 비중은 없었다.
‘이 소설은 온전히 믿을 수 없잖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난감하다.’
소설에 나오는 저들 남매는 누구보다 정의롭고 바르다.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 있으나 이 소설은 겉과 속이 좀 많이 다른 느낌을 주기에 신뢰도가 떨어져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때가 있다.
“옆에 계신 분은.... 소문의 옥면검룡이군요. 드디어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저는 팽가의 여식인 도광 팽수련이에요.”
“반갑습니다. 소제는 팽가의 소가주인 기호도 팽수호라 합니다.”
도에 미쳤다고 하여 도광이라 불리는 팽수련과 호랑이의 기세를 품었다 하여 기호도라 불리는 팽수호. 둘은 눈빛부터 선하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반갑습니다. 위지천이라 합니다.”
부끄러워서 도저히 옥면검룡이라는 말은 내 입으로 할 수가 없었다.
“위지 공자는 소문보다 더 대단한 미남이군요.”
털털하게 말하는 팽수련과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팽수호.
“니들 또 용봉회관에서 누구 하나 잡고 비무를 하려는 거지?”
“야 지다화! 너는 배웠다는 여자가 말을 좀 예쁘게 해. 우리 팽가는 함께 무학을 연구하는 교류에 관심이 많은 거야!”
“그건 저희 누나 말이 맞아요. 상아 누나. 무인은 무공을. 이게 원칙 아닙니까!”
둘이 계속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불안함이 엄습한다.
‘꼭 이러다 한 판 뜨자는 분위기로 가는데.’
“옥면검룡께서는 무공을 배운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럼 한참 무공에 대한 열의로 불타오를 때군요.”
누가 남매가 아니라고 할까 그러는지 팽수련이 말하자 팽수호가 받으며 분위기를 올렸다.
‘이건 누가 봐도 대련을 하자는 거잖아!’
나의 미천한 실력이 세상에 공개될 상황으로 가는 느낌이 들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니들 가! 천 오빠랑 나는 진미객잔에 갈 거야!”
‘제갈상아가 나의 구세주구나!’
“진미객잔?! 그거 잘 됐네. 오늘 거기서 우리 용봉회의 회합을 가지기로 했어. 이왕 가는 거 같이 가자. 결국 마주칠 거잖아.”
‘그럼 우리가 다른 객잔으로 가면 되지!’
“천 오빠!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은데요?”
분위기가 다 같이 밥이나 먹자는 흐름으로 간다.
‘여기서 싫다고 거절하면 내 이미지가 어떻게 될까?’
나는 거절이 곤란함을 느꼈다.
“저는 좋습니다.”
용봉회관으로 들어가기 너무 싫지만 아주 쿨한 표정으로 승낙했다.
“제가 사람들을 소개할 게요. 위지 공자님.”
“어서 들어가요. 천 형님.”
이상할 정도로 신이 난 도광 팽수련과 벌써부터 형이라 부르는 살가운 팽수호.
나는 그들과 함께 용봉회관에 들어갔다. 소설에서 이름만 보았던 일부의 후기지수들을 소개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검을 들고 팽수련과 마주하고 있었다.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그저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저들 남매는 비무광이라 어떻게 비무를 유도하는지 너무 잘 아는구나!’
옆에서 가만히 있으면 둘이서 말을 주고받다가 기습적으로 부탁을 하고 별 생각도 없이 대꾸하다 보면 어느새 연무장에 나와 서로 대치하게 된다.
‘눈 뜨고 코 베어간다는 말이 여기 있네. 망했다!’
“무정검을 경험할 기회가 생겨 더 없는 영광입니다. 옥면검룡!”
‘그냥 위지천이라고 불러!’
촌스러운 옥면검룡이라는 별호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가장 무서운 말이죠. 저도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임할게요.”
‘이런! 제대로 망했다. 도광이 진지하게 하겠다는 건 이번 비무에 미치겠다는 말이잖아.’
도광 팽수련. 오대세가의 장녀인 그녀에게 미칠 광?이라는 글자가 별호에 들어갔다. 이런 별호가 들어간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보다 그녀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글은 없기 때문이다.
눈에 힘을 주며 즐거움 가득한 미소를 보이는 그녀.
‘아아. 미치겠다. 도광이 벌써 비무에 빠져들고 있어.’
나는 사부에게 배운 칠성풍운보와 무정검의 전18검을 생각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낯선 환경에서도 침착한 상대. 저는 벌써부터 흥분이 되는군요. 옥면검룡!”
좋아 죽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팽수련. 나는 더욱 미칠 것 같았다.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으니 제가 먼저 갑니다.”
태어날 때부터 풍채가 좋은 팽가의 사람들은 기질이 호탕하다. 그런 그들을 상징하는 무공이 바로 다섯 마리 호랑이가 덤벼든다고 알려진 오호단문도.
나를 향해서 힘차게 달려드는 도광 팽수련. 그녀의 기세는 오호단문도의 시작이라 알려진 맹호출격이 분명했다.
진짜 한 마리의 호랑이가 나를 향해 달려드는 기분이 들 정도로 강맹한 기세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힘차게 달려온다.
그렇지만.... 나의 눈에는 보였다.
저 도의 기세로 가득한 도광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칠성풍운보가 절학은 절학이구나.’
나는 검후 사부에게 배운 칠성풍운의 첫 두 걸음인 이보탈공을 이용하여 팽수련의 공격을 피했다. 아직 상대를 공격할 실력이 부족한 나는 이보압전으로 반격을 도모하기는 무리라 여겨져 상대의 공세를 벗어나는 것에만 집중했다.
쉬잉. 쉬잉. 쉬잉.
도광 팽수련의 도가 나의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다. 사부를 믿고 그녀가 나에게 가르쳐 준 칠성풍운보를 믿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저를 상대로 피하기만 하다니!”
‘화가 났나?’
“너~무 좋아요! 이제부터 제대로 하라는 말 맞죠? 진정한 호랑이가 무엇인지 보여드릴게요. 저 너무 신이나요.”
도광 팽수련의 눈이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광기로 물든 그녀의 모습에 도광이 아닌 다른 별호를 붙일 수 있을까 싶다.
‘다 좋은데! 하필 왜 대상이 나냐고!’
오호단문도가 무서운 이유는 이 도법이 만든 다섯 마리 호랑이의 위력 때문이다. 이것들은 사납고 파괴적인데 각자 다른 성질마저 가지고 있다.
조금 전까지 하나의 호랑이가 나를 덮치는 기분을 주었는데 이제 세 마리로 늘었다.
한 마리의 호랑이가 달려드는 기세와 비교할 수 없는 중압감이 나를 짓누르려 하는 것이다.
‘무공에 미쳐서 그런지 벌써 세 마리나 만들 수 있구나!’
팽가에서 오호단문도로 다섯 마리의 호랑이를 만드는 자는 한 손에 꼽는다. 그만큼 어려운 도법이다. 어린 나이에 벌써 세 마리의 호랑이를 만드는 도광 팽수련. 그녀는 정말 무서운 여자다.
맹호가 아니라 미친 호랑이 광호로 보이는 그녀의 세 마리 호랑이가 이제 나를 향해 출격한다.
“옥면검룡을 믿고 최선을 다 할게요. 지금 갑니다!”
나는 살살 하자는 말을 할 틈도 없었다. 그저 도광의 공격을 막을 생각에 나의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와라! 광호?虎 세 마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