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천마가 오고 있다. 3
* * *
‘아이 짜증 나! 왜 나만 성장이 느릴까?’
어린 서문미영은 자신이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왜소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어린 그녀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였다.
“엄마! 왜 나만 작아?”
“미영아. 조금만 지나면 금방 자랄 거야!”
“진짜야?”
“그럼! 엄마를 믿어.”
“치잉. 기다리기 싫어. 진짜 자라는 거 맞지?”
“엄마가 장담하니까 절대 걱정하지 마! 넌 가장 보기 좋게 자랄 거야!”
“휴우~. 다행이다.”
서문미영은 엄마를 믿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남들처럼 커질 거라 여기며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그녀.
안도하는 서문미영을 바라보며 엄마인 서문혜가 물었다.
“미영아. 너는 몇 살이야?”
“나? 열둘이지!”
“미영아! 엄마가 뭐라고 했어? 넌 여덟이야. 여덟 살! 절대로 잊지 마!”
“치이. 알았어. 엄마 앞에서도 그렇게 할 게.”
가뜩이나 왜소하고 작아서 불만인 아이에게 나이마저 낮추라고 말하자 딸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런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서문혜의 마음은 찢어지게 아팠다.
‘미안하다. 미영아. 어릴 때 성장이 느리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건 천가의 피를 가졌다는 뜻이야! 우리가 정주에 머무는 이상 어쩔 수 없어!’
서문혜가 딸에 대한 미안함에 슬픈 표정을 보이자 슬며시 다가와 엄마의 손을 잡는 착한 서문미영.
“엄..마 미안해! 내가 괜히 투정을 부렸어.”
“아니야 미영아. 넌 아무 잘못이 없어!
서문혜는 가엾은 자신의 딸 서문미영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달그락. 달그락.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 전각의 밖으로 나온 서문미영. 그녀는 자신이 사는 장원의 바로 옆에 위치한 빈 장원으로 짐을 싣고 오는 수레를 목격했다.
분주하게 짐을 나르는 사람들 사이로 눈에 띄는 존재가 둘이 있다.
말끔하게 잘 생긴 아저씨와 그 아저씨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똘똘하게 생긴 남자아이. 둘은 인물이 워낙 좋아서 시선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남자아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는 서문미영.
‘쟤는 왜 이렇게 귀엽게 생겼을까?’
서문미영은 어린 남자아이를 보자 알 수 없는 기분에 점점 빠져갔다. 저 남자를 보고 있으면 무엇인가 운명의 끌림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남자 아이가 이사를 온 날부터 서문미영의 모든 관심은 옆집에 사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엄마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날이 많아 집에만 머무는 서문미영.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옆에 사는 남자를 관찰하는 일에 사용했다.
“받아라! 나는 검제를 뛰어넘은 위대한 검황이다.”
남자아이는 공명심이 많은지 항상 영웅 놀이를 하고는 했다.
‘저런 놀이보다 부부 놀이가 훨씬 더 재미있을 거 같은데.... 저 아이는 혼자라 놀 줄을 모르나 봐!’
서문미영은 아버지가 자주 밖으로 출타하여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옆집 남자아이의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심심한 둘이 함께 어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하는 그녀.
‘바로 옆집인데 그냥 담을 넘어가서 함께 놀까? 엄마는 어차피 모를 거야!’
엄마 서문혜는 하루의 대부분을 침상에서 보냈다. 어디가 아픈지 추위를 유독 많이 느끼는 엄마이기에 서문미영을 따로 감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해보자!’
결심을 한 서문미영은 결국 남자아이에게 접근했다.
지겹도록 목검을 가지고 노는 아이는 오늘도 힘차게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넌 매일 혼자 놀더라!”
“누구야?”
담벼락 위에 올라있는 서문미영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아이.
“나는 서문미영! 너는 이름이 뭐야?”
“나? 위지천이야!”
툭. 서문미영이 높은 담벼락에서 사뿐하게 아래로 내려왔다.
“우와! 너 무섭지도 않아?”
“이 정도쯤이야. 가소롭지!”
체구만 왜소할 뿐 신체의 능력은 오히려 자신보다 큰 아이들을 앞서는 서문미영. 그녀는 자신을 대단하게 보는 위지천의 말에 기분이 좋았다.
“넌 몇 살이야? 나는 여덟 살이야.”
“으응. 나도 여덟 살이야.”
“잘 됐다. 우린 친구구나!”
“친..구?”
“응. 나이가 같으면 친구 아니야?”
“아...마도 그..렇지?!”
서문혜는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일단 위지천과 친구라도 하기로 했다. 엄마의 말을 따라 나이를 속인 서문미영은 자신보다 어린 위지천과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친구가 된 후로 매일 함께 어울리는 그녀.
“나는 무림의 평화를 위해 힘쓰고 악의 무리를 응징하고 처단하는 무영비객.”
“나는 그런 무영비객을 돕는 그의 하나뿐인 조수 비연검화.”
“검화! 우리 함께 악을 무찌르자! 가자! 와아아!”
“와...아아.”
영웅의 놀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위지천은 복면을 쓰고 무림에 나타나 강호의 악을 물리친다는 신비로운 고수 무영비객을 만들더니 서문미영에게 조수를 하라고 했다. 원래 조수는 이름도 없는 그냥 무명객이었으나 자신이 비연검화로 하자고 하여 별호라도 생기게 되었다.
‘으으. 너무 재미없어! 그래도 참아야 해!’
그녀가 위지천의 영웅 놀이에 동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이걸 해주지 않으면 위지천과 놀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위지천은 그가 원하는 놀이를 해주면 그녀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는 아이다.
한참이나 재미가 없는 조수 노릇을 한 서문미영. 드디어 그녀가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천아! 이제 소꿉놀이 시간이야.”
“또 내가 신랑이야?”
“당연하지! 무릎 꿇고 청혼을 해 봐! 내 마음에 쏙 들어야 하는 거 알지? 나도 조수를 했잖아.”
“아... 이런 건 피곤한데...”
“야! 이건 약속이야. 약속!”
“알았어. 제대로 할 게.”
위지천도 친구가 없는 건 매한가지. 그는 서문미영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문미영 앞에 무릎을 꿇은 위지천. 그는 서문미영이 평소 자주 시키는 걸 기억하며 청혼을 했다.
“미영아. 나는 너만 사랑해. 그러니 커서 나와 반드시 혼인하자!”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으음.... 이따 만큼이나 사랑해!”
위지천은 손을 최대한 넓게 펴면서 말했다.
“치이. 너의 사랑은 얼마 되지 않구나! 흥!”
토라진 표정의 서문미영.
어린 위지천은 일어서서 토라진 어린 서문미영에게 다가갔다.
“미영아. 잘 봐!”
손을 넓게 편 위지천.
“모르겠어?”
“뭘?”
“내가 손을 이렇게 펴면 미영이 너가 들어와도 이만큼이나 남잖아. 내 마음은 너를 가득 채우고도 이렇게 많이 남는다는 거야. 그게 내 사랑이야! 그러니 받아주지 않을래?”
변덕이 심한 서문미영이 어떻게 하면 좋아할지 고민한 위지천. 그는 서문미영의 표정을 보고서 자신의 이번 행동이 성공임을 확신했다.
‘여기서 확실히 하자! 미영이 같은 조수는 세상에 없어!’
서문미영은 위지천이 놀이를 할 때 악당도 했다가 조수도 했다가 지나가는 행인도 하는 그런 친구이다. 그만큼 다재다능하기에 위지천에게 있어 그녀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했다.
“내가 지금은 어려서 너에게 줄 게 없지만 크면 꼭 좋은 청혼의 반지를 줄 게. 지금은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해!”
“뭐가 있어?”
“응 자!”
위지천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서문미영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야?”
“우리가 꼭 혼인을 한다는 약속이야. 나의 아내가 될 거면 너도 여기에 손을 걸어!”
“응! 난 꼭 천이 너의 신부가 될 거야!”
서문미영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렇게 위지천과 서문미영은 혼인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됐어! 한동안은 미영이가 내가 하자는 걸 모두 해 줄 거야. 진작 이렇게 할 걸! 난 너무 멍청했어!’
‘아아. 내가 천이를 좋아하는 것보다 천이가 나를 더 좋아했어. 내가 어린 꼬마 비위를 맞춰주길 참 잘한 거야. 남자들은 나처럼 고분고분하고 착한 여자라면 무조건 반한다니까!’
*****
“쿨럭. 아아.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 커억.”
서문혜. 그녀는 기천화라는 기명으로 널리 알려진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기녀의 하나였다. 남자를 받지 않으며 가무만 제공하던 그녀는 천마신교의 교주 천정운의 눈에 보여 강제로 처녀를 잃었다.
비록 강제로 그녀를 취하였으나 천정운은 그녀에게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교의 교주인 천정운이 싫었다. 그의 품을 벗어날 기회만 노리던 그녀는 신교에 분란이 생겨 외부에 있던 자신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졌을 때 도주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천정운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아이를 지우고 싶었으나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아이를 낳았고 아버지의 성이 아닌 자신의 성을 주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에서 몸이 급격히 나빠진 서문혜. 그녀는 하루하루 약해져 갔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미인 내가 지금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있잖아.’
그녀는 지난 몇 달간 끊임없이 고민했다. 풍요롭게 지낼 수 있으나 힘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신교로 아이를 보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이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아비의 품이 더 좋을 거야!’
그녀는 결국 딸에게 아버지를 돌려주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천하표국에 들러 신교의 비밀 지부로 서찰을 보낸 그녀. 이제 신교에서 나온 누군가가 이곳으로 와 그녀와 서문미영을 데리고 갈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
서문미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위지천과 놀았다. 서문미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깨달은 위지천은 늘 달콤한 말을 준비하여 그녀의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천이는 나에게 푹 빠졌어. 고마운 아이니까 조수를 착실히 해주자!’
그녀는 커서 위지천과 결혼하는 상황을 늘 상상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얼마나 미래 남편을 잘 보조하는 여인인지 확실히 각인시키려고 노력했다.
“천아! 내일 또 보자!”
“응. 미영아. 내일은 어떤 영웅을 하면 즐거울지 너도 좀 생각을 해!”
“알았어. 잘 자. 남편!”
“너도 잘 자! 여보!”
서문미영의 요청으로 인하여 평소에도 서로를 남편과 여보라 부르는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사뿐히 담벼락을 넘어 집으로 돌아온 서문미영.
서문미영이 엄마가 있는 전각의 내부로 들어갔을 때. 집에 방문한 낯선 손님을 볼 수 있었다.
‘누구지? 우리 집에는 손님이 오지 않는데?’
“오셨군요. 천미영님.”
사소한 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새하얀 옷을 입은 요염하고 아리따운 젊은 여인이 부채를 휘두르며 여유롭게 천미영을 바라보았다.
“저는 천미영이 아니라 서문미영인데요?”
“교주께서 서문혜님과 천미영님의 존재를 알게 되어 너무도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아가씨는 신교의 적통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날 찾아온 마뇌 유설아. 그녀와 함께 무림맹이 있는 정주를 조용히 빠져나가 천산에 있는 천마신교로 가게 된 서문미영.
그녀는 그렇게 신교로 가 아버지를 만났고, 그곳에서 나올 수 없었다.
매일 눈물로 돌려보내라던 서문미영에게 마뇌 유설아가 말했다.
천가의 여인으로 태어나 시집을 가지 않고 신교를 나가는 방법은 천마가 되는 길이 유일합니다.
그날 이후 천미영은 천마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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