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사부와 나2
* * *
사황련 지존각
무림맹과 함께 천하를 양분한 거대 세력인 사도의 하늘 사황련의 련주가 머무는 지존각의 대전에는 잔뜩 화가 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콰앙.
그가 힘을 주어 커다란 탁자를 때리자 주변의 모든 것이 진동했다.
“련주! 진정하셔야 합니다.”
“검후가 아버지를 모욕했다. 총사. 아들인 내가 어찌 참을 수 있겠느냐!”
사황련의 현재 련주이자 천하십대고수의 1인 사존 패천악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검후는 강호에 나와 무림맹에 가입을 했으나 늘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자입니다. 이 도전은 평소 그녀의 행보를 고려하면 어떠한 의도가 있다고 사료되지 않는 순수한 도전으로 여겨집니다. 준비가 된 기세가 강한 자의 도전이니 자연스럽게 거절하는 게 옳다고 판단합니다.”
“이 도전을 피하면 사람들은 우리 사황련이 검후가 무서워 겁을 먹었다 할 것이고 받아들인들 저쪽은 잃을 게 없다. 어차피 통제가 되지 않는 검후는 버려도 아깝지 않은 패니까 말이다.”
“그렇긴 하나 도전을 허락하기에 검후란 존재는 매우 위험합니다.”
“닥쳐라! 일개 계집일 뿐이야! 나를 상대로 도전해야 마땅한 년이 아버지께 도전을 해? 참으로 분하구나!”
사존 패천악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사황마제 패무강에게 검후 설지연이 도전한다는 무림맹의 서찰을 받자 가슴에서 치미는 분노를 주체하기 어려웠다.
끼이익.
그의 몸에서 강력한 패기가 마구 발산되고 있을 때 지존각의 문이 열렸다.
탁. 탁. 탁.
천천히 존재감을 내뿜으며 지존각으로 들어오는 자.
그는 나이가 무척 많은 노인임에도 검은 흑발에 짙은 눈썹을 가졌으며 강력한 패기가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노인이 들어서자 지존각의 모든 이들이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에게 공손한 인사를 했다.
“태상을 뵙습니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서 발산되는 패기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인지한 모습. 융합이 어려운 이질적인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키는 노인은 누가 봐도 대단한 존재였다.
“천악아.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느냐?”
“...”
“검후가 이 아비에게 도전했다는 말을 들었다. 혹시 그것 때문이야?”
“거..건방지게도 사실입니다. 아버지. 제가 부족하여 천하삼제의 이름을 더럽혀 죄송합니다.”
“후후.”
미소를 보이는 사황마제 패무강. 아버지가 작은 미소를 보이자 사존 패천악은 고개를 숙였다.
“검후의 도전을 이 사황마제가 받아들인다 하여라.”
“아..아버지! 5년 전 아버지가 살려주었던 목숨을 이제라도 거두려 하시는군요.”
“살려주었더라....? 이 아비는 검후를 살려준 적이 없다.”
“예?”
“이길 자신이 없고, 내가 패할 수 있다 여겨 그 아이와의 대결을 피하고자 보내 주었을 뿐이다.”
덜덜덜.
사존 패천악의 몸이 떨렸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는 천하를 대표하는 십대 고수 중 격이 다르다 칭하는 삼제의 일인 사제 사황마제이다. 그런 아버지가 이길 자신이 없어 보내주었다는 말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느샌가 사존 패천악의 옆으로 다가온 사황마제 패무강.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 아비는 고아로 태어나 지금의 이 자리까지 왔다. 손속에 정을 두지 않았고, 위만 보며 달려왔던 남자의 삶이지. 그런 내가 생에 단 한 번 베푼 자비. 그 작은 불씨가 이제 나를 삼키는 화마가 되어 돌아왔구나.”
“그...그게.”
“사황련을 만들고 련주가 되었을 때 이 아비는 힘을 과시하고 싶어 남해 보타암을 멸했다. 그날 울고 있는 나약한 어린 여자 아이 하나를 살려주는 자비를 보였지.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보타암의 유일한 겁쟁이 생존자가 나의 업적을 천하에 알릴 거라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그 겁이 많던 아이가 이 사황마제가 두려워할 무적의 고수를 키워냈구나.”
“아...버..지.”
“천악아. 이것이 강호다. 그 아무것도 없던 아이가 검후를 만들었고, 이 아비는 5년 전 검후와 싸워도 이긴다 자신할 수 없었다. 이제 모든 준비를 끝낸 검후가 나를 찾아온다. 이 싸움은 피할 수 없고 나 사황마제 패무강은 피하는 인생을 살아온 적이 없다. 그러니 검후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그 아이는 사제와 싸울 자격이 있다.”
*****
놀라운 이야기를 전달한 군사 제갈유현과 지다화 제갈상아가 조금 전 떠났다.
나는 너무도 긴장하여 몸이 떨리고 있었다.
“사...사부. 자신이 있는 거 맞죠?”
사람이란 99.99%의 승산이 있어도 0.01%의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만에 하나라는 이름을 달고서 살아가는 모순덩어리이다.
소설에서 사황련과 검후는 사이가 나쁘다. 나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천하삼제의 1인 사황마제 패무강과 싸운다는 검후 사부. 지난번 사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슨 일이 조만간에 터질 거라 짐작은 했었다. 그렇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르게 급작스러운 형태로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
‘사부가 그와 싸워 이긴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잖아!’
나는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천하삼제. 중원에서 가장 고강한 고수 셋을 일컫는 말이다.
무제 낙성무제 용천비
검제 창궁검제 남궁태현
사제 사황마제 패무강
이들 셋은 천하십대 고수 중 차원이 다르다 평가받는 삼제이다. 그런 삼제 중 유일하게 아직도 간간히 활동을 하는 고수는 사제 하나뿐이다. 하여 사실상 천하제일인으로 불리는 인물이 바로 사황마제 패무강이다. 그런 놀라운 고수와 사부의 대결이 다가오고 있다.
검후가 구천하제일인을 이겨, 새로운 천하제일인에 등극하는 화려한 대관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내 걱정하는 거야?”
“당연하죠!”
나의 말에 밝은 미소부터 보이는 사부.
“히히. 나 기분이 너무 좋은데?”
“지금 웃음이 나와요? 무조건 이긴다는 자신은 있는 거죠?”
“잘 모르겠는데? 흐응. 나는 남해 보타암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도전하는 것뿐이야. 더 기다렸다 사황마제가 죽거나 약해지면 보타암의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가 사라지잖아.”
“아니... 목숨을 건 비무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사부에 대한 걱정으로 격하게 흥분한 나. 그런 나를 보며 즐거운 표정을 하고서 다가와 내 얼굴을 감싸 안는 검후 사부.
“천아. 강호란 원래 이런 곳이야. 싸울 준비가 되었다고 싸우고 이길 승산이 있다고 싸우는 그런 곳이 아니야.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하는 곳이야. 지금이 아니면 그가 전성기일 때 싸울 수 없고, 내가 어떤 확신을 가진들 상대는 스스로를 증명한 사황마제. 내가 그를 이긴다 자신하는 건 그의 살아온 삶에 대한 모욕이야.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야!”
검후의 품에 앉긴 나는 느꼈다.
나에게 다정다감한 사부가 왜 천하를 대표하는 고수인지.
그녀가 버텨온 삶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사부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지켜볼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제 두 눈으로 보면서 믿고 지켜볼 게요.”
“어어? 너는 데려가지 않을 건데?”
“예에? 사부가 목숨을 거는데 대제자가 빠진다고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사부. 내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사부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사황마제를 믿지만 그는 사황련이라는 거대 세력을 이끌던 자야.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몰라. 그래서 일부의 고수만이 이번 비무의 관전자가 될 거야. 천이 넌 아직 시...실력이.. 좀 부..족해서 그게 그렇게 됐어.”
만약 그곳에서 나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사부는 제대로 싸울 수 없다. 고수들로 가득한 곳에서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는 내가 무사하다는 보장은 없으니 안전한 곳에 있으라는 말이다.
사부가 떠나는 위험한 길을 함께 가지 못하는 건 너무 아쉽지만 듣고 보니 납득이 되었다.
“저는 반드시 사부가 이긴다는 걸 믿을 게요.”
“응! 너를 위해 더 힘을 낼 게!”
예상보다 빠른 사황련의 반응. 사부는 사황마제와의 일전을 위해 조만간에 무림맹을 떠나야 한다.
오늘 수련이 모두 끝나 조용히 자신의 거처로 향하는 사부.
“저.. 근데.. 말이에요.”
나의 말에 사부의 걸음이 멈췄다.
“뭔데?”
“마..만약에 말이에요.”
“만약에 뭐?”
“제가 이 대결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강하게 반대하면 사부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검후 사부. 그녀의 얼굴만 봐도 이런 고민은 해봤던 적이 없음이 느껴졌다.
잠시 굳어 있던 그녀의 표정은 잠시 후 부드럽게 변했고, 이제는 미소를 짓고 있다.
오직 나만을 향한 검후의 미소라 여겨져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 천이가 싸우지 말라면 하지 않을 게.”
쿵.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부의 말에 나는 너무 놀랐다.
검후 설지연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가는 고수. 그녀는 강호에 나와 지금까지 순간의 분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말한 적이 없는 여자이다.
“사부가 먼저 도전을 하였고 상대가 응하자 도망친 비겁자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겁니다. 평생 놀림을 당할 일이 분명한데... 그래도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이 못난 제자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나는 나의 이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작게 볼 때 검후 설지연 본인의 명예와 자존심이 달렸고. 크게 보면 태사부인 보타신니의 한과 남해 보타암의 복수가 걸린 일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나를 아끼는 사부라도 이런 질문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이건 그저 철부지의 어리석은 투정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검후 사부는 나를 택했다. 이런 나의 말에 내가 원하면 그리 하겠다 하는 것이다.
“사부는 나에게 많은 걸 원하지 않았고, 보타암의 다른 분들이 살아 계시다면 아마 다들 나의 행복을 더 바랄 분들일 거야. 그러니 정말로 괜찮아!”
나는 사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는 사부가 이긴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 다녀오세요. 은원을 다 정리해야 홀가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응!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게.”
나는 사부에게 묻고 싶었다.
보타암의 명예를 회복하면 나와 함께 강호를 떠나지 않겠냐고... 하지만 이런 나의 말이 지금 사부에게 부담이 될까 두렵기에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와 사부가 강호를 떠나면 사부가 폭주하는 일도 없고, 내가 죽임을 당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을 거야! 몇 년 정도만 숨어서 조용히 흘러가면 소설의 내용은 이미 달라지는 거야!’
나는 사부가 떠나기 전 그녀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어주고, 돌아오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강호를 떠나자고 요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제부터 사부에게 지금까지 보다 훨씬 더 잘해주자!’
사부가 나를 아끼는 마음이 커지면 강호를 떠나자는 황당한 말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긴 나는 사부와 나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 강호를 떠나는 시도를 준비한다.
‘끝판 보스가 사라지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겠지?! 내가 아주 큰일을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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