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사부와 나
* * *
나에게 들려오는 검후 사부가 걸어온 삶에 관한 이야기들.
그녀는 험난했던 자신의 과거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백하게 말했다. 가벼이 말하나 결코 가볍지 않은 검후의 고단한 인생이 느껴졌다. 내 삶이 아님에도 마음의 일부가 아파온다.
“검후라는 이름에 이런 가슴 아픈 의미가 있을 줄 몰랐어요.”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잖아. 그래도...”
“???”
“너에게 말하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좋네. 돌아가신 사부를 생각하면 늘 마음 한 구석이 짠했는데 이제는 나도 혼자가 아니라 홀가분해졌어. 다 너 때문이야!”
“그럼요. 사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있잖아요!”
“응! 절대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나에게 업힌 사부가 숨을 쉬는 게 살짝 힘들 정도로 나의 목을 힘주어 안았다.
“컥. 커억. 사..살살!”
사부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반드시 명심하라는 듯 계속 힘을 주며 나를 압박했다. 갑갑함은 있으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내가 소설을 바꾸고 싶어!’
나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뒤를 아는 자. 가엾은 검후 설지연이 폭주하여 역사의 끝에서 악인으로 기억되지 않도록 만들고 싶어진다.
비틀비틀. 흔들흔들.
분명 사부를 업고 걸어가고 있으나 실상은 업힌 사부가 나를 끌고 가는 중이다. 나는 보폭과 거리. 움직이는 속도 등 모든 걸 사부가 보내는 내공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사부가 보내는 움직임을 따르기에 나의 걸음은 불안했다.
하지만 섬세한 사부의 도움으로 결코 넘어지지 않고 나아가는 나. 칠성풍운보를 자연스레 익혀나간다.
“이렇게 배우면 언제쯤 칠성의 방위를 몸으로 익힐까요?”
“으음. 2주 정도면 몸이 저절로 칠성을 따라 움직이게 될 거야!”
“우와! 천하의 검후 사부가 3년이나 걸린 걸 우매한 제자인 제가 고작 2주에 도달하다니... 사부는 그렇게 힘들게 익혔는데 이렇게 날로 배우는 저를 보면 억울하지 않아요?”
“무슨 말이야! 나는 천이가 고생하는 게 너~~무 싫어. 사부와 내가 그렇게 고생만 했는데 어떻게 귀한 제자를 힘들 게 교육 시켜! 난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제자를 고생시키지 않을 거라 단호하게 말하는 사부. 그녀의 마음에 살짝 아니 크게 감동했다.
“검후 사부는 보타신니 태사부처럼 참 좋은 사부에요.”
“그럼~”
‘사부가 이렇게 다정다감하고 잘 가르쳐 주니 내 밑으로 사매들이 들어오게 되나 보다.’
나는 확신했다. 검후에게 배우면 쉽고 편하게 고수가 된다는 걸. 추후 나의 사매로 오게 될 여자들은 나처럼 행운이 가득한 무인이라 하겠다.
“사부 이제 해가 지고 있어요. 저기 보여요?”
“응. 보여.”
우리는 아무도 없는 어느 산의 꼭대기에서 지는 해를 함께 바라보았다.
“사부는 중원의 태양이에요. 언젠가 지는 날이 와도 태양처럼 절대로 변하지 마세요.”
“천이가 늘 나와 함께 같은 곳을 바라봐 준다면 내가 변하는 일은 없을 거야!”
“예에?”
나는 사부의 말에 조금 어리둥절했으나 분위기가 워낙 좋기에 흥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긴 시간을 계속 걸었기에 우리에게 밤이 찾아왔다. 탈태환골을 하여 사물이 또렷하게 보여 움직임에 제약은 없으나 날이 조금 쌀쌀하다 느껴졌다.
사부는 추위와 더위가 침범하지 않는 고수답지 않게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는 검후가 추위에 유독 약하다 여기며 그러려니 했다.
‘어릴 때 워낙 춥게 자라서 춥지 않아도 춥다고 느끼는 습관이 생겼나?!’
*****
지다화 제갈상아.
그녀는 집무실에 앉아 차분하게 글을 쓰고 있었다.
[사저 오랜만이에요. 저는 드디어 찾고야 말았어요. 사저와 내기를 생각해 이렇게 서찰을 보냅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을 테고 저에게 기회가 오고 있다는 것만 이야기할 게요. 그러니 때가 되면 저를 축하하러 오실 준비나 하고 계세요.]
끼이익.
그녀가 한참 서찰을 쓰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그녀의 아버지인 군사 제갈유현이 들어온 것이다.
“아빠는 인기척을 좀 주고 들어오세요.”
“여기는 내 집무실이야. 전서구도 내가 관리하는 거고. 넌 이런 것들을 모두 공짜로 쓰면서 아비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야?”
“아빠는 전술은 참 훌륭한데 처세를 보면 아직도 한참 멀었어요. 흥!”
“크음. 딸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니 화도 나고 섭섭하구나. 벌써부터 딸을 키운 보람이 사라졌어. 이 아비는 참으로 마음이 아프구나.”
대화를 나누며 서찰의 봉인을 끝낸 지다화 제갈상아. 그녀의 서찰을 슬쩍 본 제갈유현.
“너희는 지겹도록 서찰을 주고받는데 피곤하지도 않냐?”
“아버지도 검왕 아저씨와 편지를 자주 주고받잖아요. 요즘 검왕 아저씨가 무림맹에 있어 서찰을 보낼 일이 없어졌을 뿐이잖아요.”
“어허! 우리는 무림에 앞날을 함께 걱정하는 거다.”
“제가 몰래 본 편지 내용을 이야기할까요? 남궁 아저씨가 첩을 들여야 하는데 황보 부인의 반발을 억제할 묘수가 필요하다며 아버지께 자문을 구하던...”
“크음. 항상 입을 조심해야 하는 거야. 입을. 명심해라. 내 딸 상아야!”
“그렇죠. 입을 조심해야죠. 저도 그리고 아버지도 말이에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제갈유현. 그는 자신이 딸을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사황련에서 연락이 왔죠?”
“어..어떻게 알았어?”
“제가 누구의 제자인 줄 아시잖아요. 사제의 운명은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다고요!”
“이 아비가 너의 그 엉터리 실력을 믿고 자유를 주고 있다는 걸 항시 잊지 말아라. 상아야.”
“물론이죠. 이렇게 살고 싶어서 배운 건데 잊을 리 없죠.”
오늘도 말로는 딸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느낀 제갈유현. 그는 무언가를 챙겨 떠나려고 했다.
“맹주를 뵙고 나면 검후께 갈 거죠?”
“그거야 그렇지.”
“저도 같이 갈게요.”
“또?”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신기서생 제갈유현은 지다화 제갈상아가 가진 능력을 믿기에 그녀의 동행을 이번에도 허락했다.
자신을 믿어주는 편안한 아버지 제갈유현을 바라보는 딸 제갈상아.
‘아빠 미안해요. 한 번의 거짓을 위해 그동안 모든 걸 진실하게 말했어요. 모르면 끝까지 진실이니까 저에게 속아도 절대 진실을 찾지 마세요!’
*****
“이번엔 조금 빠를 거야!”
“괜찮습니다.”
쉬잉.
공기를 가르는 빠른 쾌검이 나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왔다. 하지만 여유롭게 피하는 나.
탈태환골을 하여 동체시력이 좋아진 탓도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칠성풍운보에 대한 감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어디 가서 죽지는 않겠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네.”
“사부가 있는데 제가 왜 죽어요? 저를 두고 어디 떠나시려고요?”
“너를 두고 내가 어딜 가! 그저 사람 일은 모르니 항상 대비를 하자는 거야.”
“그건 맞아요.”
사부는 최근 집요하게 방어에 대한 대비책과 효율적인 내기의 운용을 가르쳤다. 내가 다치는 상황이 생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부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고생한 사부에게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으응 시원해!”
“이게 할수록 늘더라고요. 혈을 참고하니까 요령도 생겨서 자신감도 생기네요.”
“너 소질이 있나 봐!”
“이참에 제대로 배워올까요? 사부가 제일 수혜자가 될 거에요.”
“배우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주물러 주기도 해야 하는 거지?”
“그렇지 않을까요?”
“안마의 고수 중 여자는 없어?”
“반은 여자가 아닐까요?”
“안 돼!”
“예에?”
“난 너의 노력하는 손이 좋아. 그 자세가 나를 시원하게 하는 거지. 기술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니 배우는 건 금지야. 넌 무공을 배울 시간도 부족해. 천아! 모르겠어?”
“그..렇죠.”
사부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 잠깐의 쉬는 시간이 끝났다. 다시 무공을 익힐 시간이다.
“천아! 때론 공격이 가장 확실한 방어야. 이 사부가 혼원대공의 부작용으로 내공이 사라졌을 때 위기에 대처할 칠성풍운보의 진가를 알려줄 테니 꼭 기억해. 너를 위기에서 지켜 줄 가장 확실한 힘이 될 거야.”
“감사합니다. 사부!”
오늘도 언제나 나에 대한 염려와 배려로 가득한 사부의 마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걸 잘 봐!”
나는 초집중하며 사부를 보았다.
손을 뒤로 보내어 뒷짐을 진 사부. 아무래도 다리의 움직임에 시선을 집중하라는 의미로 보였다.
“칠성풍운보의 첫 두 걸음. 두 걸음에 모든 공격을 피한다. 이보탈공”
사부가 끊어서 보여주는 다양한 두 걸음. 나는 머리로 검을 들고 사부를 공격하는 상상을 했다. 저 걸음들을 기억했다 상황에 맞게 대입하면 무수한 공격들이 아주 쉽게 무위로 돌아갔다. 실로 놀라운 움직임인데 고작 두 걸음이면 충분했다.
“칠성풍운보의 중 두 걸음. 다음 두 걸음에 상대를 제압할 모든 준비를 끝낸다. 이보압전”
어떠한 연환공격을 당해도 첫 두 걸음 뒤에 이어지는 다음 두 걸음을 통하여 상대에 대한 반격을 끝내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검후 사부. 왜 칠성풍운보가 검후를 상징하는 보법인지 새삼 실감이 났다.
“칠성풍운보의 후 두 걸음. 두 발짝 나아가면 내 앞에 모든 자를 무릎 꿇린다. 이보무적”
상대의 방위를 차단하며 움직이는 두 걸음. 저렇게 움직여 손으로 상대를 공격한다 상상하면 정말로 여섯 걸음이면 능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저 놀랍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짝짝짝.
진실한 마음으로 힘차게 손뼉을 부딪쳤다. 내 박수에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 사부.
“정말 놀랍습니다. 사부. 근데 왜 칠성의 일곱 걸음이 아닌 여섯 걸음인지 물어도 될까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는 사부.
“마지막 일곱 걸음은 풍운의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가능한 환이야. 천아. 너에겐 아직 무리야. 시간이 흐르면 칠성풍운보의 마지막 한 걸음인 세상도 속이는 환도 가르쳐 줄 게!”
상대의 공격을 막는 두 걸음에, 반격을 위한 두 걸음. 그리고 공격을 위한 두 걸음을 완벽히 익히는 건 나에겐 상당한 시간을 요한다. 칠성풍운보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환은 아직 엄두도 나지 않는 단계이다.
‘항상 중심을 잡자!’
소설의 흐름으로 계속하여 흘러갈 경우 사부와 나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모른다. 그저 나는 죽고 사부는 악마가 된다는 걸 알고 있을 뿐이다. 이걸 떠올리면 마음이 초조해지는 때가 많다.
“언젠가는 사부를 능가하는 제자가 될 겁니다.”
“나 검후야 검후! 천이 넌 이런 사부를 능가할 수 있겠어?”
“저는 대장부입니다. 사부를 반드시 능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무협지에서는 스승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청출어람이다. 나는 검후 사부가 이렇게 말하면 아주 좋아할 거라 판단했다.
“아이참! 넌 나를 여자로만 보려고 하잖아. 나 너무 부끄러워.”
툭. 툭. 붉은 얼굴로 내 어깨를 가볍게 때리는 사부.
사부가 내 말에 기뻐한다. 그런데 어째 남자로 태어난 내가 여자인 부인에게 질 수는 없다고 들은 거 같다. 아무래도 사부는 나와 했던 혼인에 대한 유희를 여전히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사부가 무공을 익히며 견뎌온 그 집념을 생각하면 장난이라도 패배하기 싫을 거야. 어떻게든 내 항복을 받고 싶은가 본데... 저도 고집하면 어디서도 빠지지 않습니다. 사부!’
“그럼요. 저는 제 여자보다 약한 남자로 살 생각이 절대로 없습니다.”
“아앙. 천아. 남자는 너처럼 포부가 있어야 하는 거야. 늦게 무공에 입문했는데 검후를 목표로 하다니... 넌 너무 멋진 남자야! 최고야 최고!”
나를 반드시 이기고 싶은지 사부는 여유를 부렸다. 나에게 엄지척을 시전하며 응원도 하는 모습을 보니 사부는 역시 강하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이거다. 사부가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기쁘다.
그렇게 즐거운 분위기가 흘러갈 때 냉랭함이 찾아왔다. 사부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 탓이다.
“또 군사야?! 또 지다화고?!”
나는 사부의 말을 듣고 순간 바로 느꼈다. 군사와 그의 딸이 사부와 내가 있는 금관을 또 방문하고 있음을.
‘이번엔 두 분이 무슨 일로 오는 걸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