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몰락한 남해 보타암의 마지막 제자 설지연 2
* * *
대기근이 이어져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헉 헉 이제 나도끝이구나.”
추운 날씨와 오랜 굶주림 탓에 얼어 죽을 것 같은 어린 설지연은 자신의 남은 삶이 얼마 되지 않음을 느꼈다.
“아빠, 엄마, 오빠, 언니. 나도 그곳으로 갈 거야.”
그녀는 가족들을 묻어둔 집 뒤쪽의 작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빈속이라 더 춥고 힘도 없어 몸이 심하게 떨렸다. 하지만 설지연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네 개의 무덤 앞에 도착한 설지연. 그녀는 무덤을 바라보며 떠난 가족들을 떠올렸다.
“내가 어떻게든 다른 사람 몫까지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미안해. 진짜 아무리 찾아도 먹을 게 없어.”
가족들 모두 굶어 죽었으나 유일하게 아직까지 살아남은 설지연. 이제 그녀마저 세상을 떠나야 할 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설지연이 그리운 아빠와 엄마의 묘 앞에 누워 서서히 눈이 감겨갈 때였다.
“이제야 마중을 왔구나! 너무 보고 싶었어. 히이잉.”
그녀의 눈에 아빠와 엄마 그리고 오빠와 언니가 보였다.
“저승이 나쁘진 않나 보네. 다들 살도 쪘잖아. 이번엔 꼭 나도 데리고 가자!”
굶어 죽었으나 그렇게 슬퍼 보이지 않는 가족들. 그녀는 죽어서 고생하지 않는 가족들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가족들이 그녀에게 오지 말라고 밀치는 손짓을 보였다.
“나 너무 힘들어. 제발 같이 가자!”
하지만 가족들은 어떤 말도 없이 오지 말라는 모습만 보이다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나보고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야! 흑흑”
그녀는 가족들이 보였다 사라지자 서러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 힘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구나. 흑흑흑”
비록 착각일지라도 떠난 가족을 보게 되자 메마른 눈가에 눈물이 터져 흐르는 설지연. 그녀는 그렇게 무덤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다.
그때였다.
“아이야? 괜찮니?”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린 설지연. 그녀는 스님들이 입는 낡은 가사를 입은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주름으로 가득한 노파를 볼 수 있었다.
“누..누구세요?”
“나는 이름을 버렸단다.”
“치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설지연의 말에 미소를 보이는 노파.
“이름을 잊었지만 사람들은 나를 보타신니라 부르니 너도 그렇게 부르면 된단다.”
“보 타 신 니? 뭔가 슬픈 이름 같아요.”
“슬픔이라... 그건 나의 친구이지. 너는 가족을 잃은 아이 같은데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저 밥을 아주 많이 먹어서 팔아도 돈이 나오지 않을 거예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저 정말로 많이 먹는데 괜찮아요?”
“물론 괜찮단다. 내가 굶기지 않고 너를 성인이 될 때까지 반듯하게 키워주마.”
“알겠어요. 아무리 봐도 할머니는 좋은 사람 같...아...”
툭.
그녀는 이 할머니가 자신의 죽은 가족들이 보내준 사람이라 굳게 믿었다. 그렇기에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굶주림에 말을 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설지연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든 노파. 작은 봇짐에서 열매를 꺼낸 그녀는 손으로 즙을 내어 아이의 입에 넣었다.
“좋은 사람?! 나는 너에게 악마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
보타신니는 자신의 유일한 제자인 설지연을 바라보며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지연아. 이 사부가 정을 이용하여 너를 지옥으로 내밀고 있는 거야!’
설지연은 보타신니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아이였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녀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아이기도 했다.
열 살도 되지 않는 여자 아이가 무리와 떨어진 굶주린 늑대와 싸우는 광경을 보게 된 보타신니. 그녀는 치열하게 싸우는 이 아이가 어쩌면 보타암의 전설을 재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의 뺨에 깊은 상처가 생길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 위험한 상황이 분명하나 끝내 아이를 구해주지 않고 지켜만 본 보타신니. 그녀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비정한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저 아이가 만약 이 시련에서 살아남는다면 전설의 검후가 될 자격이 있어!’
불가의 마음을 품은 보타신니가 마음의 가책을 감수하며 얻은 제자 설지연. 뺨에 남은 늑대가 준 상처를 볼 때면 그녀는 늘 제자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굶주려 쓰러진 틈을 이용하여 설지연에게 다가가 그녀를 제자로 받아 들인지도 벌써 반년.
보타신니는 그동안 설지연을 잘 먹이며 글도 가르쳤다.
‘함께 있을수록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구나.’
보타신니는 자신의 제자 설지연이 딸처럼 소중해졌다. 그렇기에 자신의 오랜 숙원을 제자에게 절대로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지연아. 이게 마지막 기회다. 나의 욕심으로 너를 검후의 길로 이끄는 건 차마 할 수가 없구나. 그러니 너는 검후를 하지 않겠다 말하여라. 그럼 이 사부가 너를 검후로 키우지 않을 거다.”
“저는 이미 각오를 했어요. 사부. 제가 반드시 사부의 꿈을 이뤄드릴 게요.”
“못난 이 사부가 너를 검후로 키우려면 너에게 악마와 같은 존재가 되는 방법밖에 없단다. 이 사부는 그게 너무도 무섭고 싫지만 포기할 수가 없구나.”
“사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사부는 그저 저의 사부에요. 그러니 지금처럼 울지 마세요. 제가 다 이겨낼게요. 저는 검후 설지연이에요.”
“지연아. 흑흑흑. 고맙고 미안하구나.”
“우..울지 마세요. 사부. 저도 슬프잖아요. 흑흑.”
몰락한 전설의 문파 남해 보타암의 유일한 생존자인 보타신니.
그녀는 평생 보타암의 재건을 위해 살았다. 보타암이 다시 부활하려면 보타암의 상징이자 남해의 절대 고수인 검후가 나와야만 한다.
여중제일인.
단신으로 천마를 이기는 유일한 여류 고수.
이 모든 영광은 남해 보타암의 검후를 상징하는 찬란한 말이었으나 이제는 사라진 전설의 하나에 불과했다.
완벽하게 몰락한 남해 보타암에는 제대로 된 무공서도 없고 영약도 없었다. 그들 사제에게 남은 건 오로지 보타신니의 생각과 신념만으로 준비한 지난 수십 년의 세월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엉성하고 위험한 준비일 것은 자명했다.
그걸 알기에 이 험난한 길에 자신의 제자를 올려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보타신니는 결국 자신의 간절한 숙원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제자 설지연을 검후의 길로 내몰았다.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사부와 사숙 그리고 사저, 사매의 처절한 울부짖음. 보타암 가족들이 죽어나가던 그날의 참상에서 보타신니는 평생 자유로울 수 없었다.
“너를 반드시 내 손으로 검후로 만들 거다. 지연아! 이제 이 사부를 악마라 욕하며 버텨라. 이제 다시는 하지 못할 마지막 말이니 지금 이야기 하마.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
*****
쉬잉.
찰싹.
날카로운 채찍이 날아와 설지연의 다리를 때렸다. 내기가 실린 채찍이라 다리에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설지연은 얼굴을 조금 찡그렸을 뿐 다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틀렸어. 어떤 순간에도 칠성을 유지하며 걸어야 한다. 벌써 잊었느냐?”
“더 집중할 게요. 사부.”
“항상 명심해라. 그 무엇을 하더라도 칠성의 움직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라진 칠성풍운보를 다시 재현할 수 있다.”
검후가 되기 위한 보법. 칠성풍운보를 익히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참으로 험난했다.
설지연의 모든 움직임은 칠성풍운보를 재현하기 위하여 칠성의 방위를 따라 움직여야만 했다. 조금만 틀어져도 날아오는 잔혹한 매질. 그 무서움은 그녀가 다른 움직임을 보일 수 없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분명 잔인한 가르침이었다. 얼마나 많이 사부의 채찍에 당했는지 설지연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그러나 설지연의 생각은 달랐다.
‘사부가 나보다 더 힘들 거야. 그러니 참고 힘을 내자!’
설지연은 알고 있었다. 사부가 단 한순간도 칠성풍운보를 위해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음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이 빌어먹을 보법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나 핵심인 요해가 유실되어 껍데기만 남은 몇 가지 구절로는 절학이라 불리우는 칠성풍운보를 빠르게 익힐 수 없었다.
때론 사부가 만든 가설이 틀리지 않았을까 의심이 생기기도 했으나 설지연은 항상 한결같은 마음을 품었다.
‘사부가 틀렸다면 내가 반드시 바른 걸로 만들 거야!’
그녀는 그렇게 움직임의 모든 것을 칠성풍운보를 녹이기 위해 살았다.
그렇게 살기를 3년. 이제 설지연은 모든 것을 칠성의 방진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다.
가뜩이나 나이가 많아 보이던 사부는 이 기간 동안 더 늙었다. 그런 사부를 볼 때면 설지연의 마음은 늘 아팠다.
지난 3년간 지옥의 나찰처럼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고 있으나 사부가 속으로는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그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드디어 너에게 무정일검을 가르칠 수 있는 때가 왔구나.”
“아아. 드디어 검을 익히는 단계에 왔군요. 사부!”
그녀는 뛸 듯이 기뻤다. 이제 빨리 이 무정일검을 완성하여 사부가 그토록 꿈꾸던 남해 보타암의 재건을 이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잘 들어라. 지연아. 우리 남해 보타암의 역사에 대해 알려주겠다.”
“예. 사부!”
“초대 검후께서는 시천마의 연인이셨다. 무공에 미친 시천마에게 실연의 상처를 입은 검후께서는 천마와 멀리 떨어진 이곳 남해까지 와 불가에 귀의하며 보타암을 세우셨고 이것이 남해 보타암의 전설이 시작된 계기란다.”
설지연은 집중하며 사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초대 검후께서는 불가의 귀의하였으나 정인이었던 시천마에 대한 원망을 완벽하게 없애지 못하셨고, 그럴 때마다 그분은 무공에 더 정진하셨다. 그렇게 하여 천마를 제압하기 위해 만든 단 하나의 검이 탄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우리 보타암과 검후를 상징하는 무정일검이다.”
사부는 그동안 의도적으로 사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건 꼭 알아야 함을 느낀 설지연은 지금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겼다.
“무정일검은 천고의 절학. 아무나 익힐 수 없다. 하여 이를 익히기 위해 일검을 삼검으로 나눴고 다시 구검으로 나눴다. 이후 18검이 되고 36검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72검이 되고 말았다. 그런 무정72검 역시 모든 것이 소실되었다. 장문 제자였던 사저가 세상을 떠났고 이 사부는 껍데기만 가지고 무정72검의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니 너는 이 부족한 사부가 만든 껍데기 무정검으로 진짜 무정검보다 더 위대한 무정일검을 완성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검후의 이름으로 천마를 제압하여 주기 바란다. 이 사부가 너에게 꿈꾸는 마지막 바램이다.”
자신이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지 잘 아는 사부 보타신니. 그녀는 제자의 고행이 안타까워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이 제자가 반드시 무정일검을 완성하여 천마를 제압하고, 사부를 이렇게 만든 사황마제도 검후의 이름으로 없앨 겁니다.”
“지연아 어..어떻게 너가 사황마제를 아느냐?”
“보타암을 무너뜨린 자가 사황련의 련주 사황마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던데요?”
“...그렇구나.”
보타신니는 남해의 전설이 패배한 씁쓸한 기억으로 세인의 기억에 남게 된 현실이 서글펐다.
“사부!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무정일검을 완성하겠습니다.”
“무정일검은 9검만 이뤄도 검후라 불러 줄 정도로 난해한 검법이다. 그러니 너는 이 껍데기만 남은 검법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제가 무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검후가 어떤 존재인지 세상에 보여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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