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검후의 제자9
* * *
나는 영약의 복용을 위하여 지난 며칠간 단식을 했다. 여기에 추가로 사부가 뜨거운 기운을 넣어 몸에 있는 불순물도 태워주었기에 속도 아주 깨끗한 남자가 되었다.
물론 빈속이라 에너지가 심각하게 부족하여 작은 움직임도 빈혈을 부르는 때가 있기는 하다.
“천이가 이렇게 좋아하니까 나 너무 좋아!”
이런!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나 보다. 근데 이건 어쩔 수 없잖아! 평범한 사람이던 내가 영약을 먹게 되었다. 그러니까 넉넉한 내공을 지닌 고수가 될 거라는 거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게 다 사부를 잘 만난 덕입니다.”
“당연하지! 천이 너 꼭 보답해야 하는 거 알지?”
“뭐든 말만 하세요. 사부를 위해서라면 저는 뭐든 다 합니다. 나쁜 짓은 빼고요.”
“뭐야?! 나는 너를 위해 나쁜 짓도 할 수 있는데.... 히이잉. 너는 아니었구나. 나 섭섭해잉!”
사부는 정말로 섭섭한지 어깨가 처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이게 그렇게 섭섭할 일인가? ...아! 알겠다. 사부는 무조건 자기 말만 듣는 제자를 원하는 거야!’
나는 사부의 의중을 제대로 캐치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뛰어넘어 여유로운 척 굴며 대답을 했다.
“이 제자는 이참에 생각 자체를 바꾸려고 합니다. 사부가 하라면 그냥 다하는 제자. 저도 이게 좋습니다.”
“지..진짜야? 그럼 일단 약속부터 하자!”
사부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해맑은 표정과 깨끗한 눈망울이 깜빡거리는 모습을 보니 진심이 분명했다.
“이런 건 말로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으응~. 아니야. 약속은 새끼 손을 걸어야 진실된 거야! 넌 그런 것도 몰라?”
“그런...가..요?”
“당연하지!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약속을 주고받는 게 원칙이야 원칙!”
“알겠습니다. 사부. 앞으로 여자와 약속을 할 때에는 꼭 이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약속하겠다는 확답을 주며 사부의 새끼손가락과 내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부가 입을 살짝 벌리고 가벼운 헛웃음을 보이며 나를 노려본다.
“허. 허참. 너 다른 여자와 약속을 하겠다는 거야?”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보이는 사부.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말을 잘해야만 한다. 긴장으로 몸이 떨린다.
허나 이제는 괜찮다.
나는 검후의 하나뿐인 제자. 이제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는 익숙하다. 그렇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감이 잡힌 상태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제가 약속을 할 여자는 언제나 사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오해는 사절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역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굴었다.
휴우. 조금 전의 행동은 사부에게 통한 모양이다. 사부의 표정이 풀렸다.
“이런 장난은 치지 마. 정말로 재미없어!”
새침하게 말하는 사부. 제자가 이렇게 표현하는 게 이상하지만 다른 표현이 없다.
사부는 참으로 귀엽다.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저도 하고 보니 재미가 없네요. 하하!”
사부는 나의 대답에 불만이 없는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더니 내가 복용할 영약을 꺼냈다.
붉은 구슬처럼 보이는 만년화리의 내단과 딱 봐도 사포닌으로 가득함이 느껴지는 만년삼왕. 이 두 개는 남자에게 좋은 양의 기운을 듬뿍 머금고 있는 무가지보였다.
“천아 이제부터 긴장해. 이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야.”
“알겠습니다. 사부.”
어느 순간보다 진지한 사부의 모습. 나는 이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이제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어떤 경우에도 입을 열지 마. 그만큼의 화기가 몸에서 빠져나가 손해가 될 거야.”
“한 번 참아 보겠습니다.”
사부가 나를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영약을 내밀었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알아서 삼켜! 입에 들어가면 사르르 녹을 거야.”
나는 비릿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싶은 만년화리의 내단을 먼저 복용했다.
꿀꺽. 비릿함은 없었다. 그저 조금 쓰다.
바로 다음으로 만년삼왕을 입에 넣었다. 만년화리가 잘 녹는 사탕과도 같다면 만년삼왕은 솜사탕처럼 매우 빠르게 녹았다.
‘먹은 게 맞는지 의심스럽게 빨리 녹네.’
“이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통스러울 테니 잘 참아야 한다. 천아!”
나는 자리에 앉고 난 후에야 비로써 떠올랐다.
‘고수가 된다는 기쁨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구나!’
무협지에서 영약을 얻으면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만 느끼게 마련이다. 주인공이 강해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복용을 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이 겪는 고통은 외면한다.
차라리 죽고 싶은
마치 몸이 타들어가는
이런 표현들이 마구 나왔던 게 떠오른다.
‘너무 무섭잖아!’
내가 긴장하고 있을 때. 내 복부에서 열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 따뜻하구나. 어라? 왜 벌써 뜨겁지? 이게 뭐야? 크아아. 내 몸에 불이 난 거 아니야? 아아악!’
아주 잠깐 따뜻하다 느꼈는데 바로 지옥이 시작되었다.
내 몸을 안에서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되는 강력한 열기들이 몸에서 커져만 간다.
“이 열기가 몸을 태우기 직전까지 참아야만 약기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거야. 천아! 넌 할 수 있으니까 사부는 믿을 게!”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이런 고통이란 걸 알았다면 먹지 않았을 테다.
주먹을 꽉 쥐고서 입을 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제야 알겠네. 이렇게 아프니 억울해서라도 입을 열어 손해를 볼 바보 놈은 없었던 거야!’
나는 소설의 주인공이라 인내력이 좋아서 이런 고통을 견딘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아픈 경험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너무 억울해서 참았을 거다.
내가 이렇게 인내가 강했는지를 느끼며 억울해서 꾹 참고 견뎌나갔다.
복부에 있던 열기가 머리까지 뻗어가고 있음이 느껴질 때였다.
검후 사부가 내 등에 두 손을 올렸다.
“잘하고 있어. 천아! 이제부터 사부가 이끌어주는 기의 운용을 몸으로 느끼고 이해해. 이건 혼원대공이라는 신공으로 세상의 모든 기운을 다 흡수할 수 있는 무공이야. 얼마 전에 이해를 끝내 아직 이 사부도 익히지 못한 전설의 신공이야. 이걸 완성하면 너를 내가공력으로 어쩔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검후가 장담할 게!”
‘혼원대공?!’
나는 깜짝 놀라 입을 여는 실수를 할 뻔했다.
‘여인천하 영웅지로’에는 전설의 신공 두 개가 존재한다.
그중 사대 천마를 잠재운 도가의 전설적인 절대 고수 도성이 사용한 신공이 바로 혼원대공이다. 이 신공은 세상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 경지가 오르면 무적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검후 사부가 혼원대공을 알고 있다는 건 소설에 나온 적이 없잖아? 끝판 보스의 히든 무공인가 보다.’
나는 사부가 몸에 가득한 열기를 이끌며 알려주는 혼원대공의 진기 운용을 이해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최대한 집중했다.
그렇게 사부의 끌어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의 몸속에서 생겨난 뜨거운 열기가 뭉쳐지더니 하나의 원이 만들어졌다. 이후 내 단전을 가득 채운 원이 계속해서 회전하며 주변의 모든 걸 빨아들일 듯 움직인다.
단전을 가득 채운 상태로 회전하는 원. 사부는 이것을 굴려 나의 몸을 타고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제 신체의 주요 삼십육대혈을 건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뜨거운 원이 곡지혈. 혈해혈. 용천혈 등 주요 혈을 무너트리기 위해 힘차게 진군했다.
부딪히는 주요 혈들은 펑. 펑. 펑. 모조리 다 뚫는 원의 기운.
하나의 혈이 뚫릴 때마다 상쾌함이 잠깐 찾아왔고 그다음으로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정신 차려! 이제 임독양맥을 뚫을 거야!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절대의 고수로 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공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에 태어날 때 막혀버려 인간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머리에 위치한 임독양맥은 반드시 뚫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면 자연스레 탁기가 뭉쳐지는 혈인 임독양맥을 무너트리려고 만년삼왕과 만년화리의 열기가 만든 원이 움직였다.
펑.
임독양맥은 확실히 달랐다. 두 개를 뚫어야 하는데 하나도 뚫지 못했다.
“고통스럽겠지만 참아. 천아! 다 너를 위한 거야.”
사부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임독양맥을 제외하고 원을 굴렸다. 그러자 내 몸에 있던 원의 덩어리는 엄청난 속도로 몸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기에 볼 수는 없으나 내 몸의 혈들이 마구 요동치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간다!”
펑. 펑.
강력한 원심력을 얻은 나의 원으로 된 내기의 덩어리가 힘차게 임독양맥을 뚫었다.
두 개의 혈이 뚫리는 순간. 나는 정사를 나눴다고 의심될 정도의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지금까지의 고통은 이 순간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닐까 싶은 그런 황홀한 기분마저 들었다.
특. 특. 특.
나의 신체가 자기 멋대로 뒤틀리기 시작한다.
‘설마 탈태환골?’
내가 뼈와 살이 다시 조정되어 무공을 익히기 가장 좋은 신체로 만들어 준다는 탈태환골까지 하게 되었다는 기쁨이 떠오를 때 잔뜩 긴장했던 예민한 나의 정신이 흐릿해져 갔다.
“잘 참았어. 천아!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이 사부가 많이 걱정했어. 흑흑.”
나는 눈이 감기던 와중에 사부의 눈가에 맺힌 뜨거운 눈물을 보았다.
‘시력이 더 좋아졌는데 왜 헛것이 보이는 거 같지?’
검후 사부는 분명 눈물도 없는 여자라 했는데... 하여튼 이 소설은 작가의 설정과 일치하는 게 별로 없다.
*****
나는 꿈을 꿨다. 보통의 꿈처럼 내용이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좋은 곳에서 아리따운 여인과 즐겁게 노는 것이라는 기억만이 남아 있는 꿈. 분명한 건 깨고 싶지 않은 행복한 꿈이었다는 거다.
그렇게 즐거운 꿈을 꾸다가 이제 그만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떴다.
익숙한 공간이 보였다.
‘여긴 내 거처구나!’
누군가 나의 손을 잡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윤기가 넘치는 검은색의 머리카락만 보아도 이 여인이 나의 사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부가 내 걱정을 많이 했구나.’
나는 사부가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게 된 나.
‘몸이 너무 가볍잖아! 아. 이게 당연한 거지.’
영약을 흡수하여 임독양맥을 뚫고 탈태환골마저 성공한 나다. 새롭게 태어난 초인이라 할 수 있기에 이러한 몸의 가벼움과 민첩함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천아. 일어났구나!”
나의 움직임을 느낀 사부가 밝은 표정을 보이며 일어났다.
그런데. 내 마음이 짠하다.
사부의 몰골은 상당히 수척했다. 내 걱정을 하며 여기에 계속 머물렀음이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사부. 제가 얼마나 누워있던 겁니까?”
“응. 삼일이야.”
“그동안 식사도 안 하셨어요?”
“천이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마음 편히 밥을 먹어! 나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꼬르륵.
사부는 말과 달리 배에서 소리가 나왔다.
따지고 보면 나는 8일을 굶었다. 그러나 영약 두 개가 영양을 듬뿍 제공했는지 당장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꼬르륵.
아니다. 조금 늦게 신호가 왔을 뿐이다.
“제가 식사부터 준비할 게요. 사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쿵. 살짝 일어섰는데, 내 몸이 높이 뜨면서 천장을 그대로 뚫어버렸다. 몸이 변하기는 했는지 하나도 아프지 않다. 그저 쪽팔릴 뿐이었다.
“조심해. 천아! 지금은 강해진 몸을 섬세하게 다루는 걸 익혀야 할 시기야.”
무협지를 볼 때 이런 일은 흔하게 발생한다. 오버라고 생각했는데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 보니 알겠다. 힘 조절에 실패해 발생하는 일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도 나는 밥을 차릴 거다.
“섬세한 일의 하나가 바로 요리죠. 사부! 식사를 준비하며 몸을 다스리는 법도 터득할 게요.”
“정 그렇게까지 말하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나 너 없으면 밥도 먹기 싫고 너가 해주는 거 아니면 그냥 다 싫어!”
사부는 늘 그렇듯 내가 만드는 음식을 기다리는 표정이다.
‘잘 먹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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