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검후의 제자4
* * *
검후 설지연.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무학의 천재였다. 초인에 가까운 감각과 본능을 타고난 설지연은 언제나 남들보다 빠르게 강해지는 삶을 산 것이다.
성인이 되기 전에 이미 후기지수의 최고라는 찬사를 듣던 그녀는 스스로에 대한 높은 자부심에 어울리는 까다로운 남자보는 눈을 지녔다.
잘 생긴 외모는 일단 기본이다. 그렇지만 출중한 인물됨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검후인 자신에게 호감을 받는 남자가 되려면 그녀에 대한 무정함도 필요했다.
자신이 아름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설지연은 어린 시절부터 도도한 남자가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그런 남자는 세상에 없었다.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도도하게 행동하는 남자는 있었으나 진심으로 도도한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타고난 승부사 설지연은 남자의 본능을 느낄 수 있었기에 자신을 대하는 남자들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위지풍에게 작은 호감이라도 가졌던 이유는 그가 훌륭한 외모를 지녔음에도 죽은 아내만을 생각하는 우직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방지게도....
위지풍의 아들 위지천은 천하제일의 미녀라 칭송받는 자신을 마주한 자리에서 경계심과 두려움부터 드러냈다.
이런 일은 설지연이 살면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녀를 무서운 존재를 대하듯 어렵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위지천. 이런 그의 모습에 검후 설지연은 알 수 없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계획에 없었던 제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위지천을 제자로 받아들인 건 다분히 즉흥적으로 내린 선택이 분명했다. 허나 위지천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을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는 검후이다.
‘자상하기는 얼마나 자상하다고!’
제자가 된 위지천은 사부를 경계하고 있다는 기분을 늘 주었다. 그렇지만 요리와 청소 등을 어떠한 불만도 없이 성실하게 해냈다. 그렇게 그녀는 그가 해주는 요리가 아니면 식사를 하기 싫어질 정도로 제자의 노력에 흡족함을 느끼는 여자가 되어갔다.
‘후후. 음흉함이 있어서 다행이야!’
위지천에게 눈웃음을 보내며 귀여운 표정을 수시로 보였던 검후 설지연. 그녀는 살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행동을 했던 적이 없었고,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했던 적이 없는 여자였다. 남자는 자신이 작은 호감만 표해도 넘어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런 특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인 제자 위지천. 그녀는 오기가 생겨 더 귀엽게 행동했다.
하지만, 끝끝내 넘어오지 않는 제자 위지천.
그녀는 슬슬 폭발하려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데 걸린 시간은 언제나 짧았던 인생을 산 검후 설지연이기 때문이다.
너무 철벽을 치는 제자 위지천에게 짜증이 치밀던 설지연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깨달음을 얻은 기쁨에 취한 그녀는 사랑스런 제자를 덜컥 안아버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나를 밀치면 난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평소 위지천이 보였던 행동이라면 사부인 그녀를 내팽개치듯 밀쳐버릴 것 같아서 내심 두려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을 꼭 안고서 떨어지질 않는 그였다.
‘사부인 나에게 호감이 있어도 절제하고 참을 줄 아는 멋진 남자였던 거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검후 설지연. 그렇게 둘은 오래도록 서로를 안고 있었다. 눈치라곤 찾을 수도 없는 군사 제갈유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면 그렇지!’
한번 참았던 마음이 터졌기 때문일까? 평소에는 작은 실수도 하지 않던 위지천이 자신의 속옷을 보며 음흉한 상상을 펼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자신이 위지천에게 푹 빠졌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른 남자가 자신의 속옷을 보며 품평을 했다면 그대로 목을 잘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제자의 음흉한 모습에 강한 희열을 느껴 몸이 심하게 떨렸다.
‘아아 저 아이는 정력을 이기는 절제력을 지닌 남자였던 거야!’
잘 생긴 외모에 검후 설지연을 상대로 마음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 그렇지만 검후를 늘 챙기고 배려하는 다정함과 사부의 속옷을 보며 욕정을 드러낼 정도로 뜨겁기마저 한 남자.
그게 위지천이었다.
‘너와 난 운명이야. 천아!’
검후 설지연은 제자 생각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
같은 시간.
‘혼이 나고 넘어갔으면 차라리 좋잖아!’
나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여인천하 영웅지로]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을 꼽으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살벌한 여인들의 행동 묘사라 할 수 있다. 현재 무림에는 지나칠 정도로 강한 여류 고수가 많다. 작가의 성향이 반영된 탓에 뭐라 할 수가 없어 그러려니 한다.
글을 읽으며 내내 생각했던 것.
이 소설은 누가 더 살벌한 여자인지 경쟁하고 있는 것 같다.
가령 사부의 라이벌이 될 천마와 제자가 될 빙화를 뽑을 수 있겠다.
천마는 보통 남자인데 이곳에서는 여자다. 시간이 흐르면 사부와 비견될 정도로 강한 존재가 되는 고수가 천마인데, 이 여자의 취미는 남자가 겁먹고 떠는 걸 유독 좋아하는 이상한 변태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빙화. 나의 사매가 될 여자의 하나인데... 내가 언제 죽는지 몰라 이 여자와 나의 관계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건 구태여 생각하고 싶지 않은 여자라는 거다.
소설을 떠올리며 현명하게 대처하려 했는데... 두려움만 더 커지는 기분이다.
‘에휴! 몸이나 풀자. 내일 수련은 어차피 사부가 알아서 해주잖아.’
늦은 밤이지만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지난 한 달간 몸이 좋아졌으니 운동이나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 보기로 했다.
나는 연무장에 나가 몸을 풀며 고강도 운동으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사부가 연무장으로 나왔다.
흠칫. 속옷을 가지고 지저분한 말을 내뱉었던 나는 사부와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나와 사부 사이에 어색함만이 감돌았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수련이라니. 천이 넌 사부가 그렇게 보고 싶었니?”
상기된 표정과 들뜬 목소리로 질문하는 사부.
‘이거 말 잘해야 하는 느낌이야.’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사부님을 생각하는 (죄송한) 마음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라도 빨리 뵙고 (죄송한) 제 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죄송한 짓을 했으면 죽어야지! 검후에게 ‘죄송한’이란 단어는 금기어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죄송하다는 말은 생략하며 답했다.
“헤으응. 천이 넌 사부가 그렇게 좋아?”
“하찮은 제 목숨보다 더 중요한 분이 사부입니다.”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니 제발 살려만 주세요. 딱 이런 심정으로 답했다.
“아이참. 난 사부고 넌 제자잖아. 그런데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해!”
얼굴이 붉게 변한 사부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연무장 끝으로 가 나에게 등을 보이며 나무로 된 의자에 앉았다.
‘뭐야?!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천하의 검후가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이며 구석으로 가서 등을 보이며 앉아 있다. 이건 분명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태여 보이는 곳에 저렇게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 맞다! 제대로 사과를 하라고 기회를 주는 거야! 거기다 등을 보인 건 부끄러운 말을 들어도 넘어가겠다는 뜻일 거야!’
나는 희망이 생기자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사부의 뒤로 걸어갔다.
턱. 최대한 소리가 나도록 힘을 주어 양쪽 무릎을 꿇었다. 살짝 아프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저는 여자를 모릅니다. 저에게 여자란 사부님뿐이니까요. 그래서 그만...... 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사부가 싫어하는 말들을 빼가며 답했다. 그리고 내 생사를 쥐고 있는 사부를 뒤에서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떨리는 사부의 몸.
‘이게 아닌가?’
두려움이 밀려온다.
“저에겐 사부 밖에 없습니다.”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변변찮은 능력도 없다. 이건 당연한 말이지만 용서를 구할 때 다들 자주 쓰는 말이라 나도 이렇게 말했다.
더 떨리는 사부의 몸.
나의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그때. 사부가 몸을 돌렸다.
눈물이 없는 여자로 묘사되던 검후 사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와락. 사부가 몸을 앞으로 내밀며 다시 나를 껴안았다.
‘제자를 죽여야 하니까 눈물이 나왔다 같은 건 아니겠지?’
말을 하지 않으니 갑갑하지만 뭐라고 말 좀 하라고 이야기할 용기는 나에게 없었다. 나는 조용히 사부의 처분을 기다렸다.
“스승과 제자보다 남자와 여자 사이가 더 중요한 거야. 천아!”
덜컹. 심장이 주저앉는 기분이다.
‘남과 여가 더 중요하니 넌 나를 모독한 죄를 치러야 한다는 거잖아.’
나는 살고 싶은 마음에 사부를 꼭 껴안았다.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부가 떨어트리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손가락도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약한 나이기는 하다. 그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의지를 사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사부는 다 이해하니까. 넌 하고 싶은 걸 마음이 이끄는 그대로만 해.”
*****
날이 밝아오고 있다. 거의 밤을 지새우며 수련을 한 꼴이 되어 정작 아침인데 수련 자체가 끝이 났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열정적인 눈빛을 보이며 나를 가르쳐 준 사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어제의 실수는 넘어가는 분위기라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남자가 어떻게 아녀자의 마음을 알겠어!’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건 포기하는 게 진리라던 말을 떠올리며 당장 하루하루 살아감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제 몸을 만드는 기초는 끝났어. 천아. 지금부터는 무정칠십이검의 투로를 가르쳐 줄 거야.”
“저도 드디어 무공을 배우는군요.”
무공을 배운다는 건 진심으로 기뻤다. 일반인으로 살다가 무공을 사용하는 고수가 되는데 기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다.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사부.
“넌 이 사부가 왜 내공 심법을 먼저 가르쳐 주지 않을까 궁금하지 않았어?”
“제자는 사부를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저는 사부가 말하지 않는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의 대답에 미소가 더 커진 검후 사부. 그녀는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나의 언행에 흡족함을 느끼나 보다.
‘좋았어! 여기서 떨어진 평판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는구나.’
나는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검후의 수련법이 나왔던 구절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사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에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사부를 따르는 제자라는 걸 어필함에 활용했다.
“외공에 이르는 수준은 아니라도 몸의 그릇이 탄탄해야 제대로 내공을 쌓을 수 있는 법이지. 그리고 배울 땐 가르치는 사람을 전적으로 믿어야 하는 법. 넌 아주 좋은 생각을 가졌어. 천아.”
“저야 사부가 죽으라면 죽는 남자 아닙니까?!”
‘여기서 또 만회하는 구나!’
나는 기다렸다는 듯 사부를 믿고 있음을 강조했다.
“아잉. 그런 말은 너무 부끄럽잖아.”
툭. 사부는 정말로 부끄러운지 고개를 뒤로 돌리며 손으로 가볍게 나를 툭 쳤다. 본인도 모르게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는지 나는 뒤로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아프지는 않으나 뭔가 당황스럽다.
‘이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야?!’
잠시 후. 얼굴에 홍시처럼 붉어진 사부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투로를 하나씩 알려 줄 거야.”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물어...... 잠시만! 제갈 군사가 찾아오고 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