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검후의 제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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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와 나는 무려 한 시간 가까이를 서로 부둥켜안고 있은 후에야 비로소 떨어졌다. 누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한 검후 사부가 내공을 이용하여 부드럽게 나를 밀쳤기에 떨어지는 게 가능했다. 검후전을 찾은 방문자가 없었다면 도대체 언제 사부와 떨어지게 되었을지 짐작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니가 언제까지 사부인 나를 안고 있나 지켜보고 그만큼 너를 괴롭게 만들 거라는 무서운 계획을 품고 있는 거 아니야?!’
남자가 미녀를 상대하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이다. 거절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고 말을 할 테고, 좋다고 하면 너도 똑같은 놈이라고 말할게 빤하기 때문이다.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사부.’
아직도 검후 사부의 심장이 요동치던 소리가 머리에서 맴돈다. 사황련의 사악한 악당들 그리고 마교의 가공할 마인들에게 둘러싸여 협공을 당해도 떨지 않던 위대한 무인이 바로 검후 설지연이다. 그런 사부가 무공도 모르는 나의 품에 안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아무래도 수치심 같은데...... 나 어쩌지?!
‘결국 난 어쩔 수 없이 죽을 팔자란 말인가?! 하아.’
나는 두려움에 빠져 멍해져만 갔다.
그때였다.
“천아! 검후전이 무너졌으니 당분간 거처를 옮겨야 할 것 같아. 치잉. 둘만 있는 곳이 가장 좋은데.”
“어쩔 수 없죠. 사부!”
그래! 아직 희망은 있다. 전각이 무너져 당분간은 이곳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다. 적어도 한동안은 무림맹에 거주하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한다는 거다.
‘천금과도 같은 이 시기를 최대한 활용하여 사부에게 많은 점수를 따 실수를 만회하자!’
나는 사부의 마음에 쏙 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자고 전의를 불태웠다.
“잠시 파진을 하였으니 제갈 군사는 검후전으로 들어오세요.”
사부가 손을 움직이더니 밖을 보며 말했다.
검후가 머무는 거처 주변에는 절진이 펼쳐져 있다. 설지연이 허락하지 않을 경우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금지가 바로 검후전인 것이다.
‘제갈 군사가 찾아왔다고? 그 눈치 빠른 사람?!’
제갈유현 군사는 현 제갈 세가의 가주로 정신이 나간 검후를 상대로도 목숨을 연명하는 처세술의 대가이다.
아마 사부가 깨달음을 얻을 때 생겨난 강기의 빛을 본 누군가가 무림맹의 군사인 신기서생 제갈유현에게 보고를 했기에 그가 이렇게 직접 찾아온 모양이다.
‘제갈유현 정도의 인물이 여길 찾아왔다면 이곳에 금방 도착했을 게 분명하잖아. 도대체 얼마를 밖에서 기다린 거야?!’
군사 제갈유현 정도의 인물이 강기가 터져나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에 이곳에 왔을 리 없다. 내가 사부를 안고 있을 때 그는 하염없이 밖에서 기다린 것이 아닐까 싶다.
‘사부는 이제 본인이 천하제일에 근접한 고수라는 위엄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가 보다!’
내가 ‘여인천하 영웅지로’를 읽을 때 보았던 검후 설지연 사부는 언제나 천하제일의 고수로 평가를 받았었다. 그렇지만 지금 사부의 위치는 최고가 아닌 십대 고수의 하나이다. 그런 사부가 조금 전에 깨달음을 얻어 더 강해졌다.
이제 천하제일을 노리는 최상단에 위치한 고수가 된 것이다.
고작 서른 중반에 불과한 여인이 무림 최고를 꿈꾸는 위치에 올랐다. 글로 봤던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라 그다지 특별한 무언가는 아니지만 이곳 세상에서 검후가 이룬 업적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 분명했다.
“검후께서 또다시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이 군사 제갈유현이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의 제자가 큰 도움을 주었답니다. 이히~”
사부는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나를 무척이나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상기된 표정으로 제자가 깨달음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군사 제갈유현에게 구태여 알렸다. 허나 제갈세가의 가주인 군사 신기서생 제갈유현은 사부의 말을 형식상 하는 말로 여기는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군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갈유현. 나는 그의 행동이 납득되었다.
검후의 제자인 나는 배경도 없는 주제에 뒤늦게 무공을 배우는 처지기도 했다. 사부가 이런 나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진짠데.”
군사의 반응에 사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입 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소설에서 사부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는 건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의미한다.
‘설마?!’
내가 사부의 표정을 보고 당황하고 있을 때 군사 제갈유현의 몸에서 땀이 비가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무...영살기?!’
현경에 이른 고수는 의지만으로도 분노를 표현할 수 있고, 아무런 행동 없이도 상대를 제압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다. 사부는 지금 자신이 얻은 힘을 유감없이 군사 제갈유현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철컹.
사부의 심기를 어지럽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사람은 군사인 신기서생 제갈유현인데 괜히 내 심장이 주저앉는 기분이 들었다.
“저는 공적으로 농을 즐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군. 사.”
사부의 말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살기가 되어 군사 제갈유현의 몸으로 침투하는 모양이다. 오대세가의 가주인 제갈 군사의 입가에서 작은 핏기가 보였다.
결국 피를 보고 난 이후에 살기를 거둬들인 검후 사부.
제갈유현의 혈색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절망을 경험한 군사의 얼굴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 보였다.
*****
검후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무림맹 깊은 곳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그런 검후전이 무너졌다.
검후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작은 전각 하나가 전부인 소박하고 검소한 공간이 바로 검후전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부의 강기를 견디지 못하여 무너져버리는 건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함께 머물던 거처가 사라져 나와 사부는 밖으로 나왔다. 사부의 실력을 직접 경험한 제갈 군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마련하여 준 접객실의 가장 화려한 금관. 우리 사제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게 될 아주 화려한 공간이다.
금관은 사부와 함께 머물던 검후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전각이라 내 기분은 절로 좋아졌다.
‘이왕 검후전을 다시 짓는 거 군사를 협박해서 좀 크고 화려하게 짓자고 사부에게 말할까?’
내가 거주하는 곳이라 멋있고 편하게 지으면 좋겠다고 사부에게 건의하고 싶으나 그런 말을 할 용기 따위는 나에게 없었다.
건방지게 누가 의견을 말하라고 했지?! 죽을래?!
불신과 살육이 지배하는 광기의 검후가 소설에서 자주 말하던 대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목숨은 언제나 소중하잖아. 징징거리는 걸로 보일 테니 그냥 가만히 있자!’
사부는 몇 가지 논의해야 하는 일이 있다며 잠시 군사전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숙소 밖으로 나갔다. 나는 사부가 떠났을 때 무너진 검후전의 전각에서 가져온 몇 가지 물건과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거 참 고민이네!’
다른 물품의 정리는 금방 끝났는데... 사부의 속옷을 정리하는 게 문제였다.
이걸 그대로 방치하자니 여자의 속옷이라 그대로 두었다는 게 너무 티가 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이걸 정리하여 서랍장에 말끔하게 넣어두자니 남자가 여자 속옷을 정리했다는 냉혹한 현실이 그대로 남게 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왕 정리를 했으면 끝을 보는 게 옳은 거겠지?!’
어차피 어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필연이다. 이런 경우 확실히 정리하여 두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여겨졌다. 나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사부의 속옷을 하나씩 정리하며 서랍장에 넣기 시작했다.
사부는 표면적으로는 화려한 옷을 선호하지 않는 검소하고 담백한 여인인데, 이상하게도 속옷은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그리고 속옷은 겉옷과 달리 전체적으로 사이즈가 컸다.
“사부는 몸매가 아주 훌륭하구나!!!”
가녀린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큰 가슴가리개와 엉덩이 부분이 꽤나 큰 고의를 보며 사부의 몸매가 훌륭함을 감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사부의 몸매를 칭찬하는 말을 내뱉으며 정리를 해나갔다.
“오올! 이런 야한 속옷도 있구나.”
“이건 엉덩이가 너무 늘어난 거 같은데?!”
“이걸 입으면 거기가 꽉 끼일 것 같은데... 너무 상상이 되잖아!”
처음 접하고 정리마저 하게 된 여자 속옷에 취하여 나도 모르게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이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음이 확실했다.
그래서........ 바보 같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으로 느꼈다. 나의 뒤에는 사부가 와 있음을 말이다.
그 순간 나의 온몸에서 극도의 공포가 일어나며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움직이지도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뒤에 누가 있는지를 살폈다.
불행하게도, 예상처럼,
나의 뒤에는 얼굴이 심하게 붉어진 사부가 몸을 부르르 떨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아. 시발! 검후의 대제자는 사부의 속옷을 정리하다 죽은 건가?!’
소설에 묘사된 잔혹한 검후의 모습이 떠오른 나에게 체념이 찾아왔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하자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최후를 기다리는 나. 조용히 눈을 감고는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긴 시간에 걸쳐 눈을 감고 있었던 나는 결국...... 조용히 눈을 떴다.
놀랍게도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일단 살려는 주겠다는 건가?’
*****
임시로 배정받은 화려한 거처의 침상에 몸을 눕힌 검후 설지연.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의 의지를 무시하듯 요동치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토록 꿈꿔왔던 무정구검을 무정삼검으로 줄인 날이야. 그런데 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그녀의 머리에는 온통 제자인 위지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아. 천이 이 앙큼한 녀석!’
제자를 생각하자 설지연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평생 검과 함께 살겠다고 다짐한 여인이 검후 설지연이다.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까다로운 자신을 사랑에 빠트릴 남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여겨서이다.
그런 그녀의 여심을 조금이라도 흔든 남자가 바로 위지천의 아버지인 신검 위지풍이다.
위지풍은 아내를 죽게 만든 자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무림맹 수호대에 가입한 신념으로 무장한 훌륭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부인을 잊지 못하는 존재였고, 수호대에 가입하기 위해 남자를 포기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설지연은 위지풍이라는 남자에게 작은 호감 정도만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위지풍이 자신을 구하고 죽던 날 구명의 보상으로 아들의 미래를 부탁했다.
설지연은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위지천을 꼭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장로의 권한을 이용하여 수호대의 자식이 머무는 거처를 알아낸 그녀는 무림맹 본부와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위지천을 만나려고 직접 길을 나섰다.
그렇게 만나게 된 위지천.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대번에 깨달았다.
위지천은 자신이 평생 기다렸던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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