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검후의 제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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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커질수록 배움과 성장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걸 알았다. 구태여 알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렇다는 걸 깨닫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한 달이다.
무림맹 내부에 위치한 검후전으로 와 사부인 검후에게 무공을 배운 시기가 한 달 정도가 흐르자 나의 몸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천이 넌 아직도 이 사부를 어렵게 대하네?! 나 너무 섭섭해!”
입이 툭 튀어나온 검후 설지연. 그녀는 자신에게 작은 실수 하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응을 수시로 보이고는 했다.
‘속지 말자. 절대로 속지 마!’
소설에 묘사된 검후와 내가 직접 경험한 검후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사부는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쌀쌀하고 도도한 검후 사부. 그녀는 아직 자신의 뜻을 이룰 실력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본심을 숨기며 지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사부를 음탕한 표정으로 바라보거나 조금이라도 예의 없는 행동을 하면 필히 기억하고 있다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만들 여자야. 어쩌면 대제자를 죽인 사람이 검후 설지연 본인일지도 모르는 거잖아!’
소설에서 검후 설지연은 파괴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악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설지연의 내면에 어떠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기에 나는 항상 조심해야만 한다.
“아직은 기초를 쌓는 수련 기간이야. 그러니 어서 몸을 풀도록 하자. 천아!”
“예. 사부.”
기초를 쌓자는 그녀의 말. 침착하고 싶은데 내 몸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젠장! 오늘도 어김없이 가학이 핵심인 수련의 시간이 찾아왔다.
성인이 되면서 성장이 끝나 굳어져버린 몸.
이런 몸뚱이를 무자비한 방법을 이용하여 유연하게 만드는 검후 설지연.
그녀는 고통을 제거하고 수련할 수도 있으나 신경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몸으로 느껴야만 제대로 활용도 가능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반드시 이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중이다.
빠직. 뜨드득.
사부는 평소처럼 내 움직임을 제한하는 점혈을 하고는 오늘도 무자비하게 내 팔과 다리를 뒤틀었다.
크아악! 아아악!
미칠 듯이 아프고 괴롭지만 아혈을 제압당한 탓에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도록 지옥을 경험하는 날이 하루 추가되었다.
“오늘도 잘 참았어. 천아! 넌 인내력 하나만 봐도 정말 멋진 남자야!”
틱. 틱.
사부가 미소와 함께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내 몸을 제압한 혈도가 순식간에 풀렸다.
앉아서 쉬고 싶다. 하지만 이대로 그럴 수는 없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검후전의 내부로 들어갔다.
“고생하신 사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러 갑니다.”
“오늘도 기대한다?!”
“물론이죠!”
“나 너무 좋앙! 좋은 제자를 들였더니 계속 살만 찌는 것 같아! 히잉!”
“사부는 살도 내공으로 태울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
나는 원래부터 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 다양한 현대의 요리들을 만들어 검후 사부에게 대접하고는 했다.
‘이게 다 살기 위한 처절한 발악이지.’
나는 쓸모가 많은 존재라는 걸 사부에게 알리기 위하여 중원에 없는 요리를 선택하여 만드는 일을 수시로 하고 있다. 미식가인 나는 다양한 중화요리를 맛보고 싶다는 사적인 욕심이 물론 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은 철저하게 억눌러야 한다. 살고 싶으면 사부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 가장 현명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이 주는 힘일까? 내가 만든 한식과 양식 그리고 퓨전 요리는 검후 사부의 까다로운 입맛을 통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늘 내가 만드는 식사를 기다리는 게 사부의 낙이기도 했다.
오늘은 얼마 전에 담근 김치를 이용하여 김치찜을 만들었다. 내가 이곳에서 김치를 만들었다가 먼 훗날 중국 놈들이 김치는 자신들이 원조라고 우기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일단 내가 살고 봐야 한다.
“하아. 하아. 매운데 참 맛있단 말이야.”
혀를 날름거리며 내가 만든 김치찜을 맛있게 먹는 사부 설지연. 따로 빼둔 김치로 묵은지를 만든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녀가 즐겁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물도 마셔가며 음식을 먹으라고 컵을 옆에 놓았다.
벌컥벌컥.
이미 충분히 매웠는지 물을 주기 무섭게 들이키는 사부. 그럼에도 내가 만든 요리를 멈추지 않고 먹는 그녀이다.
‘먹는 모습만 보면 그저 예쁘고 귀엽단 말이야.’
식사를 하는 검후의 모습은 선녀가 따로 없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게 되고는 한다. 물론 아주 잠깐이다.
‘속으면 곤란해. 악한 존재일수록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게 일상이잖아.’
소설이 진행되면 세상을 파멸시키는 것이 삶의 목적인 여인이 바로 검후 설지연이다. 지금은 도저히 그런 여자로 보이지 않으나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매운 요리를 좋아하는 사부는 내가 땀을 닦아주는 걸 무척 좋아한다.
‘본인 땀이라도 요리에 들어가면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
나는 고통을 인내하는 역할만 할 뿐. 실제 수련은 사부가 다한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배가 고프지는 않다. 반면 다양한 자세로 내 몸을 괴롭히며 힘을 소진하는 사부는 늘 음식을 복스럽게 먹었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잘 먹으면 보기는 좋지!’
방긋. 이마에 맺힌 땀을 모두 닦아주자 사부가 미소를 지었다.
볼이 살짝 붉게 변한 기분도 들었으나 이건 나의 오해가 분명하다. 그저 매운 걸 먹어 얼굴이 붉게 변했을 뿐인 거야.
사람을 가장 많이 살해한 여인이 될 검후가 수줍은 표정을 보인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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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수련이 끝나면 오후는 대체로 한가하다. 사부는 신체의 수련을 통한 무학의 발전은 불가능한 단계에 이른 터라 주로 사색에 잠기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차를 마시며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낸다.
나는 사부가 조용히 있을 때 주변에 앉아 무공의 기본을 다지기 위해 기본적인 무공 서적을 읽는다. 이것이 우리 사제의 흔한 일상이다.
‘고등학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내가 S대 갔을 건데.’
따로 압박을 주지는 않으나 나는 사부가 무섭다. 그래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기본적인 무공 서적을 읽고 또 읽었다.
‘변덕이 심하기로 유명한 검후가 언제 어떻게 배운 걸 확인한다고 나올지 모르잖아!’
늘 이런 생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천이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무공의 이론을 익혔는지 이 사부가 확인을 한 번 할까?”
결국 오늘이구나. 내 생각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아. 네.”
나는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몰라 잔뜩 긴장했다.
“모든 무공의 근원이라 평가하는 삼재심법과 삼재검법에 대한 너의 생각은 어때?”
“사. 삼재에 대하여 묻는 겁니까?”
“응! 무공 역시 넓게 보면 무학이야. 자신의 신념도 반드시 필요하니까 너의 생각을 이야기해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기대심을 잔뜩 내보여 부담감을 팍팍 심어주는 그녀.
여기서 내가 형편없는 말을 한다면 그녀의 얼굴은 마녀처럼 일그러질 게 분명하다.
‘어떻게 하지? 뭐가 좋을까?’
나는 궁리해야만 했다. 사부가 말한 삼재는 천지인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묻는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한 내 생각? 그딴 것이 있을 리 없잖아!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무척 곤란하다. 어떻게든 그럴싸한 말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래! 내 생각을 말하지 말고, 글에서 읽었던 걸 이야기하자.’
소설 후반부에 가면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을 때 나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고스란히 이야기하기로 했다.
“무공이란 결국 천지인 세 가지를 얼마나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지 다양하게 확장시킨 후 다시 이것들을 단순화시킬 수 있느냐를 확인하는 것이라 느꼈습니다. 그걸 느끼라고 만든 검법이 베기와 찌르기가 전부인 삼재검법이 아닐까 합니다.”
“단순화?”
“그렇습니다. 의문과 고민마저 이 간단함으로 묶을 수 있어야만 무공의 완성을 향하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합니다.”
“아아. 그렇구나. 그래.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어.”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은 듯 사부가 깊은 고민에 들어갔다.
‘설마! 내가 검후가 발전하는 기회를 준 거야?’
나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문구라도 한계 앞에서 성장이 막혀 있는 사부에게는 유용한 내용이었나 보다.
‘주인공이 후반부에 하는 고민을 사부는 이미 하고 있었나 보네.’
쉬잉. 쉬잉. 쉬잉.
검후 사부의 몸에서 황금색의 강기가 퍼져 나와 주변을 흐트러트리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검후전 밖으로 달려 나갔다.
느낌상 저 강기에 휘둘리면 곤란하다는 걸 직감해서다.
서걱. 서걱.
와르르.
내 생각이 옳았음을 입증하듯 강기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검후전을 무너트렸다. 그렇지만 호신강기를 두른 사부 주변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평온했다.
잠시 후.
사부의 몸에서 나와 아홉 갈래로 나눠진 황금색의 강기가 세 갈래로 줄어들었다.
‘구검이 삼검이 되었잖아!’
검후 사부가 익힌 검법의 명칭은 무정72검이다. 이 무공은 줄임의 무공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무학의 단계가 오를수록 검법의 초식이 줄어든다.
칠십이검이 삼십육검이 되고, 다시 십팔검이 된다. 그리고 구검이 된 이후로는 세 배로 주는데 삼검이 되고 궁극적으로 일검 하나만 남으면 무공의 극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에서 검후가 등장할 때. 그녀는 이미 일검을 이뤄 맹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부터다.
‘뭐지? 지금 삼검은 이뤘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째 분위기가 내가 무림을 더 빨리 파멸시키는 짓을 한 모양이잖아!’
내가 무림을 파멸로 이끌 악마의 성장을 도운 게 아닐까 두렵다. 그렇지만...
‘몰라! 내 앞날도 모르는데 그런 거 신경 쓸 틈이 어디 있어! 어차피 삼검은 금방 이룰 거였어.’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지금 난 사부에게 잘 보여 생존하는 것에 집중해야만 한다.
최대한 사부의 발전을 축하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앞에 서서 물끄러미 설지연을 바라보았다.
‘예쁘기는 참 예쁘단 말이야.’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그저 감탄만 나오는 얼굴이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나도 모르게 즐겁게 감상했다.
그때였다. 번쩍. 사부가 눈을 떴다.
“무아의 경지 후 처음 보는 사람이 천이 너라서 너무 좋아!”
와락. 검후 사부가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나는 몽롱한 기분과 함께 사부에 대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꽉 껴안았다.
그렇게 나와 사부는 한참이나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이윽고 시간이 충분히 흐르자, 내 머리에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떨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사부의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내 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진다. 무공을 깨달은 기쁨에 잠깐 나를 껴안았으나 계속 껴안고 있는 나에게 화가 난 모양이다.
‘내가 밀치면 건방지다고 생각하겠지?’
어쩌다 보니 서로를 강하게 안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밀치면 거절하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럼 열 받아서 나를 공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사라지지 않는다.
무공도 강하고 외모도 예쁜 사부라면 자부심이 상당한 게 정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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