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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검후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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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세상에 왔다. 아무래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한다.
지난 이틀은 지금 내가 마주한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자. 나는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잖아!’
방학을 맞이하여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발생한 사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가 이곳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원래의 나는 죽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고가 나던 순간, 나는 버스에서 읽고 있던 소설 세상의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장르 소설의 세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건 아무래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좋다.
그런데 말이야. 하필이면 왜 무협일까?!
나는 무협을 선호하지 않는다. 최근 인기가 없는 장르인 무협. 볼만한 글은 모조리 다 읽은 탓에 어쩔 수 없이 택해서 읽었던 글이다. 좋아하는 많은 장르 소설 중 어쩌다 읽은 무협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쁘다.
‘그래도 최악은 면했어. 나는 주인공은 아니야! 이걸로 만족하자!’
내가 들어오게 된 무협 소설의 제목은 ‘여인천하 영웅지로’
주인공이 현실에서 사고로 죽음을 당하며 무공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내가 들어오게 된 몸의 원래 주인은 위지천이라 불리는 이제 성인이 된 남자다. 위지천이란 이름은 소설에서 보았던 기억이 없다. 아무래도 비중이 전혀 없는 캐릭터가 아닐까 한다.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라는 사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지금은 배경 설명도 얼마 없는 글의 초반부란 말이야.’
하인에게 들었던 현재 시간은 소설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삶이 펼쳐질지 기대와 두려움이 가득하다.
똑똑똑
“천 공자님. 맹에서 귀한 분이 오셨습니다.”
맹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리에 나는 급하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육십을 넘긴 늙은 하인은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내가 밖으로 나오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맹에서? 도대체 누가 찾아온 거야?”
나는 맹이라는 말에 급하게 밖으로 나와 질문부터 던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작은 장원 하나와 몇 개의 전답만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나를 무림맹의 인물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무척 당황스럽다.
“공자님! 놀라지 마세요. 검후께서 오셨습니다.”
“거..검후?!”
나는 검후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면서 떨렸다.
“맞습니다. 이번에 최연소로 맹의 장로가 된 분입니다. 먼발치에서 봤던 분을 이렇게 바로 앞에서 보게 되어 그저 영광입니다.”
검후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한 하인.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찾아왔다는 말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검후는...... 그러니까 검후라는 이 여자는 소설의 최종 보스다.
완결까지 읽은 글이 아니라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시간이 흐르면 검후가 무림맹의 맹주가 되어 중원을 일통하고 독재를 일삼으며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는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거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광기와 잔혹함은 커져만 가고 그런 묘사는 작품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그런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도대체 왜? 나는 평범한 캐릭터 아니야?!
*****
“위지천이 검후님을 뵙습니다.”
나의 정중한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미소를 짓는 검후 설지연. 무림 최고의 미녀라는 수식어답게 세상이 온통 그녀를 밝게 비추는 조명인 듯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마구 내뿜는다.
미의 여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검후 설지연.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마냥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무섭다. 소설에서 묘사된 설지연은... 그냥 두려운 존재 그 자체라고!
“반가워. 천아. 너는 돌아가신 위지 대협을 쏙 빼닮았구나.”
누군지도 모르는 이 몸의 아버지와의 인연이 있나보다.
“아버지를 아십니까?”
“물론이지. 나는 돌아가신 위지풍 대협께 구명의 도움을 받았단다. 너를 더 빨리 찾아왔어야 하는데 내상을 회복하느라 늦어졌어.”
“???”
하인에게 듣기로 아버지 위지풍은 무림맹에 생필품을 납품하던 평범한 상인이라 했다. 그런 아버지가 어떻게 검후를 알고 목숨까지 구해주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어리둥절하다.
의문으로 가득한 내 반응을 본 검후 설지연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나의 궁금함을 해결하여 주었다.
“위지풍 대협의 진짜 신분은 무림맹 수호대의 부대주란다.”
“...그렇군요.”
소설에서 이름도 나온 적이 없는 위지천. 그저 잡다한 캐릭터의 하나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근데 악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검후 설지연은 도대체 왜 나를 찾아온 것일까?
“잘 들어. 천아. 이건 돌아가신 위지 대협의 간곡한 부탁이야.”
“아버지의 부탁이요?”
“그래! 신검 위지풍 대협께서 나를 구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부탁한 것이 있단다.”
“어떤 부탁인지요?”
“너에게 무공을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거야. 수호대의 대원이라는 신분 탓에 무공에 관심이 많은 아들에게 늘 미안했다고 하셨어. 내가 맹에 허락을 구하고 왔으니 천이가 본 검후의 제자가 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두둥. 천하의 검후가 제자로 삼겠다는 말에 나는 소설에서 보았던 짧은 구절들 몇 개가 떠올랐다.
죽은 검후의 제자
검후는 제자가 죽고 난 이후 많이 변했지!
‘뭐야? 나 죽는 존재야?!’
아무래도 소설에서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던 검후의 죽은 대제자가 바로 나인가 보다. 소설의 모든 글은 주인공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탓에 같은 시대를 살아도 다른 캐릭터들의 세세한 상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지닌 소설의 내용으로는 이런 부분을 당연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다. 오래 살려면 거절해야 한다.
“저는 올해 약관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무공을 익힐 좋은 시기도 지났고, 성인 남자인 탓에 검후께 불미스러운 소문이 날까 걱정도 되어 제자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잘했어! 이 정도면 자연스러웠어!’
지금의 내 나이는 무공을 익히기에 늦은 시기다. 거기다 검후 설지연의 나이가 삼십 대 중반이라 하지만 무공을 극성으로 익힌 탓에 조금도 늙지 않았다. 동안인 그녀가 검후라는 사실을 모르고 볼 경우 나의 연인으로 더 어울리는 용모의 소유자라는 거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명분으로 그녀의 제자가 되는 것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검후의 표정이 이상하다. 입가의 미소가 더 커졌다.
“너는 참으로 마음에 드는 아이야.”
“...”
“위지풍 대협의 부탁을 검후인 내가 허락했다. 그걸로 모든 건 끝났어. 불필요한 사람들의 불필요한 시선은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단다.”
“축하합니다. 천 공자님. 정도의 자랑이신 검후님의 제자가 되셨군요. 어서 빨리 사부님께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옆에 있던 하인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축하했다. 이런 상황이 즐거운지 검후 설지연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러면 거절할 수 없잖아. 나는 망했구나!’
그렇게 나는 검후의 대제자가 되었다. 언제인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조만간에 죽게 되는 대제자 말이다.
*****
검후 설지연의 제자가 되고 그녀와 함께 무림맹으로 들어왔던 날 저녁. 나는 원래 몸의 주인이던 위지천의 기억을 모두 얻었다. 아무래도 이런 기억들이 몸에 있었기에 내가 중원의 말을 하는 게 가능했었나 보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네.’
불안함 탓일까? 나는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는 환경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곳은 무림맹의 깊은 곳에 위치한 검후전. 이곳은 추후 금남의 땅이라 불리게 되는 곳이다.
‘남자라면 광적으로 싫어하는 여자잖아.’
소설에서 검후는 남자라는 존재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니 너의 눈은 필요가 없구나.
이렇게 말하며 지나가는 남자의 눈을 뽑는 건 아주 흔한 일상이다.
거기다...
음욕으로 가득한 너의 그 물건은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어.
이렇게 말하며 검으로 남자의 상징을 잘라 고자로 만드는 장면도 걸핏하면 나온다.
그런 살벌한 여인과 단 둘이서 검후전에서 지내는 남자가 되었으니 마음이 편할 수 없지.
“일찍 일어났구나. 천아. 밖으로 나와.”
뛰어난 내공으로 내가 잠을 자고 있지 않다는 걸 느낀 검후 설지연이 나를 부른다.
검후전 앞에 위치한 작은 연무장으로 나간 나.
“사부를 뵙습니다.”
“이렇게 일찍 옷까지 차려입고 있다니... 너는 참으로 성실한 아이구나.”
자애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설지연.
‘속지 말자. 저런 예쁘고 따뜻한 모습에 절대로 속으면 안 돼!’
흡족한 표정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더 긴장해야만 했다.
“천이 너도 알겠지만, 무공은 뼈가 여물기 전에 익힐수록 편하단다.”
“제자가 미천하여 사부께 실망을 드리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을 들으려고 했던 게 아니야. 제자가 부족한 건 사부가 부족하다는 뜻. 내가 반드시 너를 후기지수의 으뜸으로 키워낼 테야!”
다부진 표정으로 자신의 다짐을 말하는 검후 설지연. 나는 그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냉기가 밀려와 몸을 부르르 떨게 되었다.
“사부의 기대에 보답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말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검후.
“아주 힘들지만 빠르게 고수가 되는 길이 있고, 느리지만 조금은 덜 힘들게 고수가 되는 길이 있어. 천아. 너는 어떤 걸 택하고 싶어?”
“힘들지만 빠르게 고수가 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나는 힘든 걸 아주 싫어한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노력하지 않는 버러지들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야.
검후 설지연이 부하들을 죽이거나 다스릴 때 자주 하는 말이다.
편한 길을 택해도 들어준다는 보장도 없고, 나약한 말을 하면 제자인 나를 버러지로 볼 게 빤한 상황. 이왕 골라야 한다면 자발적으로 힘든 길을 골라 평판이라도 좋게 만들자고 다짐했다.
“천이 넌 참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야.”
그렇게 나의 처절한 수련이 시작되었다.
한 번 아프고 빨리 끝나는 게 좋잖아. 이렇게 말하고 아혈을 눌러 비명을 지를 수 없게 만드는 그녀.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야 다양한 초식을 구사할 수 있으니 잠깐만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게. 이렇게 말하고는 마혈을 눌러 몸도 움직일 수도 없게 만드는 사부.
검후 사부는 나의 몸을 직접 통제하기로 마음먹고서 본격적으로 비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살아서 지옥을 경험해야만 했다.
새벽에 시작하여 해가 하늘 높게 떠오를 때까지 나의 몸을 비명 지르게 만든 검후 사부가 드디어 제압했던 혈도를 풀어주며 몸에 자유를 돌려주었다.
헉. 헉.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연무장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살면서 결코 사용하지 않았던 무수한 신경과 근육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이다.
“이 사부가 누군가를 가르쳐 보는 건 처음이라 의욕이 좀 앞선 게 아닐까 걱정인데 어땠어?”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검후 설지연. 하지만 이 여인의 표정은 분명 칭찬을 바라는 여인의 눈빛이다.
‘사람 괴롭히는 맛을 느껴 짜릿하고 즐거운 모양인데?’
나는 몇 시간에 걸쳐 지옥을 경험했다. 그렇지만 눈앞의 검후가 너무 무서워 거짓을 말하게 되었다.
“사부님이 얼마나 저를 생각하는지 몸으로 느낀 귀중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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