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 번 달려보자고요.> (233/245)

관상만렙 공무원님 233화

78. 한 번 달려보자고요.

퇴근 무렵 엄 국장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시간 되면 맥주나 한잔할까?]

[좋죠.]

경도가 콜을 받았다.

그러잖아도 치맥이 땡기는 날이었다. 그러나 과장이 되었다. 직원들에게 차마 저녁 시간을 비우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말단 때와는 다른 처지가 된 것이다.

그때라면…….

-이 주임님 맥주 한 잔 어때요?

-배 주임님, 치맥 한 잔 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다.

어느새 경도의 공직짬도 이렇게 쌓여버렸다.

과장이 일방적인 회식 스케줄을 통보하면 상당수 하위직들의 저주가 따라온다.

-회식이라고 남으라는데?

하는 말이 돌면…….

-아, 씨, 왜 하필 오늘 회식이야?

-진작 말하든가.

-저녁이 있는 삶은 개솔, 좋았던 기분이 급 개꿀꿀해지네.

……하고 푸념 파티가 벌어진다.

그걸 기억하는 경도였기에 번개 회식 같은 것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사무관 자리.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렇기에 비리 투서가 들어오고 시기의 칼날이 날아온다. 과원들도 대개 과장과 섞이는 걸 싫어한다. 직급이 올라가는 만큼 외로움의 크기도 늘어난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그래도 은빛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 가깝자 경도 마음을 알고 콜을 보내왔다.

“과장님, 기분 좀 꿀꿀한데 맥주 한 잔 안 사실래요?”

회식 요청이다.

“어, 이 주임님이 시간 돼요?”

“저 아직 미혼이잖아요.”

“진짜요?”

“아, 우리 과장님 무심하네. 토마토 모델 내세울 때는 간이라도 떼어줄 것 같더니. 이제 남자가 생겨서 사기꾼인지 아닌지 좀 봐달라고 하려 했더니 말이야.”

“진짜 남자 생겼어요?”

“그럼 자기는 결혼하고 나는 독신으로 평생 사리나 만들라고?”

“절대 아니죠. 사진 있어요?”

“이거 어째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인데요?”

“절대 아닙니다. 빨리 주세요. 궁금하네요.”

“그러니까 어째 또 무섭기도 하고…….”

“빨리요.”

경도가 손을 내밀었다.

신규 때 유부남에게 걸려 곤욕을 치렀던 은빛이었다. 이후로 남자 얘기를 못 들어 궁금하던 차에 잘된 일이었다.

“떨린다.”

은빛이 사진을 열어주었다.

“뭐를 중점으로 봐 드릴까요?”

“일단은 결혼전력.”

“미혼입니다.”

“다음은 인성.”

“굿입니다.”

음즐궁 때문이었다. 볼의 음즐궁이 풍성하니 선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녀의 전력 때문에 기색도 점검했다. 은은한 홍색이 아른거리니 가식도 아니다.

더 좋은 건 와잠이었다. 눈밑 와잠에 주름이 보인다. 공덕을 베푸는 사람이다. 다음 자손대에도 그 복이 미치게 될 일이다.

“그럼 건강은요? 예전 과에서 봤는데 주무팀 팀장님 남편이 마흔 중반에 급사를 하시더라고요. 그 팀장님은 아직도 충격 진행이시고…….”

“80까지는 문제없습니다.”

“진짜요?”

“총평 나갑니다. 이마가 시원하니 재물운도 괜찮습니다. 말년운이 강하니 퇴직 후에 사업을 벌인다고 하면 무조건 밀어주세요. 그리고 전의 일을 보상하려는 건지 눈썹까지 궁미네요. 이런 사람은 자기 여자밖에 모르니 청첩 돌리셔도 되겠습니다.”

“그럼 나 이 결혼 질러요?”

은빛 목소리가 높아진다. 자세히 보니 얼굴의 간문과 신문에도 황색 윤기가 흐른다. 결혼이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그러세요. 어차피 말 난 김에 용포읍 레귤러 멤버들 한 번 집합해볼까요?”

“에? 용포읍 멤버는 우리가 반인데?”

“진짜네? 이거 한 번 밀어붙여도 되겠는데요?”

“레귤러면 시장님까지 포함인데 되겠어요?”

“이 주임님 결혼각인데 안 되겠어요?”

“나야 좋죠. 엄 국장님한테 눈도장도 찍고.”

“콜한 겁니다.”

“넵, 과장님.”

은빛이 주먹을 내민다. 경도도 주먹을 가져다 댔다. 은빛의 남친 소식은 어수선한 하루에 위로가 되는 낭보였다.

퇴근 직전, 계치훈의 전화가 들어왔다.

“어, 계 과장님.”

경도에게는 늘 반가운 계치훈이었다. 결혼 소식이라도 알리려나 하는데 용 과장의 수사 상황을 전해왔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경도가 물었다.

-우리 서 정보과는 괜히 월급 받나요? 오 과장님과 연관된 건이 있다기에 내려가 봤더니 수사 중이더라고요. 시청에서 이첩받았다던데요?

“그게 좀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사원에서도 다녀갔다고요.

“예.”

-사무관 승진 유명세 한 번 제대로 타시는군요.

“…….”

-용태훈이라는 사람, 우리 수사관들이 탈탈 털고 있던데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총 1억 6천여만 원 상당의 뇌물이 나왔답니다. 골프회원권에 오피스텔까지 받았고 그중 3천여만 원을 결재 라인에 뿌렸습니다. 아마 혐의가 중대한 직원들 몇을 소환할 것 같더군요.

“다 현직들입니까?”

-둘은 퇴직이고 한 명만 현직이라고 들었습니다.

“여직원 자살 건에 대한 것도 나왔을까요?”

-그 건은 직원에게 부당한 지시를 했다가 항변을 받자 팀장을 불러 대신 쪼았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빡친 팀장이 여직원의 책상을 구석으로 배치하고 업무에서 배제한 게 발단이 된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하는데 그건 용태훈의 생각이지요. 당시 여직원의 어머니가 우울증 환자여서 큰 이의제기를 안 한 것 같은데 지금은 많이 호전되어 관련자들의 강력처벌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된 거로군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아직도 상황파악 못 하고 오 박사님 험담을 계속 중입니다”

“뭐라던가요?”

-오 박사님이 관상으로 미신을 조장 중이니 그걸 처벌해달라더군요. 공직자가 무슨 미신이냐며…… 그걸로 수입도 많은 것 같으니 겸직금지의무 위반이라나요? 하지만 그 겸직이 시장의 허가를 받은 사안이라 하니까 몸을 벽에 부딪치는 등 자해까지 하면서 성질을 부렸다는 후문입니다.

“면목 없습니다.”

-오 과장님이 왜요?

“어쨌든 저로 인해 파생된 문제 아닙니까?”

-이런 사람은 엄벌을 받아야 합니다. 같이 협력해서 시정을 발전시킬 생각은 않고 동료 잘되는 일에 배앓이를 하다뇨? 우리 서장님도 보고 받으시더니 죄질이 악랄하다며 엄벌을 강조하셨습니다.

“…….”

-곧 수사정리가 되어 결과 통보가 갈 겁니다. 그렇게 아십시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통화를 끝냈다.

곧바로 염정아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용태훈 사건 관련으로 직원이 불려갔다는 내용이었다.

용태훈 과장.

괜한 시기심이 불러온 파국이었다.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완전히.

“어? 이 주임?”

약속장소에 나온 엄낙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경도 옆의 은빛 때문이었다.

“저도 있어요.”

은빛 뒤에 숨었던 민지도 나왔다.

“배 팀장도?”

“제가 불렀는데 괜찮겠습니까?”

“괜찮다마다. 야, 이거 용포읍 맞복팀 용사들을 이렇게 만나네?”

“한 명 더 있는데…….”

“누구? 현 팀장도 왔어? 아니면 권 팀장?”

“그러고 싶었는데 현 팀장님은 병가 중이시더라고요.”

경도가 답했다. 현 팀장은 현동욱이다. 용포읍 멤버였지만 태술이 오기 전에 빠져나가면서 용포읍의 황금기에 기여하지 못했다.

“그럼 권 팀장이군?”

“권 팀장은 오늘 재택이라 아직 퇴근 못 했고요.”

“그럼 누구?”

“접니다.”

엄낙기가 재촉할 때 뒤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정우석?”

엄낙기가 또 한 번 소스라친다.

“섭섭한데요? 저 그렇게 부려먹으시고…….”

“어떻게 된 거야? 니가 어떻게?”

“왜 이러세요? 저 오 과장님이랑 의형제 사이라고요.”

“그래?”

엄 국장이 경도를 바라보았다.

“제가 동생이 없잖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 정 사장, 요즘 잘 나가고 있습니다.”

“사장?”

“오 박사님이 제 직업관상 봐주셨거든요. 공부를 더 해야 하나 사회진출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여행업을 권해요. 해서 사회복무요원 소집해제 후에 한 8개월 정도 해외를 쏘다니면 구상을 했습니다. 마침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쑥대밭이 되고 여행 패러다임도 바뀐 탓에 제가 구상한 게릴라 여행이 좋은 반응을 얻어 겨우 자리를 잡았습니다.”

“악, 요즘 뜨는 게릴라 여행이 우석 씨 회사야?”

은빛이 끼어들었다.

“이 주임님은 아시는군요?”

“나 저번에 그걸로 우리 과원들하고 터키 다녀왔잖아? 시스템 죽이던데?”

“감사합니다.”

“허어, 우리 정우석이 사장님?”

엄낙기가 혀를 내둘렀다. 그가 국장이 된 것만큼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자, 그럼 들어가시죠.”

경도가 안을 가리켰다.

“고고싱, 들어가세요, 국장님.”

은빛이 엄 국장의 등을 밀었다.

“아, 그런데…….”

내실 앞에서 경도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왜?”

엄낙기가 물었다.

“죄송하지만 두 분이 더 계십니다.”

“둘?”

“국장님이 확인하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대체 누가 둘씩이나? 통합 사례관리하던 여사님들?”

드륵.

미닫이문이 열렸다.

“……?”

순간 엄 국장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내실에 미리 착석한 두 사람, 이 시장과 육세창 국장이었다.

“시장님?”

엄낙기가 반색을 한다.

“뭡니까? 그 눈빛은…… 설마 우리 쫓아내려는 건 아니죠?”

이 시장이 웃었다.

“쫓아내다뇨? 게다가 육 국장님까지?”

“시장님, 국장님.”

은빛이 명랑하게 난입을 한다.

“우왕, 이런 날이 오다니…… 저 얼마 전에 우리 여고 동기들 하고 교복모임 한 번 가졌는데 그때보다 더 신나는 거 같아요.”

은빛의 붙임성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분위기 메이커는 확실히 달랐다.

용포읍 맞춤형 복지팀.

거의 완벽한 멤버 재림이었다.

“아, 이거 곤란한데? 나는 오 과장만 만나는 줄 알고 카드 한도를 조금만 허락받고 왔는데…….”

엄 국장이 조크를 날렸다.

“어머, 국장님 아직도 사모님한테 꼼짝 못 하세요?”

은빛이 그냥 넘어갈 리 없다.

“당연하지. 남자들 직급은 개직급이야. 나보다 우리 사모님이 더 대우받고 다닌다니까.”

“그럼 아직도 용돈 타 쓰고 다니는 거예요?”

“아마.”

“와아, 국장님이 되었는 데도요?”

“그래도 우리 오 과장 만난다고 하면 한도가 확 늘기는 해. 오늘도 같이 좀 만나면 안 되냐고 생떼를 쓰더라고.”

“그럼 오시라고 하세요.”

이 시장이 말했다.

“아유, 아닙니다. 그럼 분위기 깨져요. 우리 그 사람, 오 박사라면 꿈뻑 죽습니다. 보나 마나 옆에 앉아서 온갖 거 다 챙겨 먹이려고 할 텐데…….”

“그럼 안 돼요. 우리 과장님은 제가 챙길 거예요.”

은빛이 경도 사수에 나섰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제가 쏩니다. 나도 오 박사에게 점수 좀 따보자고요.”

이 시장이 말하자…….

“안 됩니다. 용포읍의 중흥기 때 제가 과장이었습니다. 그때도 다른 팀들 눈치 보느라 제대로 못 챙겼는데 이 자리라도 책임을 지겠습니다.”

육 국장도 지지 않았다.

“허어, 이거 시장 령이 안 서네?”

이 시장이 슬쩍 직위로 밀어붙인다.

“의견 있습니다.”

은빛이 다시 나섰다.

“이러면 어떨까요? 엄 국장님 주관이시니 1차는 엄 국장님이 쏘시고 2차는 육 국장님, 그리고 3차는 시장님이 쏘면 공평할 거 같은데요?”

“괜찮은데?”

이 시장이 동의를 표했다.

“어, 그럼 저는요? 지난번 경도 형님 신혼여행이 저희 게릴라 여행과 콘셉트가 안 맞아 협찬도 못 해 드려서 오늘은 꼭 한 잔 사드리고 싶었는데?”

우석이 울상을 지었다.

“그럼 장 사장은 입가심 4차.”

은빛이 광속 정리에 돌입한다.

“일단 집에다 전화부터 해야겠군. 오늘 밤 기다리지 말라고 말이야.”

이 시장의 조크와 함께 용포읍 전사들의 막강 회식이 시작되었다.

용포읍.

멤버들의 얼굴에서 그날의 추억들이 흘러나왔다.

-좌천의 아픔을 딛고 시장으로 우뚝 선 이창교.

-그 이창교의 오른팔로 결국은 국장 승진을 먹은 육세창.

-경도의 상괘를 받아 개과천선(?)한 끝에 관운 대운이 열린 엄낙기.

-이제 슬슬 두각을 나타내는 민지와 은빛.

-거기에 여행업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사회복무요원 출신 우석.

서로에게 부어주는 술이 달 수밖에 없었다.

“나가자.”

건배사는 은빛이 제창했다.

나가자는 나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왜사니.”

이건 왜 이렇게 사는 게 멋지니 라는 뜻.

세 번째는…….

“모바일!”

모두의 바람대로 일이 이루어지리라.

1차의 마무리는 ‘명품오징어’가 되었다.

명퇴조심, 품위유지, 오래오래, 징그럽게, 어울려 놀자.

어려울 때 만났던 사람들은 이래서 좋았다. 이 시장도 용 과장 사건을 잊은 것 같았다. 경도도 그랬다.

[오늘은 좀 늦을 거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두나에게 문자를 넣을 때 백지애의 문자가 들어왔다.

<오 박사님, 약속대로 제 첫 세비를 OK후원회에 입금합니다. 괜히 반환하실 생각 마시고 어려운 아이들에게 써주세요. 제 인생 상괘와 함께 김윤광 의원님과 맺어준 인연,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

경도의 시선이 멈췄다. 기어이 세비를 입금한 백지애였다.

<고맙습니다. 뜻깊게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답문을 보내고 남은 잔을 비웠다.

좋은 밤에 좋은 사람들, 그리고 좋은 소식들.

경도도 낮의 사건을 잊고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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