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저 운이 막힌 사연-3> (221/245)

관상만렙 공무원님 221화

73. 금수저 운이 막힌 사연-3

“……?”

사치모토의 눈에 파란이 인다. 완전하게 새것인 커터 칼날이었다.

이걸로 눈 옆의 간문을?

사치모토의 이마는 어느새 창백했다.

“당신의 허튼 그리움이 응어리로 남은 곳입니다. 그곳을 베어 피를 내야 찰색이 통하게 됩니다. 이마 전체를 가로막은 불운들 말입니다.”

“…….”

“제가 벨 수도 있지만 당신의 운명입니다. 대운은 스스로 결자해지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에게 열리는 법입니다. 다만 간문의 주름과 같은 방향으로 베어야 합니다. 거기 열십자의 주름이 생기면 부인을 때리는 폭력남편이 될 수 있거든요.”

“키치세…….”

사카모토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한다.

이루지 못한 과거에의 동경.

사카모토의 그것은 좀 유효기간이 길었다.

그렇기에 결혼을 하고서도 아내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다. 딸을 낳기는 했지만 부부관계도 거의 없었다.

키치세 때문이었다.

그녀의 밤은 황홀했다. 뼈가 녹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내 나츠하의 밤은 아주 달랐다. 그녀는 조신했고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여자 키치세가 살인마였다니.

사카모토는 사실 외로웠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부하들도 있고 친구에 아내에 부모까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면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헤어진 키치세가 그리웠다. 그녀라면 왠지 모든 고민을 들어줄 것 같았다.

-네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딱 두 번 물었었다.

-꼭 목표가 있어야 하나요?

사카모토의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카모토를 사랑했다. 그건 사카모토도 인정이었다. 그렇게 방황할 때도 묵직하게 기다려주었고 회사에서 실적을 올리지 못해도 책망하지 않았다.

-늦게 피는 꽃도 있는 법.

아버지의 혼잣말이었다.

아내 역시 무던했다. 딸의 양육에 충실했고 높은 교양을 가졌지만 사카모토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허깨비였군.’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키치세의 사진.

아내 몰래 볼 때마다 그리움에 사무치던 그였다. 그럼에도 만날 수 없는 건 그녀가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헤어진 지 1년쯤 지나 그녀가 일하던 술집에 들렀을 때 주인은 치를 떨고 있었다. 거액의 가불을 요구하길래 거절했더니 경찰청에 불법영업을 찌르고 도피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통쾌했었다.

왜냐고?

키치세가 한 행동이니까.

사실.

키치세는 뭐든 즉흥적이었다. 사카모토의 고민에 도움이 될 리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리운 건 만날 수 없는 불가능 속에서 신격화가 된 까닭이었다.

그녀라면 귀를 기울여줄 거라는 착각…… 그 오랜 착각…….

하지만.

이렇게 돌아보니 망상이었다.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키치세가 아니라 아버지와 나츠하였다. 그걸 모르고 엉뚱한 곳에 마음을 놓고 다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아버지와 나츠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바보 같은 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였다.

드득.

칼날 밀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도 귀에만 들렸다. 이미 몰입지경에 돌입한 사카모토의 귀에는 그 소리가 없었다.

스윽.

왼편 간문에 대고 경도가 알려준 방향으로 칼날을 당겼다.

툭.

투둑.

핏방울이 떨어졌다. 너무 베었다. 그러나 아프지 않았다.

경도의 시선은 그 간문에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베었다. 그렇기에 출혈도 많았다. 그래도 말리거나 거들지 않았다.

사카모토의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그 피가 멈출 때까지 투명인간처럼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제가 할 일이 더 있습니까?”

피가 멈추고서야 사카모토가 물었다.

“혹시 허벅지에 점이 있습니까?”

“……?”

“있다면 그것도 베어주십시오. 허벅지의 점 역시 복된 인연과의 조화를 가로막는 흉점입니다. 오랜 흉액이다 보니 방해물이 간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도 말이 끝나자 그가 돌아섰다. 바지를 내리더니 칼날을 가져간다.

“이제는요?”

“아마 발바닥에도 점이 있을 겁니다. 그건 집안을 더 크게 부흥시킬 동력의 점이니 손대지 않아도 됩니다.”

“발바닥?”

그가 양말을 벗었다. 거기 정말 점이 있었다.

“이건 나도 모르던 건데…….”

“그래서 관상이 신기한 거지요.”

경도의 대답이 아련했다.

사카모토는 다시 책상다리 정좌로 돌아왔다.

“이제 얼굴을 다시 보겠습니다.”

경도의 관상안이 그의 이마를 겨누었다. 천창에 기가 통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푸른 청색이 조금씩 가신다. 시선이 ‘지고’로 옮겨간다. 기가 내려온다. 그다음은 양쪽 관골이다.

콧망울의 정조에도 신호가 왔다. 희미하지만 조금 밝아진 것이다.

‘좋아.’

내심 쾌재를 부르고 사카모토의 일진과 월진을 짚었다.

“5일 후의 오전 11시경에 계약을 체결하세요. 그때의 기세가 가장 강하니 조금 유리한 조건으로 승부를 걸어도 될 것 같습니다.”

“5일 후 11시?”

“돌아가시면 사모님의 지지를 받으십시오. 이 말은 평생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무님의 일생에 두고두고 귀인이 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 일이 잘 수행되면 부친께서도 병마를 떨치고 일어설 겁니다.”

“정말입니까?”

“예.”

“그렇게만 되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이것으로 상괘를 마칩니다.”

“그럼 이걸 받아주십시오.”

사카모토가 복채를 내밀었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다. 안 받는다고 그냥 갈 것도 아니니 접수해 버렸다.

“상무님이 간문에 피를 흘렸나?”

사카모토가 쉬러 나간 사이에 천 거사가 들어와 물었다.

“제가 베라고 시켰습니다.”

“간문에 횡액이 붙은 건가?”

“보이처궁하실 분인데 사모님이라는 보석의 진가를 모르니 그걸 짚어주었습니다.”

“아내 덕?”

“예.”

“하긴 여복(女福) 모르는 사람이 많지.”

“복채를 너무 많이 넣으신 거 같은데 혹시 거사님의 코치 아니었습니까?”

경도가 물었다. 무려 1억짜리 수표가 든 까닭이었다.

“그 정도는 받아야지. 사실 에이사이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3억이나 5억쯤 넣으라고 했을 걸세.”

“거사님.”

“괜찮아. 어차피 저 친구들은 기업자문이니 컨설팅이니 하는 거 한 번 받는데 몇십억씩 뿌리기도 한다네. 1억이면 거저지.”

“그러시면 제가 어려운 분들의 후원사업에 뜻깊게 쓰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번에 승진을 하셨지?”

“예. 지난번에 주신 상괘 덕분입니다.”

“아니, 내 상괘는 그게 아니었네.”

“예?”

“아직 진행형이야. 현재의 자리에 맞는 게 아니라고.”

“이 나이에 사무관이 된 것만 해도 초고속승진입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거사님.”

“관운이 제대로 들었다고.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나쁜 것도 있군.”

“……?”

“준두와 양 관골이 다른 부위에 비해 어두워. 누군가 오 박사의 명예를 해치려 하니 주변을 잘 살피시게.”

천 거사가 경도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경도가 두 사람을 배웅했다.

‘명예를 해친다?’

하긴.

이해가 되었다.

다른 직원들 입장에서 보면 초고속 승진가도였다. 경도를 아는 사람이야 그 능력을 인정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배가 아플 수 있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인사팀장을 하면서도 뇌물 한 푼 먹지 않았다. 위법이라면 승진 때 받는 꽃다발과 부녀회장 등의 초대에 응한 것인데 그건 털어봤자 흠이 될 수 없었다.

잠시 숨을 돌린 후에 에이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박사님?”

“방금 사카모토 님의 상괘를 끝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거액의 복채를 주시더군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반쪽 상괘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무슨 뜻이죠?”

“사카모토 님이 제게 관상을 보러온 이유가 있습니다.”

“…….”

“거액을 받았으니 끝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끝이라 하심은?”

“죄송하지만 사카모토 님 부친의 연락처를 좀 주십시오.”

“오 박사님. 그분은 지금…….”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박사님의 위명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으니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어차피 말은 못 하시는 상황이지만…….”

“고맙습니다.”

“모르는 번호라 사모님이 전화를 안 받을지 모르니 제가 박사님이 전화할 거라는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한 5분쯤 후에 전화하시면 되겠습니다.”

에이사이와의 통화가 끝났다. 잠시 후에 문자가 들어왔다.

그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여자의 일본어가 나왔다.

“저는 한국에서 관상 공부를 하는 오경도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자의 답과 함께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제 말씀하시면 회장님이 들으실 겁니다.

여자가 콜 사인을 보냈다.

“회장님, 저는 에이사이 스님의 추천으로 아드님의 관상을 봐준 한국의 관상가 오경도입니다.”

-…….

“방금 아드님의 상괘를 끝냈습니다.”

-…….

“관상을 보는 과정에 필요해 회장님의 사진도 보게 되었습니다.”

-…….

“그때 알았습니다. 아드님 관상의 진짜 의뢰자는 회장님이시라는 것.”

-…….

“다행히 아드님께서 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 장애물을 치웠으니 회장님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럼…….”

경도가 용건을 마쳤다. 그 마무리에 경도의 상괘를 관통하는 증거가 나왔다.

-고맙소.

소리가 들렸다. 속삭임 같아서 아련하지만 분명 ‘언어마비’ 회장의 목소리였다.

통화를 마친 경도가 조용히 웃었다. 끝내주는 마무리였다.

***

“안 회장님.”

경도는 바빴다. 각 부녀회장에 이장단들과의 통화였다. K시에는 3개 읍과 8개의 면동이 있었다.

이장단에 부녀회장단만 해도 수백 명에 달했다. 하지만 걱정이 없었다.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용포읍은 안선주 회장을 필두로 경도와 케미를 이룬 조직이었고 그다음 가는 상포읍 역시 안선주의 소개로 부녀회장들과 친분을 튼 후였다.

나머지 읍면동 역시 문제는 없었다. 시 체육회장을 비롯해 각 종친회 조직을 통해 친분을 쌓아온 까닭이었다.

부임과 함께 사업추진에 들어갔다. 민지가 임시직 3명을 할당받아 투입한 것도 시너지가 되었다.

시간이 허락되는 사람들은 과로 불러들이고 그렇지 않은 곳은 경도가 출장을 나갔다. 현황은 직접 보았고 복지지원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도 현장에서 파악을 했다.

소득, 학력, 직업, 가구 구성, 장애 여부, 가족관계…….

매 요소에 대한 경도의 이해도는 높았다. 그건 용포읍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말단 공무원 시절, 경도는 맞춤형복지팀의 전천후 기동타격대였다. 게다가 선배들의 텃세 때문에 2인 1조의 원칙마저 지켜지지 않았으니 그때 몸으로 체득한 소외계층관리 노하우가 빛을 발했다.

더러 배타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관상안으로 케미를 이루었다. 시간이 안 맞는 사람들은 주말이나 휴일에도 출장을 나갔으니 업무 탄력이 제대로 붙었다.

사무관이 되니 단점도 있었다.

휴일에 근무를 해도 시간외 수당이 없었다. 대신 보람이 크니 신경 쓰지 않았다.

더러는 두나의 도움도 받았다. 가족에게 버림을 받은 어르신의 경우였다.

자녀가 다섯이나 되는데 전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약속이나 한 듯 전화번호를 바꿔버린 것이다.

할머니의 충격은 굉장했다. 두나를 앞세워 위로하니 할머니가 용기를 얻었다.

부창부수라는 단어가 알맞은 날이었다.

사카모토 상무도 그렇기를 바랐다. 그닥 살갑지 않던 아내와의 케미가 아름답기를. 그래서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사업가가 되기를.

그 분주함 속에서 결혼식이 다가왔다.

결혼은 아예 거창하게 치르기로 했다. 온다는 사람이 많으니 시립회관 대강당을 대관했다. 음식은 안선주와 부녀회장들이 책임지기로 했다.

경도가 극구 말렸지만 그녀들의 생떼를 당할 수 없었다.

축의금도 고민이었다. 장기 교육을 가는 직원들은 벌써부터 민지 등을 찾아와 봉투를 맡기고 갔다.

김윤광 등의 거물들 역시 축의금을 사양하면 후원금으로 두고 갈 게 뻔했다.

“그럼 차라리…….”

두나가 현실적인 제의를 내놓았다.

“대박.”

경도가 콜을 받았다. 기가 막힌 제안이었다.

<축의금사절>에서 <축의금환영>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기왕에 벌이는 것 제대로 벌여볼 생각이었다.

의미 있는 복안이 있었다. 그건 조경철과 극소수 관계자 외에는 특급 보안을 걸어놓았으니 경도는 다 계획이 있었다.

결혼식 나흘을 앞두고 조경철의 전화를 받았다.

-오 박사, 사카모토가 누구야?

다짜고짜 나온 질문이었다.

“아는 일본 기업가인데요, 왜요?”

-주식기증을 해왔어. 일본 기업인데 무려 10만 주. 오늘 거래가로 따져보니 무려 25억 원 이상이야. 게다가 아침부터 계속 오르고 있고.

“……?”

-이거 그냥 접수해도 돼?

“잠깐만요.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전화부터 끊었다. 에이사이의 번호를 찾았다. 그때 일본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 박사님.

사카모토 목소리였다. 아주 밝았다.

“상무님,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주식 기증 말씀입니까?

“예,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보다 제 소식부터 들으셔야죠?

사카모토가 기분 좋게 질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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