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212화
70. 공무원은 동네북이 아닙니다-2
“그리고 말이야.”
이 시장의 지시가 이어졌다.
“권태술 감사팀장.”
“……?”
“어디로 보낼 생각인가?”
“시장님.”
“자네 관상실력에 모를 리 없겠지. 나도 요로를 통해 대략 들었네.”
“…….”
“내 마음 같아서는 따끔하게 경고하고 유임시키는 게 맞는데 그렇게 되면 령이 서지 않겠지.”
“…….”
“권 팀장에 더불어 최기동 국장님 말이야, 이번 선거에서 공무원의 중립을 가장 심하게 훼손하셨더군.”
“…….”
“그것까지 감안해서 인사안을 잡으시게.”
이 시장이 ‘감안’이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최기동 국장의 퇴임을 뜻하는 언질이었다.
최기동 국장은 임덕균 비서실장과 막역하다. 권 시장의 재선을 위해 암약을 했다. 그가 나댄 것은 퇴임 후에 지역개발공사의 요직을 노리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무리를 했으니 이 시장을 대놓고 깎아내렸다. 경도도 몇 번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잖아도 비리 공무원들을 감싸며 이 시장의 눈 밖에 났던 사람이다. 일이 이렇게 되니 정리 수순에 들어가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것 외에는 이번 선거에서 나온 잡음일랑 싹 잊어버리시게. 선거 때 라인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예, 시장님.”
“가능한 한 빨리 작업해서 올리시게. 우리 시, 산적한 현안이 많지 않나. 가면서 육 과장 좀 오라고 하고.”
이 시장이 일어섰다. 지시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복도로 나왔다.
인사팀 사무실로 들어설 때였다. 안전총괄과 주무 팀장이 다가왔다.
“잠깐 좀 보지.”
“무슨 일이죠?”
경도가 물었다. 그와는 발령 초기에 같이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7급 주사보였다.
“잠깐이면 돼.”
그가 경도 팔을 끌었다. 그는 최기동 라인이다. 그러나 같은 직원으로 까탈스럽게 굴 수 없어 따라가 주었다. 소회의실 문이 열리니 최기동이 보였다. 김 팀장은 예의를 갖추고 물러났다.
“앉아.”
최기동이 의자를 권했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일단 앉으라고.”
거듭 권하니 착석을 했다.
“인사안 지시 떨어졌나?”
최 국장이 물었다. 그도 K시에서 잔뼈가 굵었다. 국장까지 올라간 마당이니 새 시장의 나갈 행보쯤은 다 꿰뚫고 있었다.
“표창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길입니다만.”
“이거 왜 이래? 나도 다 알고 묻는 건데?”
최기동은 웃지만 눈빛 속에 칼날이 번득였다.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장이 내 목 날리겠다고 안 해?”
“국장님.”
“어차피 다 알게 되어 있어. 그러니 말해보게.”
“표창보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 팀장, 이건 알아야지. 다음번 시장은 내가 될 수도 있어.”
최 국장의 미소가 더 날카로워진다. 빈말은 아니었다. 이 국장도 엊그제까지는 시의 국장이었다. 최 국장이라고 다음이나 그다음 시장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직원에게나 통할 말이었다. 경도는 보고 있었다. 눈썹이 끝나는 자리인 복당에 먹물 같은 검은색이 피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암시였다. 인생 파산이다. 작은 재앙이 아니다. 작은 재앙이라면 검은색이 저토록 진하게 시작할 리 없다.
이후로도 재기하기 어렵다는 뜻이니 그가 시장이 될 리 없었다.
증거는 이마와 턱에도 엿보였다. 생기 아웃이다. 콧대와 광대뼈도 안개가 낀 듯 흐리다. 지위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튼 인사문제라면 지금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언질은 나왔군?”
“인사문제는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결정은 못 하지만 밑그림은 그리잖나?”
“저는 더 아는 게 없습니다.”
“나하고 적을 지자는 건가?”
“그럴 리가요.”
“아직은 언질이 없었다?”
“예.”
“언질이 나오면 나한테 바로 보고하게.”
최기동의 강요가 나왔다. 별다른 대답 없이 인사만 하고 복도로 나왔다.
최기동은 자치행정국장이 아니다. 직속 상관이 아니니 경도가 따를 이유도 없었다.
소회의실에서 나오는 걸 육 과장이 보았다. 경도를 따라 나온 최기동도 그의 눈에 띄었다.
“최 국장님 호출이었나?”
최기동이 멀어지자 육 과장이 물었다.
“예.”
“인사문제?”
“예.”
“당분간 자네가 힘들겠군.”
“아닙니다.”
“조금만 고생하게. 시장님께서 자네 생각은 따로 하고 계신 모양이야.”
“저는 괜찮습니다. 아, 시장님이 찾으시던데 바로 가보십시오.”
“알겠네.”
육 과장의 손이 경도 어깨에 힘을 실어주었다.
‘육 과장님…….’
그의 관록궁에도 빛이 들어온다. 과장 보직에서는 따로 영전할 곳이 없다. 자치행정과가 넘버 쓰리 안에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서광은…….
‘승진…….’
감이 왔다.
인사팀으로 돌아온 경도가 공보담당관실의 송혜영을 불렀다.
“팀장님.”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공보실 일은 할 만해요?”
“너무 좋아요. 저 날마다 설렌다니까요.”
“진짜요?”
“제가 솔직히 무늬만 문인이잖아요? 신춘문예 당선되었지만 변변한 작품 하나 없어요. 그런데도 실장님부터 팀장님들이 작가라고 띄워주시니 실력은 허당인 주제에 대우받고 살아요.”
“신춘문예 아무나 당선하나요? 그거 공무원으로 치면 행정고시 합격급이라고요.”
“에이, 그건 너무 오버고요.”
“작품은 좀 썼어요?”
“몇 편 준비는 했는데 출판사들이 굉장히 깐깐하네요. 신인이라 그런지 투고를 해도 보지도 않는 거 같아요.”
“제가 삼류 출판사 하나 소개해드려요?”
“어머, 팀장님이 출판사도 아세요?”
“투케이는 좀 알죠.”
“진짜요? 요즘 그 출판사 완전 핫한데?”
“핫하기까지야.”
“진짜예요. 최고 메이저는 아니지만 문제작들 골라내는 안목이 있어서 메이저보다 더 인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원고 저한테 쏴보세요. 제가 출간검토는 한 번 밀어볼게요.”
“아니에요. 투케이에서 저 같은 생초짜 작가 원고를 봐줄 리 없어요.”
“검토는 된다니까요.”
“팀장님.”
“거기 대표가 제 형님이세요.”
“네?”
송혜영이 소스라쳤다. 경도의 형이 출판사 대표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팀장님…….”
“그건 그렇고 당장은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서요.”
“저한테요?”
“얼마 전에 폭행당한 직원들 알죠?”
“알죠. 조연숙은 저하고 같이 일한 적도 있어요. 굉장히 착한 아인데…….”
“시장님께서 특별히 케어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그래서 총리상과 대통령상을 상신하려 하는데 이게 공적조서가 중요하잖아요. 제가 초안 받아오면 문장 좀 다듬어주세요.”
“와아, 정말요?”
“그럼요. 새 시장님께서 그 직원들 치료비에 재판비용까지 다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십니다.”
“시장님 개멋지심.”
“…….”
“아무튼 그런 거라면 제가 신춘문예 응모작 탈고하듯이 제대로 한 번 보완해 볼게요. 맡겨만 주세요.”
“고마워요.”
“천만에요. 제 일처럼 신나는 걸요.”
송혜영은 진짜 좋아했다.
보라를 대동하고 폭행 피해가 큰 주무 주임 김선아부터 찾아갔다. 원래는 재은과 동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날 보라의 관록궁이 너무 유려했다. 관록궁 찰색이 좋으면 일진이 좋다. 시보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어필될 수도 있다.
그래서 보라와 함께 차에 올랐다.
김선아는 병가 중이었다. 폭행 자체의 상처는 1주일 만에 아물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충격은 아직도 여전했다. 직장이 무섭고 직원들 보기도 싫어졌다.
김선아는 좀 여린 사람이었다. 지방대를 나와 공무원이 되었고 다른 사회 경험은 없었다.
어릴 때 이웃에 주폭이 있었다. 걸핏하면 아내와 아이들을 때렸다. 김선아에게도 더러 행패를 부렸다. 학교를 갈 때도 올 때도 그 사람의 유무를 체크하느라 가슴을 졸였다. 보기만 해도 심장을 내려앉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성인이 되어도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렇기에 그날, 주폭이 후배 직원에게 행패를 부릴 때 선뜻 나서지 못했다. 너무 떨렸다. 남자직원들이 좀 나서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거들지 않았다. 급기야 후배에게 폭력이 들어왔다. 직속 선임이라는 책임감에 일어섰을 때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후배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여자 공무원 두 명.
교활하고 악랄한 주폭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힘으로도, 국민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의무에서도 두 여직원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폭의 폭력에 쓰러질 때 그녀의 두려움은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진짜 참담함은 주폭의 폭행이 아니었다. 직원들이었다. 후배와 함께 낙엽처럼 나뒹굴고 나서야 직원들이 다가왔다. 그것도 마지못해서였다.
주폭보다 직원들에 대한 실망이 뼈를 때렸다. 그러면서 뒷말들은 많았다.
그런 사람은 말이야.
이렇게 했어야지, 저렇게 했어야지. 때늦은 훈수의 홍수다. 발암과 다르지 않았다.
-여기가 내 평생직장이었나?
-이 사람들이 내 동료였나?
자괴감이 폭발하며 자존을 붕괴시켰다. 직원들에게서 정나미가 뚝뚝 떨어졌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데요?”
경도가 아파트 벨을 눌렀을 때 그녀의 노모가 대신 말을 전해왔다.
“죄송합니다. 새 시장님의 지시를 받고 왔다고 좀 전해주십시오.”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있다가 방금 전에 잠깐 눈을 붙였다 깨었어요.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지금은 시장이 와도 보고 싶지 않대요.”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노모의 말은 변하지 않았다.
인정.
위로가 늦었다.
“죄송하지만 좀 들어가도 될까요?”
“곤란해요.”
“그럼 여기서 김선아 주임님 피로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장기전 모드로 돌입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노모는 별 대꾸 없이 문을 닫아버렸다.
“신 주임.”
“네, 팀장님.”
“먼저 가.”
“네?”
“오래 걸릴 거 같네. 곧 퇴근 시간이잖아?”
“저는 괜찮습니다.”
“이건 내 업무야. 원래 출장은 2인 1조 원칙이라 신 주임에게 경험이 되라고 데리고 나온 거니까 이제 가도 돼.”
“…….”
“어서?”
“알겠습니다.”
그제야 보라가 돌아섰다.
경도는 부동자세를 취했다. 시장의 뜻을 전하러 온 사자였다. 기약이 없지만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했다.
30분쯤 지났다.
문은 요지부동인데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보라였다.
“왜 안 갔어?”
“죄송해요. 팀장님 두고는 못 가겠어요. 그리고 저 다리 튼튼해요.”
보라가 작은 생수병을 내밀었다. 착하게 웃으니 쫓아버릴 수도 없었다. 경도가 물을 마시는 동안 보라도 바른 자세로 섰다. 혼자보다 둘이 낫기는 했다.
30분이 더 지나자 또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남자였다.
“누구세요?”
집 앞으로 다가오더니 경도에게 물었다. 얼굴을 보니 김선아의 남편이었다. 부부는 묘한 유사성이 있으니 이미지나 찰색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청에서 왔습니다. 김선아 주임님 좀 뵈려고요.”
경도가 답하자 남편은 둘을 훑어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10분쯤 지나자 문이 열렸다. 김선아였다.
“인사팀장 오경도입니다.”
경도가 먼저 신분을 밝혔다.
“무슨 일이죠?”
“새 시장님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무슨 일로요?”
김선아는 표정이 없었다. 너무나 하얗게 상했으니 보는 경도 마음이 아팠다.
한 직원이 정상적인 업무를 보다가 불의의 사태를 만났다. 그녀의 잘못은 1도 없다.
“먼저 시장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경도가 고개를 숙일 때 보라가 기막힌 순발력을 보였다. 가방 속에서 수수한 꽃다발을 꺼낸 것이다. 경도는 생각지 못한 꽃다발이다. 아까 먼저 가라고 보냈을 때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새로 온 시보입니다.”
보라가 고개를 숙인다.
시보.
그게 김선아의 마음을 건드렸다. 건조하던 그녀의 얼굴에 감정이 맺힌 것이다.
그녀도 시보 때가 있었다. 공무원의 꿈을 이루었을 때, 너무 벅차 출근할 때마다 가방 속 공무원증이 자랑스럽던 날들…….
그 설렘의 초원을 지나 다다른 오늘이 만감을 교차하게 만든 것이다.
“여기요.”
고개를 떨군 채 꽃을 내민다. 기막힌 순발력이었다.
행동 하나마다 시보의 순수함과 어색함이 잘 나타난다. 뭘 해도 서툴러 보이는 게 시보다. 그 모습이 또 김선아의 마음에 어필이 되었다. 시보에게 연민을 느낀 것이다.
김선아가 꽃을 받았다. 가만히 코로 가져간다. 보라는 얼굴을 붉히며 얌전히 바라본다.
“시보라고?”
“네, 선배님. 신보라입니다.”
보라의 목소리는 공손하면서도 똘망했다. 그 신선함이 김선아의 표정에 생기를 깃들였다.
“들어오세요.”
김선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보라를 데려온 경도의 예지는 적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