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무원은 동네북이 아닙니다-1> (211/245)

관상만렙 공무원님 211화

69. 공무원은 동네북이 아닙니다-1

권 시장이 출근한 건 일주일 후였다. 출근하는 모습부터 선거 전과 달랐다. 그때는 인당과 명궁이 찬란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먹구름 뿐이었다.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팀장님, 시장님 호출인데요?”

오후가 되자 보라가 전화내용을 전달했다.

보라는 아직도 군기가 제대로 든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인사팀 행정시보 신보라입니다.”

전화 응대 요령도 모범적이다.

시장실 옆에는 시정 인수팀이 들어와 있다. 이창교가 유세를 떠는 것은 아니었다.

이창교 역시 번거로운 인수팀 설치를 반대했지만 그의 지지자들이 형식이라도 갖추자 하니 모양만 낸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경도가 시장실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간 떨리던 시장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 되었다.

“앉게.”

권 시장이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에는 해외여행 가이드북이 몇 권 보였고 여행회화 책도 두어 권 있었다.

“스킨스쿠버 해봤나?”

뜬금포 질문이 나왔다.

“못 해봤습니다.”

“나도 못 해봤네. 마음은 있었지만…….”

“…….”

“몰디브나 필리핀 쪽 보니까 스킨스쿠버 여행 갔다가 눌러앉은 사람들이 많더군.”

“여행 가시게요?”

“4년 만에 푹 쉬게 생겼네. 가서 몇 달 쉬었다 와야겠어.”

“…….”

“자네는 알고 있었나?”

책을 내려놓은 권 시장 목소리가 담담해졌다.

“선거 말씀입니까?”

멀리 돌아가지 않았다. 그건 4년간 모신 권 시장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관상에서도 내가 밀린 건가?”

“아닙니다.”

“아니다?”

“관상에서는 시장님이 우위였습니다. 그렇기에 시장으로서 이 당선자님을 거느리지 않았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였나?”

“그건 시장님이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내가?”

“…….”

“하긴 비서실장의 제안을 내쳤었야 했는데…….”

“…….”

“이 국장을 선거 파트너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네. 그런데 선거 중반에 격차가 좁혀지는 바람에 갈피를 잘못 잡았어. 그런 사람일 리 없는데 내가 잘못 봤던 건가 싶기도 했고.”

“…….”

“내가 다시 정치를 할 수 있겠나?”

“그건 지금 모릅니다. 시장님의 관상은 좋은 편이지만 기색이 많이 상했습니다. 대권상을 가졌다고 해도 기색이 상하면 관운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군.”

“그리고 죄송한데…….”

경도 시선이 여행가이드북으로 향했다.

“말해보게.”

“올해는 해외로 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먼 국내로도요.”

“관상인가?”

“이마의 변지 색이 굉장히 무겁습니다. 먼 곳으로 가면 좋지 않은 횡액을 당할 확률이 높습니다.”

“꼼짝없이 자중하며 살아야겠군?”

“…….”

“알았네, 가보게.”

권 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권 시장과의 독대의 마지막이었다.

그도 상세히 묻지 않았고 경도도 상세히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이미 승부가 난 시장선거였다. 이제 와서 시시콜콜 ‘만약’을 따지는 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었다.

새 당선자들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국회의원들은 국회로 입성하고 지방선거 당선자들은 기관장의 자리로 입성을 했다.

첫 번째 낭보는 김윤광에게서 나왔다. 그가 집권당의 원내총무가 된 것이다. 2선으로서는 사상 첫 손에 꼽히는 대파격이었다. 당내 다선 경쟁자들을 일방적으로 눌러버린 것이다.

<젊은 한국, 젊은 국회, 젊은 도약 기대>

언론의 논조도 우호적이었으니 김윤광은 급거 대권후보로까지 부각이 되었다.

이창교도 시장 취임을 했다. 그가 내세운 기치는 ‘일하는 시장’이었다.

전임 시장들이 하던 형식적인 의전은 모조리 생략했다. 9급부터 잔뼈가 굵었던 사람이니 그런 절차상의 피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작은 조직 안에 성행하던 반목과 대립부터 정비했다. 그 시작이 바로 인사발령과 파격 포상이었다.

“어떤가?”

인사안 구상을 마친 이 시장이 경도의 의사를 물었다. 그의 메모를 넘기던 경도 눈에 불벼락이 일었다.

“……!”

첫 직위부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치행정국장이었다.

그가 있던 자리였으니 당연히 공석이었다. 그 직전에 인사를 단행한 까닭에 후속 인사를 마치지 못한 것이다.

자치행정국장은 시군구의 넘버 투다. 부시장이나 부군수가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시장 다음과 다름없었다. 그런 자리다 보니 보통 시장의 복심이거나 시를 상징하는 행정통이 앉는 게 상례였다.

K시에서 이창교 시장의 복심이라면 조기룡 감사실장이나 육세창 자치행정과장이다.

둘 다 국장 승진할 연차가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둘 중 한 사람이 그 자리에 가는 게 옳았다. 경도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분위기도 거의 그쪽이었다.

그런데.

일대 반전이 나왔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경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그 자리에 적힌 것이다.

<엄낙기>

엄 과장이다.

경도의 시선은 그 이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현직 복지정책과장이다. 한때는 이 시장의 휘하에서 팀장을 했었다. 개뺀질이에 연줄이나 타려는 아부의 달인이었다.

물론 그 후로 일대 탈피에 성공했다. 경도가 볼 때 현재의 과장들 중에서는 손꼽히는 일꾼이었다.

그러나 과거가 있다. 국장 승진도 쉽지 않거니와 자치행정국장 자리는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적혔다.

‘시장님이 나를 시험하시는 건가?’

잠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최근 들어 엄낙기의 찰색은 초 상승세였다. 어쩌면 실세 과장보직을 받거나, 또 어쩌면 사업소장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지자체 공무원의 꽃으로 불리는 자치행정국장이다. 이건 경도조차 상상 못 한 일이었다.

“내가 너무 나갔나?”

경도의 의중을 짚어낸 이 시장이 빙그레 웃었다. 행정의 달인다운 미소다. 온화함 속에 묵직함이 깃들었으니 경도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복안이 있으시겠지요.”

“자네 관상은 어땠나?”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그러자고 자네를 부른 거야.”

“엄 과장님이 영전이나 승진운이기는 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얼마 전이 언제였나?”

“몇 달 되었습니다.”

“그럼 그 무렵이겠군. 계단참에서 봉변을 당하던…….”

“봉변이라고요?”

“내가 지역 기업가들과 간담회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이었네. 엘리베이터가 조금 전에 올라갔길래 간만에 운동도 할겸 계단으로 걸었지. 한참을 올라가는데 소란이 들리더군. 엄 과장과 민원인이었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 민원이 뭔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야. 아마도 직원을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은데 그걸 쫓아 나와 달래고 있더군.”

“…….”

“아주 진솔했네.”

“…….”

“솔직히 내가 아는 엄낙기는 그런 친구가 아니었지. 그 후로 공직관이 좋아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긴가민가했네. 그런 차에 심한 수모를 당하면서도 직원 변론을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더군.”

“…….”

“그때 생각했네. 선입견 따위를 이렇게 오래 가지고 있는 내가 나쁘구나. 저 정도 사명감에 부하직원들 챙기는 사람이라면 내가 짤리기 전에 국장 자리 한 번 추천해 봐야겠다고.”

“아…….”

“그걸 실행할 만한 자리에 올랐으니 마음속 약속을 지키려는 거네. 엄 과장에게도 보상이자 동기부여가 될 테고 다른 간부들에게도 동기부여가 되겠지. 노력하는 사람은 된다는 거 말이야.”

“시장님…….”

“다른 각도로 보면 엄 과장 인맥 범위가 장난이 아니지 않나? 이유야 어쨌든 다양한 모임과 무리를 섭렵하고 있으니 그 힘을 직원 화합에 쓰면 그만한 적임자도 드물고.”

“…….”

“내 생각이 틀렸을까?”

“…….”

“오 팀장.”

“아닙니다. 제가 말을 잊은 것은 시장님이 제 좁은 상상을 넘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인사가 될 것 같습니다.”

“자네가 인증한 걸세?”

“제가 감히 인증씩이나요? 이건 시장님의 관록이 인증한 겁니다. 9급에서 시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안목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인사는 언제나 어렵지. 뒷말도 많고. 나머지는 잘 검토해보고 특별하게 하자가 있는 사람은 내게 귀띔을 해주시게.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하니까 말이야.”

“지시 받들겠습니다.”

“또 하나가 있네.”

“말씀하십시오.”

“얼마 전에 공무원 폭행사건이 두 건 있었지?”

“예.”

“어떻게 처리되었나?”

이 시장은 진지했다.

복지업무로 생긴 건이니 경도도 잘 아는 사건이었다. 발단은 긴급생계비지원이었다.

교도소에서 복역한 사람이 출소하면 긴급생계비지원금을 신청하는 일이 생긴다. 국가의 지원이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용포읍에서 만난 진상들처럼 악의인적인 인간들도 많았다.

이 케이스도 비슷했다. 주취폭력전과자의 억지에 9급 2년 차 말단복지직이 농락당한 것이다. 경도도 CCTV 화면을 보았다. 사건이 굉장히 커진 탓이었다.

주취폭력 8범의 50대 초반 민원인이었다. 헐렁한 바지에 손을 넣고 사타구니를 긁어대며 여직원을 희롱했다.

다른 곳에서 이러면 난리가 나겠지만 공무원들은 당할 수밖에 없다. 정당한 공무집행을 해도 ‘철밥통 공무원’이 어쩌고 하며 비난을 받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차고 다니는 권총은 장식물이라는 말과 비슷했다. 총 잘못 쏘면 바로 옷을 벗는 것이다.

문제는 은행 통장이었다.

여직원은 그가 적어준 계좌로 지원금을 연결해 주었다. 진상의 실수였다. 그는 통장이 두 개였으니 압류가 가능한 번호를 적어준 것이다.

부채가 많다 보니 압류가 진행 중이었다. 그걸 여직원 실수로 몰았다.

“X발, 그런 게 있으면 미리미리 알려줬어야지?”

누런 이빨에 술냄새까지 풍기며 눈을 부라리니 여직원이 겁에 질렸다.

“죄송합니다.”

예의상 한 말이 빌미가 되었다.

“죄송하지? 그러니까 니 잘못이잖아? 아, 놔. 이런 것들이 공무원이라고 자리 차지하고 앉았으니 나라가 잘 될 꼴이 있나? 그 돈 어떡할 거야?”

진상은 기가 살았다.

“다른 계좌를 알려주시면…….”

“그럼 압류당한 돈은? 나 보고 땅 파먹고 살라고?”

“그건…….”

“까지 말고 책임져. 책임지라고. 나 당장 밥 굶게 생겼어.”

진상은 민원대 너머로 손을 뻗어 여직원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악.”

여직원이 비명을 지르니 그제야 주무 주임이 말리게 되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진정하세요.”

“넌 또 뭐야? X발아.”

기고만장한 진상이 주무 주임까지 잡아챘다.

“왜 이래요?”

그 팔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진상을 밀쳤고 그 여파로 주무주임과 여직원도 쓰러졌다.

“뭐야? 공무원들이 사람 치네? 아이고…….”

진상은 그 자리에서 뒹굴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직원들에게 있었다.

진상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여직원이 벽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다. 심리적인 충격까지 겹친 여직원은 기절하고 말았다.

119가 출동하고 경찰도 왔다.

문제는 여전히 진상 쪽이었다. 법에 빠삭한 악질이었다. 공무원들의 약점을, 아니, 두 여직원이 자기를 폭행했다고 선제 고소를 해버린 것이다.

그런 다음 병원에 가서 누워버렸다.

여직원과 주임은 졸지에 폭행 공무원이 되어 버렸다. 닥치고 당했어야 했는데 저항한 게 죄가 되었다. 두 여직원은 충격을 받아 병가에 들어갔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지 못했다. 공권력의 민낯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그 해결은 오롯이 공무원 개인의 문제였다. 조직에서도 구명하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 한 건도 비슷했다. 조건 미비로 인허가가 나지 않자 담당자를 집요하게 갈구던 민원인이 담당 공무원의 머리를 후려쳤다.

더 맞지 않으려고 몸으로 밀었더니 민원인의 발이 의자에 걸리며 쓰러졌다. 발목이 부러졌다며 2주 진단을 받아 고소를 해왔다.

그 또한 공무원 폭행이 되었다. 공무집행 방해는 차치하고 먼저 맞은 공무원을 위한 법조차 없었다.

더 속을 상하게 만든 건 동료직원들이었다. 옆 책상에 있으면서도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누구 하나 폭력 민원을 제지하지 않은 것이다.

“두 케이스 다 법원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경도가 상황을 보고했다.

“연루된 직원이 셋이지?”

“예.”

“평소 근무태도는?”

“셋 다 무난합니다.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요.”

“이번에 대통령상에 국무총리상 내려온 거 있다고 들었네.”

“예.”

“그 세 사람, 특별한 하자 없으면 상 상신하게.”

“예?”

“육 과장에게는 치료비는 물론이고 소송비용까지 일체 지원하도록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할 생각이네.”

“시장님.”

“우리 직원들일세. 다른 건 몰라도 민원인들의 폭행은 막아줘야지. 아니면 진상 민원인 만나면 맞아 죽으란 말인가?”

“…….”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세 사람 공적 만들어서 상 받게 하게. 국무총리상 이상이면 특진 가능하니까 특진도 준비하고.”

“시장님.”

“그리고 당시 현장에서 방관한 직속 팀장하고 과장들 말이야, 내 재임 기간 동안 승진이나 상은 없네. 고생 제대로 할 만한 부서로 좌천시키게. 자기 직원이 코앞에서 수난을 겪는데 부서장이라는 사람들이 말리지도 않아? 다른 부서장들의 본보기를 위해서도 용납 못 하네. 만약 조금이라도 반발하면 명예퇴직 1순위로 올려서 퇴직시키게나.”

이창교 시장.

심쿵하도록 시원한 사이다 지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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