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복한 순간들-1> (209/245)

관상만렙 공무원님 209화

67. 행복한 순간들-1

출구조사결과가 나왔다.

경도의 관심은 김윤광과 백지애였다.

“먼저 종로구입니다.”

특집선거방송의 앵커들이 출구조사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종로가 먼저인 것은 대한민국 정치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김윤광 52%, 이서복 24%, 김윤광 후보의 압승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우.”

개표인단 사이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예상에 불과하지만 더블 스코어였다.

이서복이 누군가?

한때는 대권후보의 선두를 달릴 만큼 거물이었다. 그는 불운했다. 차라리 상대 당의 초거물과 붙어서 졌더라면 이유라도 되었다. 하필이면 정치 초짜와 붙어 패했던 지난 선거였다.

덕분에 그의 대권도전 로드맵은 배배 꼬여버렸다. 4년간 정지된 것이다.

이번에는 절치부심이었다. 반드시 패배를 갚아주고 다음 대권을 노리려던 이서복.

그러나 출구조사의 결과로는 대권도전이 아니라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전체적으로는 김윤광이 이끈 여당이 52% 대 36%로 유리하게 나왔다. 이대로 가면 비례대표로 나온 백지애도 무난하게 당선권이었다.

화면에 김윤광이 나왔다. 선대위 공동위원장으로서 소회를 밝히는 것이다. 얼굴 전체에 광채가 난다. 저 기세라면 대선에 나가도 당선각이었다.

K시 투표함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저만치 권태술이 보였다. 아까도 스쳤지만 태술은 경도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한쪽에는 기자단이 와 있다. 조경철과 양왈종 등이 보였다. 지난번에는 종로 취재를 갔었던 조경철이었다. 이번에는 김윤광의 신승이 예상되자 K시 개표장으로 온 것이다.

‘파이팅.’

그가 엄지척을 날려준다. 경도 역시 엄지척으로 답을 보냈다.

[한 표 한 표 잘 개표해주세요.]

문자를 생각하며 개표관리에 돌입했다. 두나가 보낸 것이었다.

개표가 끝나면 내일은 대체휴일이다. 눈을 조금 붙인 후에 어머니에게 가기로 했다. 두나에게 시골집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경규네 부부도 동참이다. 지난번에 못한 가족뭉치기의 재도전이었다. 어머니는 좋아 밤잠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지역구 의원표 개표가 우선이다.

초반에 밀리던 여당의 대표가 중반 이후에 뚝심으로 따라붙었다. 그는 김윤광의 추천을 받은 벤처기업가였다.

결국 야당 대표를 2,000여 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도지사에 이어 교육감 표가 열리고 마침내 시장투표함이 테이블 위에 쏟아졌다.

개표함 도착순으로 하다 보니 용포읍 표가 먼저였다. 권우일의 표밭이다. 결과는 반전이었다. 이창교의 몰표가 나온 것이다.

강변면과 동천면에서 권우일의 선전이 엿보였지만 나머지는 모두 참패였다. 절반을 까기도 전에 이창교의 당선은 확정적이었다.

‘축하합니다.’

마음속으로 이창교에게 축하를 보내고 묵묵하게 개표를 끝냈다. 권우일이 2등, 홍상선이 3등, 박태병 후보는 4위를 차지했다.

“오 박사.”

조경철이 다가왔다. 과격하게 경도를 포옹한다. 이창교의 당선에는 경도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모함의 칼을 맞았을 때 경도가 바로 잡지 않았더라면 이창교는 지금쯤 어느 골방에서 소주를 들이키는 신세였을 지도 몰랐다.

“이 당선자님 진영에 가보셔야죠?”

“같이 안 가?”

“제가 가면 줄 서는 각이잖습니까?”

“선거 끝났는데 뭘.”

“지킬 건 지켜야죠. 잘 다녀오세요. 기사도 잘 써주시고요.”

경도가 선을 긋는다.

“사람…… 그럼 나중에 보자고.”

조경철은 경도 등을 두드려주고 멀어졌다.

그때 권태술이 경도 곁을 지나갔다. 경도가 슬쩍 그 팔을 잡았다.

“나한테 할 말 없냐?”

경도가 물었다.

“없는데?”

대답하는 태술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있을 거 같은데?”

“…….”

“자판커피나 한 잔 하자.”

태술을 밖으로 끌었다.

“나 얼마 있다 결혼한다.”

작은 벤치에서 경도가 말했다.

“소문은 들었다.”

“올 거냐?”

“…….”

“이제 말해봐라. 어두우니까 관상도 잘 안 보이고…… 관상도 하도 보다 보니 가끔은 직접 듣는 게 좋더라.”

“공세은 씨 말이지?”

“뭐든.”

“나는 이럴 줄 알았다.”

“뭐가?”

“너 말이야. 너라면 어떤 음모도 잡아낼 테니까.”

“푸훕, 내가 무슨 신이냐?”

“임 실장님 말이야, 그런 눈치가 보이더라. 믿을지 모르지만 나는 반대였어.”

“……?”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나보고 빠지라더라. 그때 너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내 입장이 좀 그랬다.”

“왔으면 좋았을 걸.” 

경도 시선은 하늘에 있었다. 오늘따라 별이 밝았다.

“이 국장님이 출마 선언을 하자 임 실장님이 라인 가동에 들어갔어. 나도 물론 거기 끼었다. 이 국장님 약점 찾기의 선봉장이었지.”

“…….”

“이 후보님 참 대단하데. 하다못해 출퇴근 비리도 거의 없어. 유일한 비리가 자살한 부하 쪽이었는데 경찰 수사로 깨끗해졌고…… 몇 가지 잡아낸 게 고작 근무 중에 직원 경조사에 잠깐 참석하고 돌아온 거, 아침에 지각 두 번 한 거, 투서도 농땡이파나 무능파 직원들 꾸짖어서 보복성으로 들어온 익명…….”

“…….”

“그 와중에 그 사진이 나왔으니 임 실장님이 눈 뒤집힐 만도 했지. 내가 봐도 그럴듯하게 포장했고.”

“…….”

“그래도 대세라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네. 이 국장님이 그렇게 기사회생을 하시다니…….”

“…….”

“넌 알고 있었지? 이 국장님이 당선되실 거?”

“지금 알았다.”

“……?”

“권 시장님, 그런 악수를 두지 않았더라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 거야.”

“듣자니 시장님도 처음에는 반대했다더라.”

“그래?”

“다 운명이지 뭐. 결국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되는 거 아니냐?”

“결과만 보면 그렇지.”

“나 이제 어디로 날아갈 거 갔냐? 짤리는 건 아니겠지?”

“어디로 가고 싶은데?”

“글쎄, 용포읍에나 다시 가면 좋은데 거긴 이제 아무나 가는 데도 아니고…….”

“여행갈 생각이냐?”

경도 눈에 태술의 이마가 들어왔다.

“며칠 연가 내서 좀 쉬려고. 어쨌든 공범인데 고개 들고 다니겠냐?”

“여행은 가지마라.”

“왜?”

“시장님, 비서실장님, 다 며칠 쉬시겠지. 그 틈에 같이 쉬면 같은 무늬라는 거 강조하는 건데 그럴 필요 있냐?”

“오 팀장.”

“너는 사진 악용하는 거 반대했다며? 이 당선자님은 이해하실 거다. 당장은 조치가 되겠지만 시간 지나면 풀릴 거야. 그분 그렇게 쫌팽이 아니거든.”

“그일 때문에 사퇴하라는 압박까지 받았는데도?”

“내 생각은 그래. 개표종사로 내일 하루는 쉴 수 있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오 팀장.”

“모레 시청에서 보자.”

경도가 일어섰다.

조금은 어색하다.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두 시에 잠들어 6시에 일어났다. 원래는 8시까지 잔다는 게 모닝콜 끄는 걸 잊었다.

별로 피곤하지 않으니 하루를 시작했다. 동이 트는 하늘을 보며 쌀알을 골랐다. 고르다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두나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그녀가 자고 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경도의 관상을 좋아했다.

왜 아닐까?

그녀의 인생을 구해준 것이 바로 관상이었다.

이것 저것 관심이 많으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누군가 내가 잘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다. 하물며 사랑하는 여자라면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니 그녀는 아직 한밤이었다.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그 작은 배려만으로도 가슴이 콩당거린다. 사랑은 아무래도 주체하기 어려운 설렘 같았다.

그녀를 두고 쌀알을 고르다 들켜버렸다. 어찌나 집중을 했던지 그녀가 깨어난 걸 몰랐다.

그녀도 대단했다. 경도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턱을 괴고 감상한 것이다.

“봤어?”

경도가 물었다.

쌀알 고르는 남자.

그녀의 느낌은 어땠을까?

“신선 같았어요.”

그녀의 대답이었다.

“짝퉁 신선?”

“아뇨, 찐 신선.”

그녀가 다가왔다.

“뭐하신 거예요?”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관상 공부.”

“쌀은 공부하고 버리는 건가요?”

“아니, 먹어야지. 아까운 걸 왜 버려?”

“그럼 저 좋을 쌀로 한 그릇만 골라주세요.”

“왜?”

“선생님 밥해드리게요.”

그 아침 두나의 미소는 윤기나는 쌀알처럼 감미로웠다.

하지만.

밥은 반전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식으로 한다며 도전한 것이 태워버린 것이다. 경도의 주방기구가 변변치 않은 탓이었다.

사랑은 이렇게 여러 가지 사연으로 쌓여간다.

관상수련을 마치고 문자를 넣었다.

[나 일어났어.]

[벌써요? 더 자요. 피곤할 텐데.]

[늘 일어나던 시간이라 괜찮아.]

[그럼 지금 갈까요?]

[아니, 서울에서 만나. 좀 들를 데가 있어.]

경도 문자가 날아갔다. 두나는 현재 서울에 산다. 병원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었다. 경도가 서울로 가려는 건 김윤광과 백지애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꽃다발은 전해주고 싶었다.

가는 길에 하나를 더 샀다. 이창교의 몫이었다.

이른 아침이다 보니 이창교의 아파트는 조용했다. 손잡이에 꽃다발을 걸어두었다.

어젯밤 일찍 잠들었을 리가 없다. 앞으로 시청에서 지긋지긋(?)하게 볼 테니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창교였다.

“오 팀장, 어디야?”

불꽃 호통이 나온다.

“저…….”

“우리 아파트 근처지? 무조건 들어와.”

“국, 아니, 시장님…….”

“내가 신문 때문에 문을 열었더니 자네 꽃다발이 있더라고.”

“알겠습니다.”

별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 팀장님.”

문이 열리자 사모님이 반색을 했다.

“사람이 왜 그래?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이창교의 호통이 이어졌다.

“주무실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잠이 대순가? 자네가 왔는데…… 당신은 차 좀 내와요.”

사모님까지 몰아붙이더니 경도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시장이 되었어. 고맙네.”

그의 치사가 나왔다.

“마지막에 내린 현명한 판단 때문입니다.”

“그 판단의 계기를 만든 게 누군데?”

“사모님이죠.”

사모님에게 공을 돌렸다.

“그것조차 자네 덕분일세. 저 사람이 자네 말 듣고 간이 떨리는데 그냥 들어가서는 내가 안 나올 것 같더라는 거야. 머리 속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없는데 문득 자네가 들려준 대선 에피소드가 떠오르더라나? 김윤광 의원님에게 상괘를 주어서 그분이 대통령께 물벼락을 씌운 것 말이야.”

“사모님의 순발력도 굉장했습니다.”

“고맙고 미안하네.”

“뭐가 말이죠?”

“자네 덕분에 시장이 되었지만 해줄 게 없잖나? 마음 같아서는 취임과 동시에 국장 자리라도 주고 싶지만 가만 보니 최소 승진연한 때문에 시장도 별 뾰족수가 없더라고.”

“저보다 챙길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말 할 줄 알았네. 자네 심성에 오죽하겠나?”

“저 김윤광 의원님께 들릴 예정입니다.”

“오늘 연가인가?”

“어제 개표조에 들어서요, 오늘은 대체휴일입니다.”

“가면 내 인사도 전해주시게. 근간 뵈러 가겠다고도.”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그래. 천신만고 끝에 당선된 거라서 그런지 용포읍에서 듣던 영전소리보다는 좀 낫군.”

“그 기세로 시의 발전을 도모하셔서 3선 끝내시고 국회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당장은 현안이 발등의 불일세. 자네도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할 거야. 내가 두고두고 굴려먹을 거니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왔다. 두나가 차에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들렀겠지만 꽃만 두고 가려다 보니 차에 두고 왔던 윤도였다.

백지애의 집에 먼저 들렀다. 꽃다발이 지천이었다.

“오 박사님께 큰 절이라도 하고 싶어요.”

경도의 꽃을 받아든 백지애의 소감이었다.

“절은 제가 해야죠. 이제 국회입성 아닙니까?”

경도는 티내지 않았다. 관상은 관상일 뿐이다. 김윤광이나 백지애는 그렇지 않지만 많은 사람은 상괘를 잊는다. 그건 관상가의 운명이었다.

“결혼식날 뵈어요.”

백지애가 웃었다.

그길로 나와 김윤광의 자택으로 향했다. 거긴 사람이 인산인해였다. 김윤광의 공천으로 당선된 초선의원들이 몰려온 것이다.

사무장을 비롯해 보좌관 예정자들에 지지자들까지 몰렸으니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

또 두나를 두고 혼자 걸었다.

“거기 뭡니까?”

문 앞의 자원봉사자들이 경도를 막아섰다.

“김 의원님 좀 뵈러 왔는데요?”

“어느 지역구세요?”

“그냥 좀 아는 사람입니다.”

“지지자시군요. 보시다시피 사람이 이렇게 많이 오셨습니다. 죄송하지만 꽃바구니는 저희가 접수해 드리겠습니다.”

봉사자가 말했다.

“그러세요.”

기꺼이 안내에 따랐다. 김윤광은 당선되었다. 이제 그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현재 눈에 보이는 의원들만 해도 20여 명이었다. 공연히 짐이 될 필요 없으니 성의표시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경도 선생님?”

꽃바구니를 접수장에 기록하던 봉사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바로 사람을 들여보내니 김윤광이 뛰어나왔다.

“오 박사님.”

다짜고짜 경도를 끌어안는다.

“당선 축하드립니다.”

“그야 고맙지만 꽃만 몰래 주고 가시려고요?”

“제가 올 줄 아셨습니까?”

“백 의원이 전화했더라고요. 그래서 지시를 내려두었죠. 들어가세요.”

“아닙니다. 의원님께 방해가 되기 싫습니다.”

“시청에 가야 합니까?”

“오늘은 대체휴일이라 쉽니다. 결혼할 사람과 시골 집에 내려가던 중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분은 어디 있죠?”

“차는 골목 앞에 두었습니다. 더 들어올 수가 없어서요.”

“저런, 제가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냥은 못 갑니다. 3분만 내주세요.”

김윤광이 경도를 끌었다. 3분이라 하니 사양할 수도 없었다.

“의원님들.”

안으로 들어선 김윤광이 초선 당선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 안은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여러분의 공천과 우리 당의 승리에 숨은 공신 오경도 박사님입니다. 여러분의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오셨으니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김윤광.

경도를 축제의 중심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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