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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함은 용서 못 해요-4 (208/245)

관상만렙 공무원님 208화

66. 모함은 용서 못 해요-4

“성추행범은 사퇴하라.”

“갑질 후보 사퇴하라.”

시민회관이 가까워지자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권우일과 홍상선 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어쨌든 이창교에게는 고문이 될 소리였다.

경도가 차에서 내렸다. 회견장소는 소강당이다. 다시 이창교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미치겠군.’

몸은 이미 땀으로 젖었다. 기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회견이 시작된 것도 같았다. 이번에는 사모님 전화번호를 누른다. 그 또한 받지 않는다.

‘엇?’

저만치 소강당이 보일 때였다. 조카와 지인들 틈에서 눈물을 곱씹는 사모님이 보였다.

“사모님.”

인파를 헤치고 경도가 다가섰다.

“오 박사님?”

“이 후보님은요?”

“안에…….”

사모님이 문 안을 가리켰다.

안은 북새통이었다. 기자들과 시민들을 합쳐 100여 명은 될 것 같았다.

이창교는 연단으로 걷고 있었다. 어깨가 늘어졌다. 걸음에도 당당함이 사라졌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뒤태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잠깐만요.”

사모님을 끌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제 말 들으세요.”

한적한 곳에서 속사포처럼 요점을 난사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음해가 풀렸다고요?”

“네, 그러니 당장 후보님 모시고 나오세요.”

“늦었어요. 후보님은 이미 마음의 결단을 내렸어요.”

“아직 안 늦었습니다. 사퇴회견이 끝난 게 아니잖습니까?”

“후보님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정치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그 세계에 환멸을 느꼈거든요.”

“받아들일 겁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오 박사님이요?”

“관상입니다. 그러면 되었습니까?”

“오 박사님.”

사모님이 경도를 바라보는 사이에 장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이창교 후보자의 긴급 기자회견이 있겠습니다.”

“어서요. 후보님이 받아들이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잠깐만 모시고 나오세요. 제가 현직 공무원이라 이런 일로 대중 앞에 나서기 곤란합니다.”

“오 박사님.”

“부탁합니다. 이대로 끝나면 이 후보님은 운신하시기 힘듭니다.”

“알았어요.”

경도의 지시를 받은 사모님이 여자화장실로 뛰었다.

“사모님.”

왜 여기서 화장실을?

미치겠군.

경도 숨이 넘어간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다시 나온 사모님은 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 안으로 뛰었다.

“잠깐만요.”

“……?”

사퇴 회견을 하려던 이창교가 놀라 돌아보았다.

“여보.”

“미안해요. 나 좀 잠깐만 도와주세요.”

사모님이 이창교를 끌었다. 이창교가 보니 사모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밖으로 끌려나가며 기자들의 양해를 구했다.

“무슨 일이오?”

“아무 소리 말고 잠깐만요.”

복도로 나온 사모님은 이창교를 빈 전시실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런 다음 그 문을 지켰다.

“오 박사.”

안으로 들어선 이창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셨군요.”

경도가 비로소 숨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이것부터 보시죠.”

경도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총선과 지방선거가 달아오르면서 곳곳에서 도를 넘는 네거티브 공세가 연출되면서 공명선거에 재를 뿌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K시에서 자행된 음해와 모략의 전모를 통해 후보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화면 보시죠.

앵커의 멘트와 함께 K시 시장 토론회 장면이 나왔다. 후보자들의 면면이 비춰지더니 권우일의 폭로 장면이 이어진다.

-수도권 시장후보 토론회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현직 시장인 A 후보가 전직 국장인 B 후보의 여직원 성추행을 폭로하면서 박빙이던 승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었습니다.

화면에 문제의 사진이 보인다. 모자이크가 되었지만 포옹 비슷한 분위기까지 가리지는 않았다.

“가보겠네.”

상처를 긁힌 듯 이창교가 돌아섰다. 경도가 그 팔을 잡았다.

“요점이 안 나왔습니다.”

경도가 이창교의 눈에 핸드폰을 고정 시켰다. 앵커의 멘트가 이어졌다.

-A 후보로서는 회심의 한 방이었지만 이는 A 후보 진영의 사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입수한 여직원의 직접 증언을 들어보시겠습니다.

“……?”

초점 없던 이창교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영상이 나왔다.

역시 모자이크가 된 공세은이었다.

-업무상 고충에 대해 호소하던 자리였어요. ○○님이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바람에 제가 감정을 못 이겨 흐느끼다 보니 토닥여주신 건데…… 제가 저지른 업무상의 실수 무마를 빌미로 A 후보 진영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어요. 성적 접촉 시도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하면 그 과오를 묻지 않고 승진 때 배려를 해주겠다는…….

“……?”

이창교의 시선이 경도에게 돌아왔다. 앵커가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우리는 지역과 시민에게 꿈과 희망을 줄 후보를 뽑자는 것이지 진실을 왜곡해 상대를 음해하는 모략꾼을 뽑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각 당의 선대위는 당선이 능사가 아니라 민주적인 절차와 정당한 정책대결이 우선되는 풍토를 만들어주기를 국민의 이름으로 요청합니다.

“후보님.”

“오 박사…….”

“방금 보신 뉴스는 이 방송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다시보기가 있습니다. 소강당 자료실에 영상기기가 있으니 그걸 사용하세요.”

“오 박사.”

“가세요. 여기서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

“뭐 하십니까? 당선되셔서 저 여직원하고 저 지켜주셔야지요.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시면 저도 저 여직원도 사표 내야 합니다.”

“사표?”

“아닐 것 같습니까?”

“그건 안 되지.”

이창교의 눈매에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창가의 작은 세면기에서 얼굴을 적신 이창교가 문을 향해 걸었다. 문이 열리자 사모님이 보였다.

그 어깨를 토닥인 이창교가 소강당실에 들어섰다.

“이제 회견하시는 겁니까?”

“혹시 사퇴 발표입니까?”

몇몇 기자들이 물었다. 그들은 소강당 안에 있는 바람에 뉴스를 보지 못한 것이다.

“회견 전에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창교가 직원을 불렀다. 그가 영상기기를 연결해주었다. 뉴스 다시보기였다.

경도가 보여준 그 뉴스가 나왔다.

“뭐야?”

기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처음에는 분명 후보사퇴각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살짝 변한 것이다. 화면은 마침내 클라이맥스로 넘어갔다.

그때 한 기자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

그가 소스라쳤다. 화면에 마침 그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공세은의 양심선언이었다.

<업무상 고충에 대해 호소하던 자리였어요. ○○님이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바람에 제가 감정에 못 이겨 흐느낄 때 토닥여주신 건데…… 제가 저지른 업무상의 실수 무마를 빌미로 A대표 진영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어요. 성적 접촉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하면 그 과오를 묻지 않고 승진 때 배려를 해주겠다는…….>

이창교가 직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화면은 거기서 멈췄다.

“기자회견 시작합니다.”

이창교가 작은 단상 앞으로 나섰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시선도 반듯했다. 삶은 배추처럼 늘어져 있던 이창교의 사무장과 선거운동원이 바로 서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K시 시민여러분.”

이창교의 기세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처 받은 호랑이가 아니었다. 눈빛부터 펄떡이는 것이다.

“저는 선거가 처음입니다. 평생 K시의 공무원 외에 해본 일이 없습니다. 해서 그 작은 능력이나마 시민여러분을 위해 쓰고자 시장선거에 나왔습니다. 그러다 모략의 창을 맞았습니다. 거의 절명할 뻔 했지만 신은 제 편이었습니다. 참담한 오해는 기가 막혔지만 비 온 후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제가 더 강한 모습의 시장후보가 되라는 채찍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불미스러움을 털고 공명정대한 승부의 장에서 분투합니다. 누구의 소행인지 왜 그랬는지조차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시민의 이름으로 요청하거니와 이런 치졸한 네거티브가 아니라 시의 정책과 비전으로 겨루어 그 열매가 우리 시와 시민들에게 돌아가는 선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와아아!”

이창교의 회견은 짧고 굵었다. 발언이 끝나자 운동원들과 지지자들이 목청껏 함성을 질렀다.

“이창교.”

“이창교.”

연호가 천둥을 울린다. 기세는 바로 밖의 경쟁 후보 지지자들에게 뻗어갔으니 뉴스를 확인한 그들도 아연 질색할 뿐이었다.

이 밤에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이창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권우일의 사저로 몰려가 시위를 벌인 것이다.

“협잡꾼 시장후보는 물러가라.”

“권우일은 사퇴하라.”

사퇴요구와 비난은 점점 더 거세졌다.

거실의 권우일은 비서실장과 함께였다. 비서실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작품이었다. 여직원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니 제대로 먹힌 것으로 알았다.

사실 권우일은 이 패를 꺼내기를 망설였다. 그 정도로 악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서실장이 자체 여론조사를 들이대고 주변인들이 입을 모으니 귀가 쏠렸다.

여론조사는 박빙이었다. 출마 초반에는 10% 가까운 격차였지만 중반으로 오면서 엎치락뒤치락이 되었다.

심지어 네 번의 자체 여론 조사 중에 한 번은 3.5% 차이로 역전까지 당했다.

이 지표는 비서실장의 조작이었다. 이때도 1% 내외의 경합이었지만 권우일의 허락을 따내기 위해 지표를 바꾸어 놓았던 것.

‘끙.’

난감했다.

시청률이라고 볼 수도 없는 지역방송에서 비리를 제시하고 전국구 지상파에서 ‘음모 선거의 샘플’로 오지게 얻어맞은 것이다. 잽을 날리고 카운터를 얻어맞은 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도약하기 위해 ‘카더라’ 포화를 퍼붓던 홍상선도 된서리를 맞았다. 초반에 보이던 1강 2중 1약의 판세로 돌아갔지만 사람이 바뀌었다.

이창교>권우일>홍상선>박태병.

이창교가 선두에 등극한 것이다.

방송 덕이 컸다.

그 이튿날부터 이틀 동안 네거티브 사례를 모아 특집을 만든 것이다. 어디든 이창교의 사례가 샘플로 나왔다. 덕분에 가라앉았던 지지율이 제대로 회복되었다.

마지막 여론조사가 나왔다.

김윤광 47%

이서복 34%

종로의 김윤광은 넘사벽이 되고 있었다. 이서복은 이 리턴매치로 정치 재기를 바랐지만 자칫 은퇴전이 될 판이었다.

깨끗한 청년정치.

이게 제대로 먹혔다. 70대 쉰꼰대 정치에 질린 국민들이었다. 비전을 제시할 능력은 전무하고 그저 포퓰리즘 경쟁으로 퍼주기를 즐기던 쉰꼰대들의 시대에 종말을 고한 것이니 이대로 가면 수도권에서만 90여 석을 휩쓸 판이었다.

이창교 36%

권우일 27%

홍상선 21%

박태병 8%

K시의 시장선거도 윤곽이 드러났다. 이창교의 부활은 확실했다.

사전투표와 함께 전국을 들썩거린 선거운동 마감도 코앞이었다.

경도는 개표반장으로 개표현장에 투입되었다.

시보 보라도 투표장에 투입이 되었다. 총선과 지방선거에 교육감 선거까지 겹치니 열외가 되는 직원이 드물었다.

“떨려요.”

투표를 하루 앞두고 보라가 소감을 밝혔다.

“이거.”

경도가 내민 건 비타민 음료 세 병이었다.

“투표장에 5시까지 오라고 했지? 부득이 10-20분 정도 늦는 건 괜찮아. 하지만 새벽에 일어나 움직이다 보면 피로가 장난 아닐 거야. 입맛도 없을 테니 간간히 마셔.”

경험자의 경험은 이렇게 빛나는 것이다.

나 때는 4시에 나갔다. 5시면 한낮이지, 라며 ‘라떼’ 꼴갑은 떨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팀장님.”

보라의 밝은 대답이 경도의 보람이 되었다.

퇴근 직전 엄낙기가 경도를 찾아왔다.

“오 박사, 잠깐 시간 좀 되시나?”

그를 따라 계단참으로 나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선거전이 끝났네?”

“예.”

“공세은 사건, 자네였지?”

“…….”

“대답 안 해도 괜찮아. 나도 선거기간이라 묻지 않았네.”

“…….”

“나도 좀 곤란했어. 권 시장 측근의 포섭이 들어오고 홍상선 후보도 옛정을 내세워 지지 호소, 게다가 이 후보는 내가 모시던 과장님 아니었나?”

“…….”

“그래서 닥치고 자중했지. 우리 마누라님도 그냥 업무에나 충실하라고 하더라고.”

“잘 하셨습니다.”

“이제 다 끝났으니 묻네만 이번 시장님은 이창교 후보님이신가?”

“지지율에서 가장 유리하시더군요.”

경도가 에둘러 답했다.

“아이고, 엄낙기 말년에 제대로 굴러야겠군. 아무래도 나는 그분에게 잘 보인 편은 아니지?”

엄낙기가 엄살을 떨었다. 일부는 사실이었다. 용포읍에서 일할 때 엄낙기는 이창교에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현재의 엄낙기는 과거의 그 사람이 아니지만 이창교의 신뢰가 약한 건 사실이었다. 엄낙기 개인으로 본다면 이창교의 당선이 가장 껄끄러울 수 있었다.

그런데.

“……?”

경도의 관상안 레이더에 들어온 엄낙기의 기색은 완전한 반전이었다.

저녁 노을을 등진 그의 이마에 아침 해가 솟고 있었다. 그 햇살은 명궁과 인당에 떠서 천창으로 퍼진다.

혹시 몰라 눈썹과 귀를 본다. 눈썹이 맑다. 귓바퀴까지 눈이 부시니 닥치고 승진각이 아닐 수 없었다.

“과장님.”

“응?”

엄낙기가 답하자 경도가 정중한 예의를 갖추었다.

“갑자기 왜 이래?”

엄낙기가 쑥스러워한다. 경도는 환한 미소를 남기고 인사팀으로 돌아갔다.

“사람 싱겁긴…….”

혼자 중얼거리던 엄낙기, 한 발 늦게야 띵한 예감에 사로잡혀 몸을 휘청거렸다.

‘설마?’

진짜 설마였다.

권 시장도 아니고 이창교가 당선될 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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