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196화
62. 이 국장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1
금요일 퇴근 무렵에 이해인이 나타났다. 책상에 남은 개인물품을 가지러 온 것이다. 주먹 만한 선글라스로 실드를 쳤지만 화려한 옷차림은 여전했다.
“신세 많았어요.”
짐 박스를 챙기고 경도에게 인사를 한다. 기가 죽을 만도 하건만 그런 목소리도 아니었다.
“재은 씨, 득렬 씨, 나중에 봐요.”
팀원들에게 인사도 잊지 않는다.
강심장이다.
아니면 참 대책 없는 여자든지.
이런 경우라면 대개 친한 지인을 물색해 택배를 부탁한다. 그런데 당당하게 직접 등장한 것이다.
선글라스 주변의 찰색은 엉망이었다. 반성이라도 하면 미래의 관상이라도 봐주려만 짐만 챙겨들고 돌아서니 어쩔 수가 없었다.
“와, 찐 철판.”
재은이 몸서리를 친다.
영문을 모르는 보라만 분위기 살피느라 바쁠 뿐이다.
“신 주임.”
경도가 그녀를 불렀다.
“네, 팀장님.”
보라가 경도에게 다가왔다.
“방금 그 분은 신 주임 전에 근무하던 선배야.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직을 떠나게 되었고.”
“네.”
“인사기획안은?”
“…….”
“아직이야? 하루 더 줄까?”
“아뇨. 다 하기는 했는데…….”
“자신이 없어?”
“네.”
“가져와봐.”
경도가 지시를 내렸다.
“여기 있습니다.”
출력된 인사기획안은 다섯 개였다. 경도의 오더였다. 시보에게도 업무는 있다. 하지만 공무원 업무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민원실 근무가 내공축적에 좋은 것이다. 행정의 궁극은 시민이다. 인사행정의 본질도 시민들에게 보다 나은 행정서비스를 베풀기 위한 인력배치였다.
간단한 업무 몇 가지를 분장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내공을 쌓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따로 하드 트레이닝을 시키는 경도였다.
공직에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신규는 머리가 만렙 나이 먹은 고참은 요령이 만렙.
신규 때 가장 똑똑하고 공직 생활 오래 하다보면 요령만 생긴다는 뜻이었다.
기획안 과제는 경기도 내에서 K시와 유사한 지자체 다섯 곳을 골라 인사행정의 특징을 살펴보고 K시의 적응방향을 제시해 보라는 것이었다.
꼰대 과장들처럼 그 공 가로채서 시장에게 사랑 받으려는 게 아니다. 공무원의 실력은 신규 3년 차 이내에 가름이 난다.
이때 제대로 된 행정을 배우면 평생 다른 직원에게 꿀리지 않는다. 하지만 얼렁뚱땅 때우거나, 혹은 행정을 배울 만한 고참이 없어 시간이 흐르면 악순환에 들어간다. 나쁜 요령이 몸에 배는 것이다.
K시와 비슷한 규모의 지자체를 찾는 것부터가 공부가 된다. 지자체의 실적은 다면 평가를 받는다.
행안부는 물론이고 민간단체, 도청, 언론사…… 평가주체들을 손에 꼽다보면 머리가 지근거린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그 평가로 자자체가 줄을 서고 지원금의 규모가 결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시에서 잔뼈가 굵은 고참 공무원들조차 K시와 규모가 비슷한 다섯 시군구를 제대로 꼽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것부터 공부지만 주변 지자체의 인사행정 특징을 알게 되면 간부들의 질문이나 직원들의 항의에 답변하기가 수월하다.
<옆 지자체도 이런 사례가 있거든요.>
설명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원래는 육 과장처럼, 다섯 번 정도 뺀찌를 놓는 방식으로 갈까했었다. 하지만 경도 스타일로 바꾸었다. 신규에게는 충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다섯 지자체로 바꾸었다. 다섯 번 뺀찌를 놓으며 몰아치는 것보다 다섯 케이스를 경험하는 쪽으로 간 것이다.
신규는 머리 만렙이다.
격언은 기막히게 들어맞았다. 문장이 공문서식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맥락을 제대로 잡아내고 있었다.
문장의 문제는 그녀가 기존에 생산된 공문서들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재은과 마득렬 역시 경도의 공문서에 비해 문장이 길었다.
그걸 관여하지 못한 건 경도가 팀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보라에 대한 문장 티칭에는 재은과 마득렬에 대한 간접 교육 효과도 포함되었다.
“문장은 짧게, 요즘 다들 짧게 쓰잖아?”
“그래도 돼요?”
신보라가 반색을 한다.
“되지. 조직은 변화를 위해서 신규를 쓰는 거야. 고참들 그대로 쫓아할 거면 참신한 신입이 왜 필요하겠어?”
“알겠습니다.”
보라 표정이 밝아진다.
“공문서 작성지침은 숙지했지?”
“네.”
“그럼 이거 바로 관련 부서에 뿌려도 되겠어?”
“예?”
경도의 돌직구에 보라가 움츠러든다.
공문서에도 원칙이 있다. 문서규격과 양식이 존재한다. 일단 최종 결재권자의 결재가 있어야 유효하며 직무의 범위 내에서 작성해야 한다.
결재가 끝나면 공문서가 성립이 된다. 효력은 수신자에게 도달하는 순간에 발생되는 도달주의 원칙이다.
다만 공고하는 공문서는 공고일로 5일이 경과한 날부터 효력이 나타난다.
구성원칙도 규정이 되어 있다.
두문-본문-결문-발신기관명-우편번호와 주소-문서번호-보존기간-수신란 등이 그것이다.
문서번호는 기관기호와 분류번호, 문서등록번호가 필요하다. 공문서 보존기간은 영구, 준영구, 10년, 5년, 3년, 1년 등으로 구분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신규에게는 외계어와 다르지 않았다.
“기관기호와 분류번호 잘 숙지하고 이 문서번호는 1번으로 매겨. 보존 기간은 영구야. 초짜 신 주임이 미래의 신 주임에게 보내는 거니까.”
“네에.”
“그렇게 해서 보고서 하나로 압축해봐.”
“네?”
“하나로. 시간은 내일 퇴근 때까지. 처음 한 거치고는 굉장히 잘했어.”
마지막에는 칭찬을 잊지 않았다.
돌아서는 보라가 경도 몰래 웃는다. 마지막 칭찬에 위로가 된 것이다. 몰래 지켜보던 재은이 또 몰래 쌍엄지척으로 경도를 지지한다. 초보 팀장의 초보 교육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녁에 하는 일이 있어서요.”
경도가 전화를 끊는다. 오늘만 해도 두 번째다. 인사팀장이 되자 초대 러브콜이 많아졌다.
K시에도 이런저런 라인이 많았다. 그들의 리더들이 청하는 ‘차 한 잔’, ‘밥 한 끼’다. 청탁이 아니어도 부담스럽다.
인사팀장이 되면 원수가 늘어난다. 사람 하나 만나는 것도 가려야 한다. 괜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인사팀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만났다. 경도의 원칙이었다.
하루 이틀이 쌓이면서 루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차 한 잔’ 어쩌고의 요청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I miss U SO MUCH without ANY reason.]
이른 아침, 두나의 카톡이 들어왔다.
그녀는 종종 영어를 사용한다. 미국에서 영어를 배웠으니 과시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줄어든다고 했다. 그 마음이 행간에 실려 있다. 대문자와 소문자를 가려 적절한 강조를 한다.
[ME TOO, MISS YOU.]
경도도 영어로 답한다. 두나의 말에 공감이다. 두 마디도 없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섭섭하지만 또 그래서 더 그리운 두나였다.
그녀는 SS 병원에서 클리닉 카운슬러를 맡았다. 큰 수술을 앞둔 환자나 큰 수술을 마치고 퇴원하는 환자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역할이었다.
SS 병원에서도 처음으로 도입한 시스템인데 반응이 좋다고 했다. 그녀가 한 말이 아니라 방송에 그렇게 소개가 되었다.
주말이면 소년원으로 청소년 무료상담을 나간다. 그 일은 그녀가 입국한 첫 주부터 시작되었다.
경도도 최근에야 알았다. 주말 약속을 부담스러워하길래 물어봤더니 그런 답이 나왔다.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좌절을 딛고 맑은 미래를 성취한 채두나. 그렇기에 관상만큼이나 그녀에게 빠져버린 경도였다.
‘온다.’
이른 아침, 경도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노란 차가 노란 수선화처럼 다가왔다. 가만히 눈을 감고 카운트다운을 한다.
셋, 둘, 하나.
딩동.
벨이 울린다.
문은 저절로 열린다. 경도가 설치한 리모콘 개폐 장치였다.
“잘 잤어요?”
그녀의 한 마디에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과 함께 그녀가 다가온다. 그녀를 안는다. 수선화를 닮은 향에 그냥 취해버린다.
사랑은.
중독이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안고 싶다.
그리고 안아버리면…….
“나 키토김밥 사왔…… 어머.”
왼손의 테이크아웃 포장지를 들어올리는 순간, 두나의 몸이 기울었다.
“잠깐만, 김밥…….”
겨우 테이블에 내려놓기 무섭게 두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경도가 안아버린 것이다. 그 꽃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수선화꽃잎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청초한 꽃잎에 상처라도 날까봐 정성스럽다. 이른 아침, 이 침대에 날아온 꽃이 고마워 더 정성을 다한다. 수선화는 축복이다. 어쩌면 경도의 인생을 그냥 스쳐갔을 인연이었다.
“경도 씨…….”
경도라는 호칭은 이럴 때 나온다. 그 외에는 그냥 선생님이었다.
밤사이에 별은 졌건만 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그 별이 가득하다. 살포시 포개진 입술에는 원초의 그리움이 살고 있다.
목 아래로 펼쳐지는 가슴은 아름다운 평원이다. 닿고 또 닿아도 그리워지는 평원…….
“사랑해요.”
그녀의 손이 경도의 목에 깍지를 꼈다.
사랑해.
똑같은 말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린다.
먼 인연이었다. 한국에서 미국을 찍고 다시 이어진.
그렇기에 경도는 그녀가 고마웠다. 경도도 잊고 있던 운명을 그녀의 의지가 이어준 것이다. 그 운명 속으로 경도가 돌진한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 경도를 맞이한다. 이 먼 그리움, 채우고 또 채워도 갈증이 더하는 사랑. 그 사랑에 또 한 번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사랑해.
경도는 폭발은 그 말과 함께 멈춘다. 두나의 흰 손이 경도 양 볼을 잡는다. 다시 수선화 향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아니, 단 한 순간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그 속박은 명랑한 명령으로 연결되었다.
“김밥 먹어야죠.”
아련해지던 경도 의식에 정신이 번쩍 들어온다.
[내가 사 왔으니까 박사님이 차려주실 거죠?]
요청조차 사랑스럽다. 청유형 화법으로 당하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이다.
혼밥에 익숙하니 김밥상 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김밥에도 노란 수선화가 가득하다.
키토제닉 김밥이다. 밥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오직 계란 노른자와 채소들이다.
지방을 주재료로 하는 김밥은 기묘하게도 살을 빠지게 한단다. 지방은 탄수화물과 달리 축적되지 않는다는 게 키토식 주의자들의 이론이다. 그래서 다이어트가 된단다.
포슬포슬 맛이 좋다. 비만 걱정 따위는 상관없었다. 경도도 두나도 그런 거 고민할 체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장황한 이론 따위도 상관없었다.
혼밥만 먹던 사람이라면, 그 안에 생쌀이 들었다고 해도, 대환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라면.
“저 가요.”
그녀가 문 앞에 선다. 이런 때는 출근시간이 구속이다. 경도는 공무원이라 한두 시간 탄력 출근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나는 그렇지 못했다. 환자들과의 예약이 있는 것이다.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걸로 끝나려했지만 남녀인력의 법칙에 끌려 아래로 내려간다. 다시 그녀의 수선화 향을 맡았다. 짧고 깊은 키스였다.
두나가 아침을 열어준 탓인지 기분 좋은 날이었다.
이 국장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엄낙기 과장도 국무총리상을 받는다. 경도네 인사팀에서도 재은이 장관상을 득템 했다.
공무원의 상은 돌아가면서 먹는 거 맞다. 90% 이상 팩트다. 그러나 10% 정도는 자신의 실력과 실적으로 받는다. 이 국장과 엄 과장이 그랬다. 이 국장 부임 후의 자치행정국은 시스템이 단순화되고 능률이 높아졌다. 행정의 병폐도 많이 덜어냈고 읍면동의 자치권도 활성화 되었다.
엄 과장 역시 바닥을 기던 과를 상위권으로 올려놓았다. 공직의 어떤 일들은 저절로 달성되는 게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실적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었다.
권태술과 마지웅도 장관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 모든 상의 상신은 경도와 재은이 주도를 했다.
상에는 언제나 경합이 따른다. 복수의 후보자에게 공적고서를 올리게 하고 인사팀에서 심사를 하는 것이다. 이때 팀장과 과장의 역량이 중요하다.
루틴으로 올라오는 보고서보다 이 공적 조서를 잘 보완해 주어야 한다. 착한 직원들은 자신의 공적을 글로 드러내는 걸 쑥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
굵직한 상이 많으니 신경이 쓰였다. 자료실 송혜영의 지원을 받았다. 그녀에게 보내 문맥수정을 받은 것이다.
송혜영은 이미 신춘문예 당선자였다. 그 틈에 마지웅의 것도 슬쩍 딸려보냈다. 그런 다음에 최종 심사에 올리니 마지웅의 상도 결정이 되었다. 마지웅이야말로 상 받을 자격이 있었다.
“자네들 공을 내가 가로챈 기분이야.”
수상 후에 나온 이 국장의 소감이었다. 그는 자치행정국의 모든 팀에 피자를 한 판 씩 돌렸다.
임사팀은 재은이 쏜 게 있어 두 판이 되었다. 거기에 엄낙기가 보낸 것까지 도착하니 무려 세 판.
한 판은 자료실의 송혜영에게 보내고 또 한 판은 자원봉사자들에게 주었다. 이런 한 턱은 나눠먹어야 더 맛나는 법이다.
“고맙네.”
따로 인사팀에 들른 이 국장이 경도에게 감사를 전했다.
표정이 밝다.
미간과 이마 중앙에서 찰랑거리는 윤기가 예사롭지 않다. 경도의 관상안으로 보아도 그랬다.
그러나 국장이다.
K시에는 지방직 공무원이 올라갈 3급 부이사관 자리가 없었다. 즉 기고 날아도 국장으로 정년이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의지가 있다면 부이사관 자리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권 시장은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국장의 저 상승운은 또 뭐란 말인가?
혹시 도청으로 옮겨가서 3급 승진?
그런 방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도청과 K시의 교류는 5급을 넘어가 본 적이 없었다. 이 의문은 퇴근 직전에 걸려온 전화 한 통이 풀어주었다.
~i miss the taste……
팀원들을 보내고 캐비닛 시건을 확인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경도의 미래까지도 흔들어버리는 굉장한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