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189화
57. 살아 있는 수선화를 만났습니다-1
보글보글.
소리부터 감칠맛이다.
다음 날 아침 식사는 ‘당연히’ 알탕이었다. 대리운전으로 돌아와서도 근처의 식자재마트에 들른 경도였다. 어머니의 문자도 한몫을 했다.
[알탕 꼭 챙겨 먹고]
누구 도움인지 사진까지 첨부했으니 잊을 수도 없었다.
알은 커야 맛이 좋다. 오독한 식감도 그만이다. 알주머니가 적은 것들은 찐이 아니다. 비린내가 날 가능성도 높다. 승진 몇 번 하는 동안에 알탕 전문가가 된 경도였다.
알은 다시 얼리면 좋지 않다. 애당초 냉동을 해동시켜서 팔기 때문이다. 그대로 냉장실에 넣어뒀다가 끓이는 게 요령이다. 어머니의 비법인 약간의 된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투하된다.
육수가 없으면 다시마 한 조각에 마른 멸치 4-5마리 투하하면 끝이다. 무를 맛 나게 먹으려면 먼저 넣는다. 무는 설익으면 맛이 없다. 비린내를 잡는 데는 마시다 남은 청하도 끝내준다.
그런데.
이런 거 다 공염불이다.
바쁘면 닥치고 격식 파괴다.
뚝배기에 끓이다가 다시다 반 스푼 넣으면 완벽(?)하다. 무가 없어도 청양고추가 없어도 대충 넘어간다.
신 김치가 있으면 첨가해도 무방하다. 핵심은 알이기 때문이다.
아예 햇반까지 탕에 투하한다. 가장 빠른 시간에 식사하는, 혼밥 대가(?)의 노하우였다.
시청이 가까워올 때였다. 강재은에게 문자가 들어왔다.
꽃다발 파일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주차장 앞에는 인간 꽃다발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팀장님.”
아이들처럼 깡총거리는 사람들은 용포읍 부녀회장단이었다.
“오 팀장님.”
경도 차가 멈추자 안선주를 필두로 아이처럼 달려든다.
“축하해요.”
꽃다발과 커피를 안겨준다.
“김영란법인가 뭔가 때문에 다 2만원 미만으로 준비했어요. 이러면 문제없죠?”
안선주가 쐐기를 박는다.
“…….”
“다음에는 시장(市長) 한 번 해먹자고요.”
그녀들이 멀리 질러간다.
“어떻게들 알고…….”
가슴이 먹먹해진 경도가 말을 더듬었다. 매번 경도를 챙기니 고마울 뿐이었다.
“왜 몰라요? 우리도 다 정보망이 있거든요.”
“…….”
“자자, 다들 인증샷 대열로 헤쳐모여.”
안선주가 소리치자 10여 명 부녀회장들이 경도 주변으로 포진했다.
“저기요, 거기요, 이리 와서 사진 좀 찍어주세요.”
지나가는 공무원을 불러 핸드폰까지 맡긴다.
찰칵.
인증샷이 박혔다.
“바쁠 테니까 얼른 들어가시고 다음에 한 번 뭉치는 거 아시죠?”
안선주가 경도 등을 밀었다.
꽃다발을 바리바리 안고 엘리베이터를 타니 조금은 뻘쭘했다.
“축하합니다.”
같이 탄 직원들이 축하를 건넨다. 꽃다발 세례는 인사팀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축하한다.”
첫 주자는 권태술과 마지웅이었다.
“아, 나는 준비 못 했는데…….”
경도가 뒷목을 긁었다.
“다음에 술로 갚아라.”
태술이 주먹을 내민다.
“축하해.”
다른 동기들도 셋이나 줄을 섰다
그리고.
그 뒤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엄낙기 과장이었다.
“축하하네.”
“과장님.”
“그리고, 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격려하는 척 달콤한 속삭임도 들려준다.
“팀장님 인기가 찐이에요.”
같은 방의 강재은은 그제야 진짜 꽃을 내민다. 차례 기다리다 날 새울 판이었다.
“고마워.”
“방 과장님이 책상은 다 비워놓으셨어요. 옮겨 앉기만 하면 되세요.”
“땡큐.”
책상 앞에 서니 거기도 꽃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지방행정주사보 오경도 지방행정주사에 임함, 인사팀장을 보함]
시장에게 임명장을 받고 오니 꽃이 더 늘었다. 계치훈 경감의 것도 있고 그의 작은아버지 것도 있다. 유빈과 탁 대표도 경도의 승진을 챙겼다.
최현배 사장과 김재웅 이장 등의 것도 있고 문 여사와 조경철, 고세완, 이상록 등의 것도 보였다. 더 놀라운 건…….
“……?”
점심시간이 가까워 도착한 꽃이었다. 김윤광과 백지애, 노성봉이 보낸 것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의 답문을 보냈다.
조직생활을 하면서 경도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작은 관심을 쏟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런 관심을 받았을 때 고마움을 전하는 것도 중요했다. 호의를 권리로 알면 쪽박이 가까워진다.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
꽃 중에 좀 특이한 게 있었다.
“수선화예요.”
강재은이 그 꽃을 알았다. 축하 꽃다발은 물론,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아니었다.
노란 꽃은 경도의 시선을 확 잡아당겼다. 노란 수선화의 색감이 복을 부르는 찰색과 닮았던 것이다.
<승진 축하드려요 C.D.N>
작은 카드가 꽂혔다. 이름이 아니라 이니셜이었다. C라면 최나 차, 채, 추, 천 씨 성이다. 혹은 조 씨도 Cho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DN이면 동남? 대농?
‘허읍.’
N이 어려웠다.
“오 팀장, 점심 괜찮지?”
작별인사를 하러 온 방 과장이 점심 예약을 한다. 강재은과 마득렬이 이의가 없으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자, 많이들 먹어. 그동안 못 해준 거 다 용서해주고.”
점심시간, 왕갈비탕을 쏜 방 과장이 음식을 권했다.
“잘 먹겠습니다, 과장님.”
강재은이 제일 먼저 답을 했다.
“이번 인사 후폭풍은 없었어?”
“전화 몇 통 오기는 했어요.”
“심하게 불만 있는 사람 나오면 나한테 보내. 내 책임이니까.”
“네에, 과장님.”
이 답도 강재은이 했다.
“오 팀장.”
방 과장이 경도를 바라본다.
“예, 과장님.”
“과장 소리 쑥스럽네?”
“왜요? 잘 어울리는 데요.”
“아무튼 다음에는 우리 재은 씨하고 득렬 씨 좀 챙겨줘. 내가 일만 시켜먹고 튀는 꼴이라서 말이야.”
“그러죠.”
“솔직히 그동안도 우리 오 팀장이 대부분의 인사안을 짜냈으니 두 사람이 일하기에는 더 좋을 거야. 나보다 100배는 나은 사람이니까 잘 보필해주고.”
“네에.”
강재은의 대답은 여전히 싹싹했다.
오가는 송별식은 이렇게 끝이다. 원래는 저녁 시간에 만나 밥-술-노래방 가는 게 코스였다.
하지만 미투 이후로 노래방 코스가 잘려나갔고 코로나 전성기 이후로 술자리도 많이 줄었다.
간단하게 1차 정도로 끝내는 게 최근의 대세였다.
“오 팀장.”
식사가 끝나자 방 과장이 경도를 끌었다.
“오 팀장 후임 있잖아? 누가 오는지 확인했어?”
“과장님이 짠 거라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이 국장님에게 대략 얘기 들었지?”
“예.”
“솔직히 말하면 내가 뭐 시장님 딸랑이는 아니지만 운동은 좀 했어. 어쩌겠어?”
“이해합니다. 이것저것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경도가 웃었다. 공무원의 미덕은 승진이다. 방 과장도 다르지 않았다.
“고마운 건 나야. 내가 가는 부서에 꼴똥 진상 팀장이 둘이나 있더라고. 신참 과장 정도는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니 여차하면 나 좀 도와줘.”
“그러죠.”
떠나는 방 과장의 우려를 달래주었다.
다음은 9-8-7급 인사다.
대부분 그렇듯 5시 55분 업로드가 예정되었다. 인사팀이 갖추는 최소한의 자기방어였다.
경도의 자리에 누가 오나 검토해 보니 자치행정팀의 이해은이다. 7급 5년 차에 들어서니 마득렬보다 2년 앞선다. 차석자리가 되는 것이다.
성향상 권 시장 라인이다. 그렇다면 복선일 가능성이 높았다. 경도에 대한 견제이자 시장 의중의 반영을 위한 사전포석인 것이다.
신경 쓰지 않았다.
경도도 이제 팀장이다. 팀원을 내 사람으로 만드냐 못 만드냐는 전적으로 팀장의 능력이었다. 그럴 자신도 있었다. 게다가 팀에도 약간의 긴장은 필요했다.
5시 55분.
마침내 업로드 시간이 왔다.
“칼퇴근해.”
경도가 두 팀원의 등을 밀었다. 이제는 알고 있다. 인사가 발표되면 깨지는 일밖에 없다.
발표 전에야 운동이니 라인이니 하면서 친한 척하지만 발표되는 순간 돌변한다. 공은 간 곳 없고 과만 남는 것이니 팀장된 주제라 팀원부터 챙겼다.
따르륵.
업로드 클릭을 누르기 무섭게 전화벨이 울린다. 아직은 근무 중이니 받지 않을 수도 없다.
“내가 받을게.”
강재은을 만류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인사팀 오경도입니다.”
“아, 씨…… 내가 웬만하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
처음부터 센 전화가 들어왔다.
“%@&☆☒℃×♂.”
ㅆ을 시작으로 격음의 성찬이 펼쳐진다.
귀를 막고 잠시 숨을 골랐다.
“알겠습니다. 이의제기가 있으면 내일 인사팀에 오셔서 정식으로 해주시면 검토해 보겠습니다.”
고함이 멈춘 사이에 부드러운 해결책(?)을 날리고 끊는다.
따르륵따륵.
전화 한 통 받는 사이에 팀원 책상의 전화들이 돌아가며 불이 붙는다.
“가, 왜 안 가고?”
멀뚱하게 선 강재은에게 얼른 가라며 손짓을 했다.
그런데.
“……?”
강재은이 뒤에 선 여자를 가리켰다.
빠르다.
벌써 쫓아온 직원이 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아시다시피 오늘은 근무시간이 끝나서요. 내일 약속 잡아드릴 테니…….”
경도도 내공으로 때우려는 순간.
“……!”
경도 안구에 불덩이가 달려들었다.
이 여자.
낯이 익었다.
하지만 왠지 공무원 스타일이 아니었다.
“인사 때문에 온 사람이 아니고 오 팀장님 찾아온 분이세요.”
강재은이 속삭이듯 전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여자의 시선이 화병의 수선화에 꽂혀 있다. 오늘 들어온 축하꽃 중에서 유일하게 남겨놓은 것이다.
비닐포장도 벗기지 않고 꽂았으니 작은 카드에 쓰인 CDN라는 이니셜도 고스란히 보였다.
꽃과 여자를 번갈아 보는 순간.
경도 심장의 휴화산이 벼락처럼 폭발해버렸다.
CDN.
채두나.
황급이 이니셜과 여자의 이미지를 포개본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맞아떨어진다.
채두나?
경도의 시선이 여자의 그것과 허공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그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수술비를 위해 돈 많은 남자의 대리모가 되려 했던 여자. 백설보다 시린 순수를 지니고 있던 여자.
경도가 던져준 행운을 안고 미국으로 날아갔던 그 여자 채두나가 돌아온 것이다.
“…….”
경도 시선이 꽃의 이니셜로 향했다.
“이 꽃……?”
경도가 고개를 든다.
“고마워요.”
“……?”
“오 선생님, 아니, 이제 오 박사님으로 불리시더군요. 오 박사님 덕분에 저 자신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되찾은 채두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
“얼마 전에 용포읍 행정복지센터로 갔더니 시청으로 이동하셨다고 하더군요. 바로 오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얻은 직장에 준비할 것들이 있어 며칠 늦었습니다.”
“두나 씨?”
“박사님 덕분에 미시간 주립대에서 심리학 과정을 마쳤습니다. 박사님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한국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
“승진을 하셨다고요?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흰 수선화가 살짝 흔들리는 듯 우아하고 수려하다. 아니, 그녀는 그냥 한 송이 수선화였다. 자기 사랑 외에도 고결함과 신비감이라는 꽃말을 가진 수선화…….
“괜찮으시면 제가 차를 한 잔 사도 될까요? 아직 업무가 남으셨다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녀의 요청이 안개처럼 경도 귀를 적신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런 날은.
경도의 상상 속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