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려드리죠-3> (160/245)

관상만렙 공무원님 160화

44. 살려드리죠-3

윤지의 발작은 오늘따라 심했다.

“윤지야.”

이상록이 달려가 아이의 손발을 풀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늘 묶는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보호하다 보니 발작 타이밍을 대략 알고 있었다.

거기 가까운 시간이 오거나 아이가 잠들면 잠시 묶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발작을 하다가 손발이 부러지거나 머리를 다칠 수 있었다.

오타하라 증후군은 수면 중에도 발작을 할 수 있었다.

“윤지야.”

이상록이 아이 사지를 제압한다. 경도도 달려가 힘을 보탰다. 이상록이 윤지 가슴을 누르는 동안, 머리를 보호했다. 이상록은 몰입한다. 짜증을 뿜어내던 조금 전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빠도 있고 엄마도 있어.”

딸을 안은 이상록은 절박하다. 가까이서 보니 이 남자의 숨은 진가가 보였다. 모든 기색이 칙칙하지만 음즐궁의 색은 맑다. 시련 속에서 헤매지만 신뢰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경도가 조용히 웃었다.

이상록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아빠빠우빠우, 따롸라아.”

윤지는 외계어 같은 소리를 쏟아내며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내 늘어졌다. 이 또한 나중에 알았지만 아이 입에는 마우스피스도 있었다. 자칫하면 혀를 물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후.”

아이가 진정되자 이상록이 겨우 숨을 돌렸다.

“고마워요.”

강남숙의 인사가 나왔다. 경도는 조용히 물러났다. 거실은 여전히 엉망이다. 남의 살림을 마음대로 치울 수도 없어 작은 소파에 엉덩이만 걸쳤다.

10분쯤 지나자 부부가 나왔다. 이상록의 걸음을 본다. 왼발을 먼저 뗀다. 게다가 우아한 학보다. 좌절만 떨쳐내면 사려 깊고 남들이 못 보는 걸 보는 고귀한 사람이었다. 구제하고 싶은 마음이 한 뼘 더 자랐다.

하지만 분위기는 제대로 썰렁했다.

경도가 일어서자 이상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계세요.”

그가 권하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집안 꼬라지 이런 건 이미 보셨고…… 그래도 차는 한 잔 드려.”

이상록이 강남숙에게 말했다. 마실 기분이 아니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후룩.

세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윤지 수술을 주선하신다고?”

딱 한 모금을 넘긴 이상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술 냄새가 나지만 지금 먹은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다행이었다.

“응.”

“…….”

“주임님…….”

강남숙이 경도를 바라보았다. 경도가 핸드폰의 통화 영상을 틀어주었다.

“미국의 소아과 명의들입니다.”

“미국 명의…… 코로나 한참일 때 보니 그쪽 의학도 형편없는 것 같더만…….”

“그래도 우리보다 나은 분야가 많습니다. 이쪽 남자 의사분은 우리 시의 불치병 어린이를 살려준 경력도 있고요.”

“안명혜라고…… 당신도 봤지? 토마토 동영상 말이야. 그 꼬마도 불치병으로 누워서 지냈었대.”

강남숙이 설명하지만 이상록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윤지 비용 일체는 제가 주선을 하겠습니다.”

그 마음을 읽은 경도가 의견제시를 했다.

이상록이 강남숙을 돌아본다.

“오 주임님이 어려운 사람들 후원회에 관여하고 계셔. 거기서 지원금 알선해주신다는 거야.”

“당신은 횡령 걸렸다면서?”

“응.”

“그런데도?”

“그건 우리가 갚아야지.”

“그래. 당신하고 나하고 신장 하나씩 떼자.”

이상록의 체념이다. 현재의 능력으로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런 말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경도가 운을 떼고 나섰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방법이 있다고요?”

“주식하셨다면서요?”

“했었죠. 싹 말아먹어서 그렇지.”

“알고 있습니다. 윤지가 태어나기 전이었죠? 그 어느 한 해, 윤지 아빠께서는 최고의 운을 구가하셨죠?”

“당신?”

이상록이 강남숙을 돌아본다.

“아니야, 난 그런 말 안 했어. 우리 오 주임님이 관상을 기막히게 보셔서 그래.”

강남숙이 손을 저었다.

“관상?”

“맞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몇 가지 상괘를 드릴 테니 신뢰가 가거든 제 말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관상……?”

“탐탁지 않을 수 있지만 좀 들어보시고요.”

“…….”

“그해 윤지 아빠의 찰색은 백분광화(白粉光華)였습니다. 얼굴의 기색 속에 그 흰 기세가 흔적으로 남았으니 운빨 제대로 받은 거죠.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운은 길어야 일 년짜리였습니다.”

“당신 진짜 말 안 한 거야?”

“그렇대도.”

이상록의 확인이 경도의 상괘를 막았다. 거듭 확인한 후에야 눈빛이 수그러드니 경도가 말을 이어갔다.

“실적이 좋으니 회사에서 무한신뢰를 받으셨겠죠? 아마도 새로운 펀딩 업무나 대형 프로젝트를 권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걸 받아들였을 테고요.”

“그랬습니다. 그해에 나 하나 보고 증권사 옮겨온 큰 손이 300여 명에 달했거든요.”

“그러나 백분광화의 유혹은 기색이 막히려는 징조였으니 하던 대로 했어야 했습니다. 새로운 일이나 개혁을 하려면 막힌 기색 속에 밝음이 서려야 하거든요.”

“그럼 그때 왕창 해먹은 게 관상으로 예정된 일이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또 다른 문제가 더해졌죠.”

“또 다른?”

“입말입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벌리고 살기 시작했습니까? 지금은 잘 때도 벌리고 자시죠?”

“입이 문제입니까?”

“윤지 아빠는 관상상 화형에 속하는 데다 입이 큽니다. 그런 사람은 입을 벌리면 복을 거두지 못합니다. 가지고 있는 복까지 다 밀어내는 거죠.”

“이게 회사에서 고객들 돈 말아먹고 윤지까지 이렇게 되니 속이 타는 데다 술까지 먹는 바람에…….”

“장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

“귀의 귀찌 말입니다. 그것도 그 즈음에 한 거죠? 일 년 잘 나가던 그때에?”

“맞아요. 고객 중의 한 분이 세련되어 보일 거라고 추천을 하길래…….”

“관상학적으로는 거기가 풍당이라는 자리입니다. 거기 윤기가 돌면 횡액이 떠나고 좋은 소식이 오는 건데 장애물을 설치하는 바람에 운을 막고 있는 겁니다.”

“이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 두 가지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당장 고치시죠. 입은 가급적 다물고, 귀찌는 뽑아내기 바랍니다.”

“하지만 귀찌는 워낙 관리를 안 하다 보니 살에 눌어붙어서…….”

“힘들면 병원에 가서 떼셔도 됩니다.”

“단지 그것만 하면 됩니까?”

“강 주임님이 꺼내 간 금고도 채워주셔야죠.”

“그건…….”

“최근에도 주식하셨죠?”

“…….”

“강 주임님 말로는 제대로 털렸다고 하더군요. 남은 잔고가 얼마나 됩니까?”

“300도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실 자신도 없으시죠?”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횡액이 끝났는지 확인도 할 겸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보세요.”

“자신 없습니다. 남은 실탄도 이 사람이 직장에서 몰래 가져온 돈이고요.”

“실탄은 제가 빌려드립니다.”

“……?”

“이번에는 돈이 아니라 이 가족의 운명을 걸고 한 번 해보세요. 실제로도 운명이 걸리는 것이니 돈을 채워놓지 못하면 강 주임님은 경찰의 수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

“자금은 제가 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제 옵션을 받아주셔야 합니다.”

“뭐죠?”

“시간은 일주일 드립니다. 감사실에서 감사 중인 사안이라 더는 여유가 없습니다. 윤지 아빠께서는 내일 오전까지 투자종목 열 개를 고르고 그중에서 두 개를 선택해 오세요. 실탄은 5억까지 요청해 보겠습니다. 이 자본으로 금요일 장 마감 때까지 6,800만 원 이상의 수익을 확보하셔야 하며 한 푼만 모자라도 실패로 간주합니다.”

‘5억?’

“또한 그 회사의 대표와 사업결정권이 있는 중역 등의 최근 한 달 내 사진이나 영상을 첨부하셔야 합니다. 제가 회사 관계자들의 관상을 볼 겁니다. 만약 제 판단과 다르게 가망이 없어 보이는 주식을 선택한다면 이 제안은 무효로 합니다. 증권회사에 계셨던 분이니 연줄을 통해서라도 대표들 사진이나 영상확보는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능합니다.”

“이 제안 받으시겠습니까?”

“받겠습니다.”

“좋습니다. 만약 성공하시면 제 부탁을 하나 더 들어주셔야 합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강 주임님.”

“예?”

“주임님은 그동안의 윤지 진료기록과 진단서 준비해 주세요. 윤지 아빠가 성공하면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셔야 할 테니까요.”

“오 주임님…….”

“다행히 윤지 아빠의 년상과 수상이 그리 어둡지 않습니다. 이게 어두우면 희망이 절벽인데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귀도 단정하고 눈동자도 좋으니, 입을 다물고 귀찌를 제거한 후에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가슴 속에서 무너진 책략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겁니다.”

“…….”

“제 말은 곧 세 분이 다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주임님…….”

“따지고 보니 저까지 넷이군요. 강 주임님이 실패하면 저도 시청에서 곤란해질 겁니다.”

“이렇게까지 저희를…….”

“같은 직원이잖습니까?”

“하지만…….”

“제가 본 관상으로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도 시도 안 합니다. 되지도 않을 일에 밀어 넣는 건 더 잔인한 일이니까요.”

“…….”

“아까 보니 윤지도 명궁이 밝고 귀의 윤곽에 붉은 기색이 서리고 있어 병을 떨치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노력해 주세요.”

“한강 다리를 몇 번이나 지나갔던 목숨입니다. 이 기회만은 어떻게든 잡아보겠습니다.”

이상록의 눈에 전의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때 명혜 아빠의 전화가 들어왔다.

-오 선생님, 저희들 다 와 갑니다.

-선생님, 명혜도 왔어요.

귀요미 명혜 목소리까지 세트로 따라 나온다.

“도착하시면 잠깐 안으로 들어오세요.”

경도가 그들을 불러들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명혜는 단정한 배꼽 인사부터 올렸다.

“어머, 걔야.”

강남숙은 명혜를 알아보았다.

“세상에…… 불치병을 앓은 기색은 어디에도 없어.”

“그렇네?”

강남숙 부부는 어쩔 줄을 몰랐다.

“오 선생님이 고쳐주셨어요. 여기도 저처럼 많이 아픈 언니가 있다면서요?”

명혜의 귀요미 뿜뿜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 윤지가…….”

강남숙이 눈시울을 붉히는 사이에 윤지가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발작은 멈췄다. 그러나 병색은 완연했다.

“언니가 아프구나?”

명혜가 쪼르르 달려갔다.

“언니.”

마치 친언니라도 만난 듯 붙임성 있게 윤지 손을 잡는다.

“누구야?”

“내 이름은 안명혜.”

“명혜?”

“나도 많이 아팠어. 매일 누워서 살았어. 기저귀도 차고.”

“기저귀?”

“언니도 많이 아프다며?”

끄덕.

윤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을 거야. 오 선생님이 왔으니까.”

“오, 선생님?”

“여기 이 선생님.”

명혜가 쪼르르 달려가 경도 팔에 매달렸다.

“오 선생님은 약속을 꼭 지키셔.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해.”

“…….”

“선생님이 왔으니까 언니 병도 다 나을 거야. 명혜처럼.”

윤지 앞으로 다가선 명혜가 두 팔로 큰 원을 그린다.

명혜 진짜…….

앙증맞으면서도 당차다. 저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윤지 앞에서 언니처럼 의젓한 것이다.

“명혜…….”

윤지가 가만히 명혜를 안는다. 아이들이다. 경계심 따위는 사라지고 금세 친해지고 있었다.

“언니, 이거.”

명혜가 내민 건 사탕이었다.

“수술받고 나서 먹어. 그럼 굉장히 맛있을 거야. 나도 그랬거든.”

“고마워.”

“아빠.”

임무를 마친 명혜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방안은 그새 숙연했다.

하루에도 몇 차례 경련과 발작을 하는 윤지.

불치의 병을 떨치고 건강해진 명혜.

부부의 소원이었던 윤지의 건강한 모습.

둘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만날 수 있기를 바랐던 소망.

그 미래가 바로 명혜인 것이다.

“우우욱.”

가능성을 본 이상록의 심장에서 오열이 새어나왔다.

“여보.”

강남숙이 남편을 끌어안는다.

“아빠…….”

윤지도 합류한다.

경도는 보았다. 아내와 딸을 안고 오열을 참는 이상록의 눈동자. 절실하고 또 절실해 보이는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느님, 두 번도 아니고 한 번입니다. 딱 한 번만 제게 딸과 아내를 구할 능력을 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