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159화
44. 살려드리죠-2
“아이의 오타하라 증후군 말입니다. 생후 두 달 후쯤에 발생했다고요?”
“예.”
“발작에 경련…… 외과적 수술이 곤란한 부위에 병소…… 현재 11살, 맞습니까?”
“예.”
“혹시 뇌 MRI 같은 거 있으신가요?”
“그걸 뭐하시려고요?”
“아까 말씀드린 안명혜 말이에요. 그 아이를 고쳐주신 분이 미국 보스턴 어린이병원에서 소아비뇨기과 과장을 맡고 계세요. 혹시라도 방법이 있나 그쪽 병원 자문 좀 받으려고요.”
“있기는 해요. 핸드폰에 넣어둔 거…….”
강남숙이 다시 핸드폰을 연다.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니 바로바로 반응을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파일을 카피하고 일어섰다.
복도로 나와 신준표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다시 시도해도 통화음만 허무했다.
그는 의사다. 그것도 굉장히 유명한 의사다. 수술을 할 수도 있고 강의 중일 수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통화하고 싶지만 세상은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없지.’
아쉬운 대로 문자를 찍을 때였다. 마음이 통했는지 신 박사의 전화가 들어왔다.
-오경도 선생님.
그의 목소리가 더 없이 반가웠다.
“박사님, 바쁜데 전화 드린 거 아닙니까?”
-오경도 선생이라면 절대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실은 어려운 부탁이 있어서요.”
-설마 그 꼬마 몸이 나빠진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명혜는 날아다니고 있는 걸요.”
-반가운 뉴스로군요.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실은 어린이 한 명을 더 날아다니게 하고 싶어서요.”
-대략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와 같은 환자인가요?
“아뇨. 이번에는 뇌 쪽인데 박사님 병원 쪽에서 자문이 가능한가 해서요. 병명은 오타하라 증후군이라고 하네요.”
-오타하라면 간질 쪽인데요?
“맞습니다. 11살 여자 아인데 경련과 발작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여러 처방을 써봤지만 효과가 없고요. 수술이 필요한데 병소가 깊어서 손을 대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메디컬 자료는 가지고 있나요?
“지금 준비된 건 MRI뿐입니다.”
-뇌수술이 필요한 경우라면 그게 유용하죠. 내 이메일로 보내보시겠어요? 뇌신경외과 담당하는 렉시안 박사가 옆방이니 자문을 받아보죠.
“얼마나 걸릴까요?”
-오 선생 일인데 시간 끌 수 있겠어요? 당장 쳐들어가야죠.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게 가부간의 검토만 하자는 게 아니죠?
“맞습니다. 가능성이 나오면 미국행을 고려 중입니다.”
-알았습니다. 기다려보세요. 한 30분 정도 걸릴지도 모릅니다. 렉시안에게 내 광고(?)가 먹힌다는 가정하에요.
“광고요?”
-오 선생을 팔아먹을 거거든요. 신에 필적하는 관상가가 있다. 그가 운명적으로 추천하는 환자다. 살려라. 먹힐까요?
“박사님.”
-행운을 빌고 계세요.
통화가 끊겼다.
“오경도.”
마지웅이 감사담당관실에서 나왔다.
“어때?”
“사연이 딱한데?”
“어떤?”
“중병에 걸린 딸이 있어.”
“중병이라고?”
“1급 보안이지만 너한테는 말해야겠지?”
“아니면? 감사 주무 주임 빼고 누구랑 논의하려고?”
“오타하라 증후군이라고 이게 간질 종류인데 그중에서도 악질이라네.”
“간질?”
“여튼 그런저런 이유로 병원비에 치료비가 나가다 보니 공금에 손을 댔나 봐. 남편께서는 아이 질병에 죄책감이 깊어서 사직하고 좌절 모드, 원래는 증권회사에 근무했었는데 코너에 몰리니 한 방으로 만회해 보려고 횡령금을 넣었다가 그것까지 아작.”
“심각하네.”
“이거 횡령금만 채워놓으면 중징계는 면할 수 있냐?”
“나 혼자는 결정 못 해. 그쪽 팀장님과 과장님도 아는 사안이라서…….”
“돌리지 말고 솔까로 말해 봐라.”
“뭐 익명 투서로 시작한 거니까 징계를 낮춰줄 수는 있지. 하지만 돈 채울 능력이 없다는데 거기까지 생각해서 뭐하겠어?”
“그러니까 채워놓으면?”
“그러면 뭐 한 번 생각해 봐야지.”
“나 그 말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어쩌려고?”
“관상 봤더니 부부는 인성이 좋아. 공금에 손댄 건 상황이 그랬던 거고. 아무튼 잘못은 잘못이니까 그 처벌 수위는 네가 결정하고…… 아이 수술을 알아보고 있는데 이게 잘 되면 내가 한 번 나서볼게.”
“니가?”
“그래서 나 부른 거 아니야?”
“뭐 그렇긴 하지만 돈이 무려 6,800만 원이야.”
“아무튼.”
경도가 마지웅의 어깨를 칠 때 전화가 들어왔다. 신준표였다.
“박사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요?
“당연히 좋은 소식이죠.”
-렉시안이 MRI 검토를 했는데요, 다른 심각한 질환이 없고 아이 체력이 따라준다면 수술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다만 현재까지 진행된 지적장애는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와오.”
-나쁜 소식 나갑니다.
“예.”
-이 친구도 저랑 같은 유전자인지 오 선생이 신에 버금가는 관상실력이라고 했더니 호기심이 불타오르면서 선행조건을 걸었습니다.
“관상 봐달라는 거군요?”
-지금 사진 몇 장 들어갔죠?
“잠깐만요. 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사진이 세 장인데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렉시안은 여자입니다.
“네…….”
-남자 둘은 렉시안이 교제하는 사람들인데 둘 다 중국인 2세들입니다. 렉시안이 동양에 관심이 많거든요.
“예.”
-둘 다 만나자니 피곤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성격도 쿨한 사람을 택하고 싶다네요. 첫사랑이 일본인이었는데 집요한 데가 있어서 헤어질 때 굉장히 애를 먹었대요. 그런데 그게 파악하기가 어렵잖습니까? 가능하겠어요?
“둘 중 돈 많고 쿨한 사람 말이죠?”
-예.
“그럼 둘 다 포기하라고 전해주세요. 이 두 사람은 돈도 없고 쿨하지도 않습니다.”
-와우.
-예에.
이번에는 신 박사 쪽에서 감탄사가 터졌다. 그런데 한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박사님?”
-죄송합니다. 이거 렉시안의 테스트였습니다. 지금 제 옆에서 감시 중이거든요.
“…….”
-신기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럼 진짜 사진 전송 들어갑니다.
-쏘리 앤 그뤠잇.
신 박사 옆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다시 두 장의 사진이 들어왔다.
둘 다 쾌남형이다. 한 사람은 정장이고 또 한 사람은 캐주얼이다. 둘 다 이마가 시원하고 재복궁의 코 또한 좋았다. 돈 걱정은 없을 상이다.
콧대와 콧망울까지 좋으니 거의 막상막하다. 눈썹도 활처럼 수려한 궁미였으니 남자 보는 눈이 기가 막혔다.
궁미를 가진 남자는 낭만적이다. 여자를 제대로 아껴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정장의 남자는 눈썹을 밀고 있었다. 원래는 더 시커멓고 더 무성한 것이다.
귀도 좀 달랐다. 사람의 성품을 보는 데는 귀가 첫손이다. 둥글고 도톰하면 좋다.
눈썹을 밀지 않은 남자의 귀는 귓불이 좁으면서 끝이 날카로운 형태였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철하다. 이 귀는 이각이 뾰족한 귀와는 다르다.
이각이 뾰족한 귀는 귀의 상부가 하늘을 찌르듯 뾰족한 형태다. 이런 귀는 성품이 잔인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단지 귓불만 뾰족한 귀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이제 전화는 화상통화로 바뀌었다.
화면에 신 박사와 렉시안이 보였다. 경도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이 여자는 섬세했다. 뇌처럼 정교한 수술에 딱이었다.
“렉시안 박사님.”
경도의 상괘가 나가기 시작했다.
“박사님은 현재 정장의 남자를 더 선호하지 않습니까?”
-갓.
렉시안이 입을 막고 놀라움을 표했다.
“두 분 다 그렇지만 데이트를 할 때 그분이 더 자상하죠?”
-맞아요.
“죄송하지만 그 친절은 위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째서죠?
“눈썹 때문입니다. 관상에 있어 눈썹이 무성하고 시커먼 사람은 독재적이고 권위적이거든요. 지금은 데이트 중이니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투자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엔드류의 눈썹은 무성하지 않아요.
“눈썹을 밀었습니다. 확인해보셔도 좋습니다.”
-그럴 리가…… 잠깐만요. 제가 엔드류의 고등학교 동기를 알 거든요.
렉시안이 핸드폰을 꺼내는 게 보였다. 통화를 한다. 그리고 자기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더니 바로 자지러졌다.
-까악.
그녀가 사진 한 장을 비춰 주었다. 그 남자의 고등학교 때 사진이었다. 눈썹이 숯덩이를 붙여놓은 듯 시커멓고 많았다.
-갓갓갓, 당신 진짜 갓이에요.
그녀는 놀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상괘를 드리겠습니다. 헤어질 때 진짜 쿨한 남자는 캐주얼을 입은 분입니다. 그건 그분의 귓불이 보증하는데 이성파라서 데이트 재미는 조금 떨어질 수 있지만 절대 구질구질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습니다.”
-와우우.
“마음에 드십니까?”
-들다마다요. 이건 정말 그뤠잇이에요. 환자 보내주세요. 병원 측에 주선해서 입원비는 몰라도 수술비는 무료로 하도록 추진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박사님.”
-일이 추진되면 당신도 같이 오는 건가요?
“제가 직장이 있습니다. 아마 아이 부모님께서 같이 가게 될 겁니다.”
-그건 아쉽군요. 와우.
또 한 번의 감탄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잘 된 거야?”
마지웅이 물었다.
“지금까지는.”
경도가 걸음을 옮겼다. 아까보다 더 자신감에 찬 발길이었다.
“……?”
영상통화를 본 강남숙의 눈빛이 출렁거렸다. 경도는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사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뉘앙스로 알 수 있었다.
“정말…… 가능한 건가요? 우리 윤지 수술이?”
“강 주임님 의지에 달렸습니다.”
“그럼 부탁해요.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미안하지만 우리는 상관이 있습니다. 횡령한 돈부터 채우는 게 순서에요.”
“시간을 주세요. 어떻게든 해볼게요.”
“일단 저랑 같이 댁으로 가시죠.”
“우리 집으로요?”
“남편분도 아셔야죠. 해결도 그분과 같이 해야 하고요.”
“오 주임님…….”
“강 주임님 프라이드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사채도 꽤 되시죠?”
“…….”
강남숙의 눈빛이 떨어진다. 경도의 질문에 대한 긍정이었다.
“제가 보기에 남편께서 재기하지 않는 한 다시 이런 곤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남편이 싫어할 거예요. 술을 마셨을지도 모르고요.”
“날마다 술을 마시나요?”
“날마다는 아니지만…….”
“딸을 구하는 일이잖아요? 남편분도 성품이 나쁜 건 아니니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경도가 문을 가리켰다. 출구가 없는 강남숙이었다. 게다가 딸의 수술기회까지 왔으니 앞장을 섰다.
“나도 갈까?”
마지웅이 물었다.
“아니, 보다시피 강 주임님 프라이드도 있고…….”
“그러다 너 곤란해지면?”
“왜 이러셔? 경찰서 계 팀장님이 내 후원자인 거 몰라?”
“알았다. 혹시라도 필요하면 연락 때려라.”
마지웅의 말을 들으며 차에 올랐다.
아무래도 늦을 거 같아 염정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약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자를 보냈다. 사람은 눈으로 확인하는 걸 좋아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을 위한 조치였다.
“집안 꼴이 엉망일 텐데…….”
3층 연립주택 앞에서 강남숙이 말끝을 흐렸다. 7급 고참이면 대략 450만 원 전후의 월급을 받는다.
3만불 시대의 한국에서 상류층은 못 되도 밥은 먹고 산다. 맞벌이하면 작은 아파트 정도는 마련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의 연립은…….
엉망이었다.
문을 열기 무섭게 쩐내와 술내가 끼쳐왔다. 옷가지와 빈 술병, 인스턴트 식품 봉지들이 난무를 한다. 그녀가 그것들을 정리할 때 안방 문이 열렸다.
“뭐야?”
남편 이상록이다. 경도를 보더니 경계심부터 작렬시켰다.
“시청 인사팀 주임님이야. 우리 윤지 수술 때문에 오셨어.”
“무슨 헛소리야? 시청직원이 의사라도 돼?”
이상록이 새우깡 봉지를 집어던졌다.
퍽.
경도 옆의 벽에 맞으며 새우깡 봉지가 박살이 났다. 그러자 작은 방에서 비명 소리가 났다.
“윤지가 깼나 봐요.”
새우깡을 쓸어담던 강남숙이 작은 방으로 뛰었다. 그 문을 열자 이 집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이는…… 작은 침대에 있었다.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손발이 묶여 있었다.
경도는 눈을 의심했다.
1970년대도 아니고 2020년대…… 인권이 하늘을 찌르는 이 시대…….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른 광경을 봐야 했다. 아이가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빠우빠우꾸.”
외계어같은 발작음이 나왔다.
“여보.”
강남숙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