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만렙 공무원님 126화
35. 시청 인사팀을 접수합니다-1
다음 날 하루는 완전 자유의 몸이었다. 아무 부담 없이 여행에 나섰다.
일일투어의 가이드는 미녀 캐서린이었다. 청바지에 면티 하나를 걸친 그녀는 대학생처럼 보였다.
그녀를 따라 마카오에 들어가 육포를 먹고 그녀를 따라 몽콕야시장에 들렀다.
시장에는 없는 게 없었다. 거리의 꼬치를 사 먹고 아이스크림에 우육면도 먹었다.
그렇게 저녁이 되자 홍콩의 심장으로 불리는 스카이 100으로 향했다.
거기 고세완이 있었다.
“대표님.”
경도가 놀라자 고세완이 익살을 떨었다.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닙니다.”
“같이 모셨어야 하는 건데 계약 건이 있어서요.”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죄송했는데 이제 보니 저 없는 게 더 좋아 보이는 이 분위기는? 저 의문의 1패입니까?”
“자꾸 그러실 겁니까?”
“하핫, 썰렁 조크는 여기까지 하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가 예약해둔 테이블을 가리켰다. 전망이 가장 좋은 자리였다.
“캐서린, 우리 오 박사님 어때요?”
“뭐 말이죠?”
“어허, 모시면서 스카우트 추파 좀 던져 보시랬잖습니까? 우리가 자문받을 일이 한두 가지입니까?”
“그럴까하다가 마스터 체면을 고려해서 남겨두었어요.”
캐서린이 공을 넘겼다.
“으음, 이런 건 꼭 내 몫이라지.”
고세완이 뒷목을 긁었다.
돌아보니 홍콩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의 도시로만 이루어진 작은 홍콩.
오색의 불빛들이 꼭 운명을 관장하는 오행의 색처럼 보였다. 저 불빛 아래에는 온갖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행운을 누리는 황색 윤기를 필두로 곤란에 처한 청색과 흑색, 적색의 운명들…….
“오 박사님.”
고세완이 봉투 하나를 꺼내놓았다.
“뭐죠?”
경도가 물었다.
“복채입니다.”
“복채…….”
“제가 드리는 것에 더해 캐서린이 절반을 보탰습니다. 아무 소리 말고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봉투를 열기도 전에 캐서린까지 가세했다.
“복채 바라고 온 건 아닙니다만…….”
경도가 겸손히 사양을 했다. 어차피 모든 경비는 고세완이 댄 바였다.
게다가 김윤광의 지인이니 관상 한 번 봐주는 것에 큰 수고가 들 것도 없었다.
“이건 정당한 대가입니다. 일종의 자문료라고나 할까요?”
“자문료요?”
“우리 세계에서는 그렇게 부릅니다. 받아주십시오. 아니면 제가 김 선배님 볼 낯이 없어집니다.”
“…….”
“내용은 저와 캐서린 몫의 우리 회사 미상장 주식입니다. 제반적인 사항은 저희가 처리할 겁니다. 아직은 몇 푼 되지도 않는 거고요.‘
“대표님…….”
“이거 안 받으시면 우리 회사가 별 볼 일 없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것으로 알 겁니다. 캐서린하고도 그렇게 약속이 되었습니다. 우리 오 박사님은 경영자의 관상만 봐도 그 회사가 길한지 흉한지 아시는 분이다.”
“네?”
“오 박사님이 안 받으면 우리 회사가 비전이 없는 거다. 그러니 휴지조각이라 안 받는 거다.”
“꼼짝 마를 어렵게 말씀하시는군요.”
경도가 웃었다.
“그러니 받아주세요.”
“플리즈.”
다시 캐서린의 지원이 보태졌다.
“고맙습니다.”
더 이상의 논쟁 없이 봉투를 챙겼다. 어차피 작심한 사람들이니 경도가 사양한다고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내용은 미상장주식 2만 주였다.
“고맙습니다. 이제 건배할까요?”
캐서린이 음료를 집어들었다.
챙.
맑은 유리 셋이 허공에서 바디를 부딪쳤다.
스카이100.
그 아름다운 추억은 귀국하는 비행기로 옮겨졌다. 귀국편은 경도 혼자였다. 공항에는 고세완에 더불어 캐서린 남매까지 배웅을 나왔다.
“오 박사님, 저 관상 예약합니다.”
재키가 손을 들었다.
“예약요?”
“새 여자 생기면 데리고 갈게요. 그때 궁합 관상 좀 미리 봐주세요.”
“그러죠.”
은쾌히 콜을 받았다.
“고마웠어요.”
캐서린이 다가와 경도를 허그했다.
“한국 오면 연락하세요.”
그렇게 홍콩의 여정이 끝났다. 풍수사 채일천부터 캐서린 동생의 여자 사건까지, 여덟 첨탑의 끝처럼 뾰족, 짜릿한 경험이었다.
면세구역으로 나와 선물을 골랐다. 형과 어머니 것이 우선이었다. 다음은 엄 팀장과 팀원들 것이다. 다음은 육 과장과 읍장 것을 고른다.
상납이냐고?
그렇다.
공무원들은 아직도 해외여행이나 어떤 통과의례가 있을 때 뭔가를 나눈다.
시보가 끝나는 신참이 떡을 해서 돌리기도 하고 제주도라도 다녀오면 감귤 초콜릿이나 과자라도 나눈다.
더러는 귀찮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정이다. 민간회사는 몰라도 일선 공무원들 사이에는 여전한 관행이었다.
“……!”
선물 득템은 좀 어려웠다. 면세점 물건은 대개 화장품과 주류들이기 때문이었다.
차를 살까?
어머니는 차보다 숭늉을 더 좋아한다.
건강보조식품은?
시골 어르신들, 십중팔구는 잘 보관했다가 유효기간이 경과하면 거름으로 쓴다.
가방은?
시골 5일장에 명품 들고 나가랴?
아우.
머리에 쥐난다.
앞뒤를 돌아봐도 뾰족수가 없다. 관상의 달인도 이럴 때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역시 현찰이 최고?
아이고, 오경도. 낭만 없다.
여전히 시야를 유혹하는 건 화장품과 양주들…….
왜?
안 될 거 없잖아?
경도 눈이 화장품에 꽂혀버렸다.
“몇 살 쯤 되는 분이 쓰실 건데요?”
판매원이 영어로 물었다.
“20살요.”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파격인데 왜 60-70대에 맞춰서 사야 하나? 게다가 어르신들은 젊은이들보다도 더 화려한 원색을 즐기는 편이었다.
에스티로더의 립스틱 두 개에 하얀 미백 효과가 나는 파운데이션을 골랐다. 손이 험하니 록시땅의 핸드크림도 한 세트 득템을 했다.
사다 보니 어머니의 기억이 떠올랐다. 몇 해 전의 친척 결혼식이었다. 어머니가 화장하는 걸 처음 보았다.
장롱서랍에서 꺼낸 어머니의 립스틱은 그야말로 국립박물관용 골동품이었다. 오랜만의 화장이니 손길도 서툴다. 그런데도 진지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우리 엄마.
늙어도 여자다.
시골 할머니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다.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건 늙었다고 해서, 논 밭일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향수는 어때요?”
옆 매장의 판매원이 빈틈을 노리고 들이댄다. 말만 들이대는 게 아니라 시향지까지 흔드는 것이다.
“……!”
향이 끝내줬다. 일종의 그리움이랄까?
에르메스?
명품이다. 여자 화장품 이름은 은빛 덕분에 많이 꿰고 있다. 특히 향수에서는 갓띵작으로 불린다고 했다.
“여자친구가 정말 좋아할 텐데?”
판매원이 염장까지 지른다. 괜한 오기로 차곡차곡 시향을 했다.
쥬르 데르메스 압솔뤼 오드퍼퓸.
그걸로 결정을 했다.
풍수를 체험한 기념이라고 생각했다. 향도 향이지만 향수 칼라가 더 좋았다. 황색윤기가 흐르니 관상전문인 경도가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친이야 천천히 만들면 되니까.
[엄마, 나 홍콩 왔는데 립스틱 하나 샀어. 택배로 보내줄게. 다음에는 같이 오자.]
어머니에게 문자를 날렸다.
[아이고야, 다 늙어서 무슨 립스틱이다냐? 사려면 싼 걸로 하나만 사거라.]
당장 답문이 날아왔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미 계산 다 끝났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
K시는 바빠졌다.
권우일 시장이 취임했다. 시장이 바뀌면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일단 시의 슬로건부터 바뀐다.
권우일은 서예 솜씨가 좋았다. 직원들에게 공모한 시정목표를 친필 붓글씨로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
그걸 시작으로 사소한 것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전임 김경동의 잔해를 밀어내는 것이다.
직원들이 긴장은 새 업무에 있지 않았다. 인사이동이다. 시장이 바뀌었으니 인사태풍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결국 저승사자가 떴다.
부시장이 교체되고 장두환 국장과 보건소장이 철퇴를 맞았다. 시장 취임 직후에 한 사람은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또 한 사람은 공로연수에 들어갔다.
용포읍도 술렁거렸다. 하지만 전 만큼은 아니었다.
용포읍의 위상은 이제 전과 같지 않았다. 큰 변화는 아무래도 다른 지자체들의 벤치마킹 요청이었다.
토마토 완판이 그랬고 그 후에 선전한 튤립 판매도 그랬다. 복지팀의 유기적인 보직배정으로 인한 광속업무처리도 다른 시군구의 관심을 받았다.
무려 12개의 지자체가 다녀갔다. 그 업무는 엄 팀장과 은빛이 맡았다. 삐걱거리던 둘 사람의 팀워크도 점점 더 좋아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형 경규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민원인 상담을 받느라고 받지 못했다.
남편이 입원한 사람이었다. 아이가 둘이니 긴급 지원이 필요하다고 찾아왔다.
여러 가지 조건이 아슬아슬해 지원금 결정이 어려웠다. 겨우 접수를 하고 돌아서니 걸려온 전화가 무려 여섯 번이었다.
“왜?”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많이 걸려온 전화는 둘 중 하나였다. 급한 일이 생겼거나 좋은 일이 생겼거나.
-어, 경도냐?
형의 목소리가 맑게 튀었다.
좋은 일이다.
경도는 바로 감을 잡았다.
“뭐야? 좋은 일 생긴 거야?”
-그럼 너만 좋은 일 있으라는 법 있냐?
“책 떴어?”
-움마? 어떻게 알았냐?
“형이 이렇게 흥분할 게 그것 밖에 더 있어? 진짜 뜬 거야?”
-그래. 형이 사고 한 번 쳤다. 니가 날짜 맞춰서 찍으라던 책 있잖냐? 이게 초반 2천 부를 찍어서 도매상에 맛배기로 보냈는데 한 군데서 단체주문이 들어왔다고 1,000부를 가져갔지 뭐냐? 그래서 너한테 보내지도 못하고 다시 1,000부를 찍었는데 이제 또 다른 도매상에서 800부를 가져갔어. 그래서 3쇄에 들어가려던 차였는데 으아…….
경규가 잠시 말을 멈췄다. 흥분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천천히.”
-이번에는 대기업 주문이 들어온 거야. 무려 2만 부에, 관공서 주문 6천 부, 학교 도서관 비치용으로 12,000부…… 금맥 터졌다.
“진짜?”
-그래. 그렇게 들어온 주문만 벌써 4만 부가 넘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나란히 MD 추천도서로 올랐고 도매상, 일반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난리들이다.
“으아, 대박.”
-이거 어떻게 된 거냐? 너 승진 때문에 날 맞춘 건데 너한테 보내기도 전에 대박이 나버렸으니.
“형.”
-응?
“일단 진정해.”
-응?
“이거 행운 아니야. 그동안 형이 투자한 뚝심이 이제 빛을 보는 거야.”
-경도야…….
“형 관상 보니까 이때쯤 터질 거 같더라. 그래서 내가 날을 맞춰달라고 한 건데 하지만 그것도 형이 좋은 책 만들었으니까 가능한 거지, 안 그래?”
-관상이었구나?
“아니, 형 실력이야. 하나 터졌으니까 이제 쭉 터질 거야.”
-경도야…….
“아아, 정신 차리고, 어쨌든 책은 보내주는 거다?”
-당연하지. 이번 쇄 나오면 보내주마. 몇 부 필요하냐?
“그렇게 대박이면 한 50부? 나도 베스트셀러 내는 형 있다고 자랑질 좀 해야지. 돈은 내가 낸다.”
-야, 그러면 안 돼. 가족끼리 왕창 사면 베스트셀러 사재기 조작이라고 의심 받아. 그러니까 그냥 받아라.
“응?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거야?”
-야, 또 도매상이다. 나 전화 끊는다.
“그래, 형. 축하해.”
이제는 경도가 더 흥분해 있었다. 그렇게 고생하던 형이었다. 이제 그 보상을 받는다.
와우.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았다.
“뭐 좋은 일 있어?”
장애인 민원인을 배웅하던 엄 팀장이 다가왔다.
“아, 예……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 얼굴이 달덩이처럼 훤한데.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우리 오 주임이 영전하려나?”
“네?”
그 순간 엄 팀장의 명궁이 눈에 들어왔다. 달처럼 훤한 건 오히려 그의 얼굴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 보골과 천주골까지 삼각 대들보의 빛이 찬란하다. 천창과 천이궁 역시 황금빛 윤기에 물들어간다.
“팀장님.”
경도 목소리가 떨렸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뇨. 팀장님이 그렇게 바라시던…….”
“내가 바라던 거? 응?”
엄 팀장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말이던가? 최근 아내의 병수발로 잠깐 잊고 있었던 시청입성과 승진…….
“설마?”
“설마 아닙니다. 축하드립니다.”
“오 주임.”
“이마 속에 황금이 들어온 것 같잖습니까? 이번 인사에 승진하실 것 같습니다.”
“시청입성도 아니고 승진?”
“예.”
“오 주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과장님.”
과장님.
경도 상괘의 핵심은 그것이었다.
“어어어……. 내가 승진?”
엄 팀장은 차마 믿기지 않는지 입도 제대로 열지 못했다.
바로 기미가 왔다.
엄 팀장이 사무관 승진 5배수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엄 팀장은 ‘운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경도의 관상을 믿었으니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보이처궁이라는 아내의 회복기 병수발에 충실할 뿐이었다.
두 주일 후, 마침내 경천동지할 인사이동의 뚜껑이 열렸다.
엄 팀장에게 걸려온 전화가 시발이었다.